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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로부터 시작해 보자. 러시아의 푸틴, 터키의 에르도안, 헝가리의 오르반,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언론을 탄압했다, 사법체계를 길들이려 했다, 혹은 독재자다, 이 같은 답들은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답이 아니다. 민족주의자, 이것이 여기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답이다.

식민지 해방 투쟁을 겪은 탓에 민족주의자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는 이들은 다소 의아하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슬라브주의, 마자르화, 투르크제국을 꿈꾸는 이들에게 민족주의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 또한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다시 퀴즈로 돌아가 보자. 유색인종 여의원 4명에게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하는 트럼프, 강제징용배상문제를 놓고 수출규제를 시작한 아베, 이들은 민족주의자인가? 여기서 준비한 답은 '그렇다'이다. 아베가 극우민족주의자인 건 맞다 치더라도 트럼프는 인종주의자이지 왜 민족주의자인가 하고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세계에 밀어닥친 민족주의 파도

일단 그런 의구심들은 잠시 미뤄 두고 이번엔 지도를 펼쳐 보자. 약진하는 민족주의의 깃발이 보일 것이다. 러시아로부터 시작해 동유럽을 휩쓸고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거쳐 바다 건너 영국까지 상륙한 바람. 유럽의회선거에서 브렉시트당에게 1당을 선사한 영국 국민이, 부르카를 착용한 여성을 은행 강도에 빗댄 보리스 존슨을 총리로 맞이한 순간, 유럽의 민족주의 지도는 기필코 완성되고 말 것이다.

트럼프가 선전하고 있는 아메리카를 잠시 건너뛰면 태평양 일대 동아시아에서 단연 돋보이고 있는 아베의 대야마토주의 깃발이 펄럭인다.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를 사실상 무력화 시키고 교육기본법을 제정하고 자위대법을 개정하고 미일동맹관계를 재정립하고 마침내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의 숙원인 개헌을 향해 한 발 한 발 집요하게 전진하는 아베. 그러나 동아시아에 일본과 아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래 전부터 있었기에 그 존재를 잠시 잊고 있던 세력, 중화민족주의. 기실 반도체 수출규제는 아베의 독창적 수법이 아니었다. 센카쿠 – 디오위다오 열도 분쟁 때 중국이 했던 수법을 모방한 것일 뿐. 중국은 분쟁이 시작되자 일본에 회토류 수출을 금지했었다. 그러니 최근 러시아와 중국 군용기가 독도 상공에 날아든 것은 결코 우연일 리 없다.

울리히 백, 위험사회론

기존의 보수 우파와, 할아버지 세대보다 보수적이라는 젊은층의 등장에 힘입은 민족주의의 물결, 어떤 조건이 이런 현상을 만들어 낸 것일까. 세 석학의 이야기로 풀어보자.

우선 울리히 백. 필요한 핵심만 추려 보자. 백에 따르면 후기근대사회는 위험사회다. 전기근대산업사회의 '나는 배고프다, 나는 불평등하다'가 후기근대사회로 오면 '나는 불안하다, 나는 두렵다'로 바뀐다. 개인주의화 때문이다. 후기근대사회에 개인은 다른 사람들과 단절된 채로 자기 운명의 모든 짐을 떠안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무엇이 개인주의화를 촉진했는가. 첫 번째 요인은 계급으로부터의 단절이다. 아니 직장으로부터의 단절이다. 세계화된 자본주의는 계급을 조각조각 분절해 분열시킨다. 유연하고 이동성이 큰 일자리로 사람들을 내몬다. 두 번째 요인은 가족으로부터의 단절이다. 여성의 해방은 급격하게 가정의 안정성을 무너뜨린다. 핵가족조차 무너진다. 출산율 저하, 이혼, 비혼이 증가한다.

이렇게 공동체로부터 단절된 개인은 스스로의 고독한 생존을 위해 불가해한 타자로 채워진 위험사회와 맞서야 한다. 그러므로 타자는 두려운 존재이다. 두려움이란 곧 혐오의 대상이란 뜻도 된다. 미지의 세계를 모두 오염된 것으로 간주하는 원시 부족처럼 예측 불가능한 위협의 존재들에게 할 수 있는 대응이란 의심과 저주밖에 없다.

지그문트 바우만, 액체근대론 그리고 홀로코스트의 현대성

비슷한 듯 다르게 바우만은 후기근대사회를 규정한다. 자원 제도 규범 가치가 유동적으로 변하는 액체사회에 진입했다고. 고체처럼 확실했던 이전 산업사회의 공적 영역은 이제 그 믿음의 기반을 상실했다. 예컨대 어제의 상사와 부하, 남녀 연인 관계가 오늘도 지속된다는 보장은 없다.

그래서 개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주변 상황에 대한 고려 없는 자신만을 위한 맹목적 투자다. 숲 속에 사냥감이 다 떨어지든 말든 신경 쓸 필요 없이 남이 채 가기 전에 새끼 짐승까지 거둬가는 이기적인 사냥꾼처럼. 그러나 그런 개인을 찾아오는 건 필연적으로 정체성의 위기다. 끊임없이 흐르는 세상에서 홀로 사냥에만 몰두하고 있는 '나'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래서 정신없이 소비한다. 옷과 차와 브랜드로 스스로를 증명해 보려고. 소셜 네트워크에 접속한다. 수천 수만의 사람과 연결을 이어가려고. 애석하게도 그런 노력이 불러오는 건 정체성의 실종이다. 소비는 일회적이고 네트워크는 언제든 접속을 차단해 버릴 수 있는 대체 가능한 단속적 관계인 탓에. 어쩔 수 없이 도피처를 찾아본다. 매체의 홍수 속에 감각을 맡긴다. 피로감에 물든 감각은 새로운 피, 그러니까 더 센, 더 자극적인 감각을 자꾸 달라고 보챈다.

그래서 모든 일이 무감각해진다. 공개 처형을 낄낄대며 구경하는 구경꾼처럼 타자의 불행은 구경거리 조롱거리로 전락한다. 도덕적 불감증, 무관심종자, 혐오하는 인간이 탄생하는 것이다. 현대적 의미의 홀로코스트가 발생할 수 있는 맥락이 바로 이런 조건이다. 싸구려 옷 소비와 지리멸렬한 페이스북의 사생활 고백, 매체로의 감각적 도피로도 채워지지 않은 '나'의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의탁할 수 있는 곳은 공동체밖에 없다. 요새 속에서 경비원을 둔 일부의 부자들과 달리 이제는 계급 계층이 뒤섞여 거대한 프레카리아트로 무리화된 군중이 안전 강박증을 핑계로 정체성을 확인하는 단위, 민족. 그러기에 홀로코스트는 과거의 사건, 유대인만을 대상으로 한 사건에서, 현대성을 갖는 보편적인 사건으로 격상된다. '현대성의 진실'이란, 역사가 거대한 거짓말로부터 이익을 얻는 자들의 사기극에 의해 연출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으며, 사회주의권 몰락 후 거대한 거짓말이란 우파의 민족주의적 선동밖에 남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앤서니D. 스미스, 양날의 칼인 민족주의

민족주의 연구가 스미스에 따르면 민족은 필연적으로 '영토성'과 '인종성'을 요구한다. 영토성은 외적이고 물리적인 경계 짓기에 활용되지만 인종성은 내적이고 문화적인 경계 짓기에 활용된다. '우리'와 '타자'를 구분하는 이런 경계 짓기는 안과 밖 양쪽으로 날이 세워진 칼과 같은데, 밖으로 향하면 팽창주의가 되고 안으로 향하면 인종주의가 된다.

양자의 요소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 서로를 강화하는데, 자민족의 신화 역사 문화 종교 같은 인종성을 강화하면 강화할수록 그 민족의 영토화 욕구는 강해지고, 영토화 욕구가 강해질수록 자민족의 우수성과 인종주의적인 선동이 강해지는 것이 일반적인 과정이다. 민족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통상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 경우다.

첫째는 인종적인 민족 집단이 그에 걸맞는 영토를 갖지 못한데서 비롯한 것으로, 아르메니아인이나 쿠드드인처럼 이산민족이거나 바스크인이나 카탈루냐인처럼 그 사회의 지배적 인종이 되지 못할 경우에 발생하는 분쟁이다. 둘째는 팽창주의적인 민족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특정한 민족이 우월한 힘을 바탕으로 타민족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정치적 압박을 가할 때 인근 민족들이 일제히 민족주의적 자극을 받아 발생하는 분쟁이다. 이스라엘의 글란 고원 점령이 인근 아랍민족주의를 자극했던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악한 민족주의, 선한 민족주의

누군가의 말처럼 '현대 사회 최고의 종교'라는 민족주의. 민족주의는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이제 다시 트럼프와 아베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트럼프. 내부를 향해 휘두르는 칼은 외부를 향해 날을 세울 가능성을 항상 내포한다. 호르무즈 해협이 됐건 북한이 됐건 그보다 더 만만한 베네수엘라가 됐건. 우리나라를 겨냥해 칼을 찔러대는 아베, 언제든 내부를 향해 칼을 겨눌 수 있다. 요코타 메구미 납치 사건으로 일어났던 재일교포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혐한 감정을 떠올려 보라. 지금도 일본엔 백만에 가까운 우리 교포들이 살고 있다. 그러니 민족주의는 위험한 칼이다.

칼집이라는 든든한 안도감에서 뽑혀 나온 순간 천둥처럼 수백만 수천만을 동원해 내는 무기가 된다. 팽창적인 공세적 민족주의는 말할 것도 없지만 불가피하게 거기에 맞서야 하는 자위적이고 방어적인 민족주의도 선함이 자동으로 인정되기 어려운 까닭이 이 때문이다. 작년 예맨인 입국 사태 때 우리 사회가 보여주었던 인종주의적 행태를 돌이켜 보라. 내전을 피해 도망쳐 온 사람들에게 70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국민청원을 통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올해에는 가정폭력 희생자인 베트남 여성을 향해 '기획이혼녀'라고 비난하며 신인종주의에 열을 올리고 있다.

아베는 과거사에 더 이상 발목을 잡히지 않겠다고 결단했다. 그리고 집단자위권의 행사 주체로 동아시아를 넘어 태평양 일대에 군사력 파견의 길을 탐색하고 있다. 이에 맞선 중국 러시아의 군사협력도 독도 연합 비행으로 펼쳐지고 있다. 여기에 더해 북한은 미사일 발사로 북핵 이슈가 여전히 중요한 문제임을 부각시키려 애쓰고 있다.

한반도 주변에서 펼쳐지는 복잡한 정세. 전 민족의 역량을 동원해 마땅히 맞서야 할 운명적 파란, 부디 우리 민족이 안과 밖을 돌아보고 선한 민족주의를 지켜내는 민족이 되었으면 싶다. 역사가 지속되는 한 계속될 민족주의의 도전 앞에서 우리 민족만큼은 역사에 오점을 남기지 않는 깨끗한 민족이 되었으면 싶다.

태그:#동아시아 정세, #혐오사회론, #민족주의, #신인종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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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로 이란 학생 김민혁군과 김민혁군의 아버지 난민 인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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