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값싼 자동차와 텔레비전으로 유명해지기 전, 한국은 고아들로 유명했다. - 피터 마스(워싱턴 포스트)

1980년 대 초 프랑스문화원을 들락거릴 때 일이다. 프랑스문화원장이나 교육 파트에 부임하는 사람들이 지도를 들고 한국이 도대체 어디쯤 있는지 찾아봤다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해서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한국은 88 올림픽을 유치하면서 세계의 이목을 끌게 됐지만, 부끄럽게도 1980년대까지 한국은 '고아 수출' 1위 나라였기에 외신들은 한국을 미개한 나라, 고아들의 나라라고 비꼬았던 것이다.
 
해외 입양의 숨겨진 역사
▲ 왜 그아이들은 한국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나 해외 입양의 숨겨진 역사
ⓒ 뿌리의집

관련사진보기

 
해외입양의 숨겨진 역사를 다룬 책 <왜 그 아이들은 한국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나>는 70년 전 해외입양의 시작부터 아동수출국이라는 부끄러운 역사를 이어온 80년대까지의 민낯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승만의 단일민족주의와 미국의 기독교적 미국주의, 선진국이라는 우월감과 특권의식, 공산주의로부터 희생자를 구출한다는 명분이 맞물려 한국 아동들이 미국에 입양되기 시작한다.
 
국무회의에서 이 대통령은  (...)이 나라에서 빨리 내보내기만 하면 그다음에 무슨 일이 생기든 상관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 출신 영부인도 같은 생각이다. "펄 벅은 그는 '가다가 태평양에 버리는 한이 있어도' 한국계 백인 아이들을 치워버리고 싶어했다"며 대통령의 말을 인용했다.

한국 대중들도 미국인들이 한국계 혼혈아를 입양하는 것을 반기는 분위기였다. GI 베이비들은 한국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따라서 "아이들이 다른 곳에서 기회를 얻어야 한다." 한국인들은 "거지들과 원치 않는 아기들이 해외로 입양되어 기쁘다"는 것이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94쪽
 
이승만 정부는 국가 간 입양을 허용하는 법이 통과되지 않자, 행정 조치를 통해 GI 베이비(미군 병사와 현지 여성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과 전쟁고아들을 해외로 내보낸다. 외국인이 법적으로 한국 국민을 입양할 수 있다는 공식 해석과 '미국 이민 승인을 위한 기본 정책'을 통해 국가 간 입양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복잡한 행정절차와 까다로운 심사를 피해, 간편한 방법으로 아이들의 대량 입양이 기능하도록 만든 것은 해리 홀트였다. 그는 자녀들이 6명이나 되었지만 한국계 GI 베이비 8명을 자녀로 입양하면서 입양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해리 홀트 부부는 1956년 홀트양자회를 설립하고 입양사업과 이민법 개정 운동 등에 앞장서며 1960년대 입양사업을 이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입양이 필요했을 GI 베이비 대신, 순수혈통의 한국 아동들이 대부분 고아 아닌 고아로 둔갑돼 대량입양사업의 희생자가 된 것은 불행하고 부끄러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미국의 중산층 부부들은 기독교적 미국주의와 미국의 제국주의를 중화시키기 위해 '사랑'이라는 개념을 활용해 미국의 위상을 높이려 했다.
 
어떤 의미에서, 가족의 사랑이  "인종과 민족의 경계를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미국 정부에 이 도구를 제공한 장본인은 해리 홀트와  GI 베이비의 양부모 같은 기독교인이었다. 기독교적 미국주의자들에게 미국이라는 나라는 '사랑으로 경계를 뛰어넘고  곳곳에서 인종차별과 공산주의를 박멸해줄 기독교와 미국의 가치를 퍼뜨리는 가족'이었다. -179쪽
 
입양아를 가족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대부분 그 행위를 수단으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국 아동입양의 시작은 참전군인들이 저지른 성범죄나 유기 아동에 대한 죄책감, 전쟁고아들에 대한 연민 등 인도주의에서 시작된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관계는 절차가 필요하고 그 절차를 관장하는 주체가 지향하는 목표가 무엇인가에 따라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입양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면서 입양은 하나의 산업이 되고 한국은 고아수출국이라는 불명예를 얻게 되고 말았다.
 
한국 아동 입양이 인도주의 운동으로 시작됐다가 장터로 변해버렸다고 말하는 건 상황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발언이다. 하지만 1970년대 공급 중심에서 수요 중심으로 중심축이 이동하면서 하나의 산업이 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처음에는 "아동에게 가정을 찾아주는것'에 방점을 찍다가 나중에는 "가족에게 아동을 찾아주는 것"에 방점을 찍게 된 것이다. -261쪽
 
불행하게도 1950년대 입양을 위한 잠정조치를 기반으로 1960년대 확립된 한국 아동 입양 정책과 조직은 1970년대와 1980년대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 때 아동 해외입양산업의 도약의 뒷받침이 됐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해외입양 산업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했다.
 
실제로 어떤 이들은 가장 인기 있으나 인정받지 못한 수출품 덕분에 한국이 제1세계 국가로 도역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한국 아동들 얘기다. 해외 입양 산업은 한국의 '경제 기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외화를 벌여들였고, 힘 있는 서구 동맹들과의 우호를 증진했고, 과잉 인구를 조절하는 안전밸브 기능을 했고, 토착 사회복지 기관들을 개발해야 하는 정부 부담을 상당 부분 덜어주었다. -278쪽
 
개발 독재를 통한 경제부흥을 앞세웠던 독재자 박정희와 전두환에게 여성이나 미혼모의 아동, 고아들은 성장을 위한 도구일 뿐 인권이나 인격을 갖춘 존재가 아니었다. 여성들이 담당한 생산 노동과 재생산 노동이 한국 경제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이유다.

농촌의 젊은 젊은 여성들은 도시로 흘러들어와 공장 노동자, 남의 집 가정부, 식당 종업원, 버스 안내양, 성 노동자로 전락했고 저임금 장시간 노동과 가난으로 대부분의 미혼모는 아이를 키우기 힘들었다. 박정희는 여성노동자와 아동을 희생양 삼아 경제 도약을 이뤘던 것이다.
 
박정희는 한국 유교 문화, 성 규범에 남권주의 군국주의 이념을 결합한 가부장적 민족주의를 앞세워 나라를 전시 체제로 편성했다. 이 체제에서 '우리'가 총력을 기울여야 할 목표는 바로 경제 발전이었다.

박정희는 여타의 유교적 계층 관계에 맞춰 국가와 사회의 관계를 설정했다. 국가가 유교적 의미의 가장이라면, 국민은 유교적 의미의 참한 여성처럼 가장에게 순종하는 식솔이었다. 박정희는 "자궁과 노동력을 갖춘 몸" 이라는 말로 근대화 과정에서 여성이 담당할 역할을 분명히 밝혔다. - 293쪽
 
한국의 해외 입양 정책은 GI 베이비들에게 아버지의 나라를 찾아주려는 것도, 가난하게 버려진 고아들에게 행복한 가정을 찾아주려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들이 버리고 간  아이들을 입양하려는 군인은 거의 없었고 GI 베이비보다 '순수 혈통'의 한국 아동들을 입양하려는 중산층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는 데서 그 사실이 증명이 되고 있다. 한국 전쟁때인 1950년대 태어나 한국에 머문 '아메라시안'들은 한국인도 아버지 나라의 시민도 아닌 상태로 기지촌 주변에서 가난하고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은 전쟁중에 태어난 GI 베이비들을 치워버릴 목적으로, 박정희와 전두환은 해외입양산업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취할 목적으로 아이들을 한국에서 떠나보냈다. 한국은 아메라시안만이 아니라, 이후 베트남 전에 참전해 만들어낸 코시안들에 대한 책임도 회피하고 있다.

해외 입양은 "이민 확대 및 친선대사' 정책의 일환으로 계속 활용돼 전두환 정권에서 극적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2000년 대 들어 국내 입양이 늘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해외입양을 끝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2008년 '아동이 친부모와 함께살 수 있도록 국가가 보살펴야 하며 해외 입양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는 협약에 50개국 이상이 서명했고, 미국은 2008년부터 시행중이라고 한다. 한국은 협약에 서명은 했지만 비준은 하지 않았다니 한국의 아동에 대한 인식 지점을 보여주는 부끄러운 역사이자 우리의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왜 그 아이들은 한국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나 - 해외입양의 숨겨진 역사

아리사 H. 오 (지은이), 이은진 (옮긴이), 뿌리의집(2019)


태그:#해외입양, #숨겨진 역사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