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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기사] 일색칠로 태어난 달항아리, 오색으로 옻을 입다

오는 21일까지 서울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 신관(T:02.739.4937) 갤러리는 이종헌 개인전 '칠색유감(漆色有感)'을 열고 다양한 현대적인 감각의 달항아리를 선보이고 있다.

이종헌 작가는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1년 동국대학교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청와대 신본관 벽화 제작에 참여한 이력을 갖고 있다. 1998년 중국 베이징 중앙미술학원 벽화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후 2010년에 중국 남경사범대학 미술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2004년 한국옻칠화회(현 한국옻칠협회)를 설립하고 (사)민족미술인협회(이하 민미협)의 옻칠분과위원장을 역임하다가 2017년, 2018년에는 제15대 민미협 회장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좌>전남 보성 작업실에서 작품활동을 하면서 강서대묘와 중묘의 화강암에서 옻칠한 자연도막이 떨어져 나올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화강암에 옻칠 을 한 후 그 과정을 연구 관찰한 데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중간>1990년 대 중반 중국 집안 오회분 오호묘에서 옻칠벽화를 조사하고 있는 모습  <우> 강서대묘 중묘의 화강암에서 옻칠 벽화가 훼손되는 과정을 분석하기 위해 실험 관찰한 화강암 들.
 <좌>전남 보성 작업실에서 작품활동을 하면서 강서대묘와 중묘의 화강암에서 옻칠한 자연도막이 떨어져 나올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화강암에 옻칠 을 한 후 그 과정을 연구 관찰한 데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중간>1990년 대 중반 중국 집안 오회분 오호묘에서 옻칠벽화를 조사하고 있는 모습 <우> 강서대묘 중묘의 화강암에서 옻칠 벽화가 훼손되는 과정을 분석하기 위해 실험 관찰한 화강암 들.
ⓒ 김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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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이 있는 곳에서는 저항이 있기 마련, 예술도 그러해

기자 : 이제 좀더 깊은 이야기로 들어가 볼까요? 이명박 · 박근혜 정권 하에서는 블랙리스트이기도 하셨죠?
 

이종헌 작가(이하 이종헌) :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해도 될 듯해요. 블랙리스트로 이름이 올라가 있었죠. 하지만 그 시절 이름이 올라가고, 안 올라가고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였던 시절이죠. 기자님 역시 이름 안 올라간 블랙리스트였을 테고, 그랬기에 우리들이 모여 2016년 광화문 광장에서 시민혁명을 이루어 낼 수 있었죠.

기자 : 올해 초에 제15대 민미협 회장 임기가 끝나신 걸로 아는데 왜 민미협이라는 단체에서 활동을 하셨고, 또 앞으로는 어떤 활동을 하실 계획이세요?

이종헌 : 민미협은 '민족미술인협회'의 줄인말이죠. 박정희 독재시절 때부터 끊임없이 사회의 변혁과 함께 하면서 한국 리얼리즘 미술의 한 축을 구축했어요. 당시만 하더라도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그리면 빨갱이 취급을 받았어요. 저는 전두환·노태우 독재 시절에 대학생이었는데 그런 활동들이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그 때 당시 학생 신분으로 걸개 제작에 참여하고, 집회에 걸 걸개를 숨겨서 집회 장소로 운반하기도 했는데 그런 일들은 당연히 사람이라면 할 수 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억압이 있는 곳에는 저항이 있기 마련이죠. 또 한 편으로는 예술의 한 측면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의미에서 민미협은 우리나라의 편향된 미술 사조를 극복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단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계속 민미협 옻칠예술분과위원장으로서 또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죠.

기자 : 그럼 본격적으로 좀 여쭤볼까요? 벽화가 전공이시던데 벽화와 옻칠화, 그 사이에는 어떤 인연과 사연이 있는지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북한에서 발간한 「조선유적유물도감」총 20권 중 제4권에 실린 집안 사신 무덤의 벽화. 이종헌 작가 소장
 북한에서 발간한 「조선유적유물도감」총 20권 중 제4권에 실린 집안 사신 무덤의 벽화. 이종헌 작가 소장
ⓒ 김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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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헌 : 잠시 청와대 신본관 벽화제작에 참여 했던 경험도 있었지만 고구려 벽화에 관심이 있었어요. 고대부터 현대의 벽화를 공부할 수 있는 곳이 북경중앙미술학원이어서 그곳 대학원에 입학을 하니 리린쭈어, 손징포, 장스엔 교수님들께서는 앉아서 그림 그릴 생각하지 말고 다니면서 많이 보라고 하셨어요.

중국 전역을 미친 듯이 돌아다녔죠. 돈황, 맥적산, 쿠처 석굴뿐 아니라 한대의 묘실벽화, 당대의 묘실벽화, 윈깡과 따통의 석굴, 산시성지역의 오대, 송, 원, 명, 청나라의 사관벽화(불교도교벽화), 요대사관벽화 등을 돌아다니면서 수천 년 동양 문화의 축을 이루는 작품들을 봤죠.

"다시 고구려벽화였죠, 제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은 사건이었어요"

그때는 사실 기가 죽어버렸죠. 우리 전통미술이 거기에도 있더군요. 우리 전통미술인 불화나 민화의 뿌리는 온통 거기에 있었어요. 하다못해 까치와 호랑이와 책거리그림까지…. 좋게 말하면 중국으로부터 유입이 된 거고, 까놓고 말하면 베껴온 거구요. 공부는 많이 됐지만 한동안 젊은 화가에게는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을 많이 했죠.

그러다가 다시 고구려 벽화였죠. 1990년대 중반에 보게 된 중국 집안에 있는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인 고구려 오회분 4호묘와 5호묘의 옻칠화로 된 벽화예요. 그 벽화를 보는 순간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번개 맞은 듯했어요. 보는 순간 마치 제가 그 시절에 그 벽화를 그린 화가처럼 처음 제작과정부터 마무리까지 어떻게 그려졌는지 생생하게 알겠더군요. 지금도 그 때 생각만하면 온 몸의 솜털이 다 일어서는 것 같아요. 제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은 '사건'이에요. 이전에도 옻칠화를 하고는 있었지만 제 두 눈으로 옻칠화로 된 고구려벽화를 봤으니 옻칠화를 열심히 할 수밖에요.
  
이종헌 작가 소장의「조선유적유물도감」총 20권 중 제4권에 실린 강서대묘의 내부 벽화 모습.우리 눈에 익은 현무와 청룡, 주작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종헌 작가 소장의「조선유적유물도감」총 20권 중 제4권에 실린 강서대묘의 내부 벽화 모습.우리 눈에 익은 현무와 청룡, 주작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김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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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고구려벽화가 그렇게 아름다웠나요?

이종헌 : 그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문화사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집안의 오회분 4호묘와 5호묘는 돌무덤 안에 벽면들을 옻칠로 그림을 그린 화강암으로 장식을 했어요. 고대 국가에서 옻은 전략물질이에요. 왕과 귀족만이 옻칠로 된 기물들을 사용할 만큼 귀했어요. 기물에 옻칠을 하면 단단하고 아름답고 또 위생적인 측면도 있구요. 화살촉을 화살대에 붙이는 접착제가 옻이구요, 갑옷에 바르면 녹이 슬지 않아요. 그러니까 나라에서 옻을 관리하는 관청을 두고 아무나 쓰지 못하도록 국가 차원에서 관리를 했죠.

그렇게 귀중한 옻을 사용해서 벽화를 그린다는 것은 엄청난 힘을 가진 강성한 국가가 아니고서는 꿈도 못 꿀 일이죠. 중국에 여러 나라가 들어서고, 망하고 하는 동안 고구려는 계속 고구려였어요. 힘이 강하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이죠. 중국에도 많은 벽화들이 남아 있지만 고구려처럼 옻칠로 벽화를 완벽하게 구현한 곳은 없어요.

집안의 사신총, 오회분 4호묘와 5호묘, 북한 평양의 강서대묘와 중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되어있는 옻칠로 그린 유일한 벽화예요. 세계 어디에도 없어요. 기물에 옻칠을 한다는 것은 동아시아 공통의 문화라고 볼 수 있지만 오회분 4호묘와 5호묘 그리고 강서대묘와 중묘의 옻칠 벽화는 옻이라는 재료를 예술적으로 극대화 시켜 그야말로 '명작'을 만든 거예요. 어떻게 보면 우리가 동양문화권에서 옻칠로는 최고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자 : 중국 집안성 고구려 오회분 4호묘, 5호묘는 직접 보셨고, 그럼 평양의 강서대묘도 가 보셨어요?

이종헌 : 중국 집안의 오회분 4호묘와 5호묘의 벽화들은 한동안 그곳에서 살다시피 해서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잘 알 수 있어요. 특히 오회분 4호묘 벽화 중에 한 부분을 제가 직접 손으로 본을 뜨고 또 제 작품으로도 구현해서 발표도 했어요. 평양에 있는 강서대묘는 직접 못봤지만 사진으로 보니 어떤 과정을 거쳐 무덤의 벽화로 완벽하게 장식을 했는지 그냥 다 알겠더군요.

지금은 유명을 달리하신 고 임권웅(ICOMS-KOREA) 연구원과 함께 「고구려 오회분 오호묘 벽화의 조벽지 기법에 대한 연구 – 옻칠 기법의 가능성에 대한 검토」라는 논문을 같이 발표했어요. 임권웅 박사가 유명을 달리 해서 그렇지 조금만 오래 사셨더라면 아마도 같이 복원 작업까지 할 수 있었을 텐데 많이 아쉽죠.
 
이종헌 작가가 1990년대 중반 직접 중국 집안 오회분 5호묘 내부 벽화를 찍은 사진이다.
 이종헌 작가가 1990년대 중반 직접 중국 집안 오회분 5호묘 내부 벽화를 찍은 사진이다.
ⓒ 이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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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그럼 중국 집안성 오호분 4회묘, 5회묘와 강서대묘, 중묘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이종헌 : 중국 집안성 오회분 4회묘, 5회묘가 아직 초기의 모습으로 규모면에서도 작고 그림이 좀 거칠지만 7세기 제작된 강서대묘와 중묘는 화강암을 절단하고 깍고, 연마해서 이은 기술도 훨씬 뛰어나구요, 그림도 완벽하고, 규모면에서도 엄청나죠. 오회분 4호묘나 5호묘의 그림이 제가 좀 거칠다고 표현했지만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로운지 제가 직접 찍은 사진을 보여드릴게요. 그러니 강서대묘나 중묘는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집안성 오회분 4호묘나 5호묘의 벽화도, 강서대묘는 우리 인류의 문화 유산이에요.
          
<좌>는 「조선유적유물도감」제4권에 실린 중국 집안 오회분 4호묘 내부사진 <우>는 1990년대 중반 이종헌 작가가 직접 찍은 오회분 5호묘 내부 벽화 사진. 벽화와 재료에 대한 이해 정도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좌>는 「조선유적유물도감」제4권에 실린 중국 집안 오회분 4호묘 내부사진 <우>는 1990년대 중반 이종헌 작가가 직접 찍은 오회분 5호묘 내부 벽화 사진. 벽화와 재료에 대한 이해 정도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 김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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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에 대해, 재료인 옻칠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강서대묘와 중묘의 보수와 복원이 가능해요. "

기자 : 일본이나 북한에서 모사도를 제작해 우리나라 박물관에 전시도 하고 그러던데 어떤가요?

이종헌 : 꼭 필요하죠. 그런데 옻칠이라는 재료에 대한 이해와 경험 없이 복원을 하겠다고 들면 문제가 크죠. 또 옻칠로 된 벽화를 붓으로 모사를 하는 건 그냥 베낀 그림일 뿐 감상적 측면에서도 전승적 측면에서도 별 의미가 없죠. 제가 찍은 이 사진이랑 북한에서 찍어 책으로 만든 이 사진이랑 비교해 보세요. 어떤 게 더 나아요? 재료에 대한 이해 없이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또 부분적으로 옻칠로 그린 부분이 있고, 유화방식인 기름을 섞어 그린 부분이 있구요, 그림을 그리기 전 화강암에 어떻게 처리를 하고 그렸는지 볼 줄 알아야 해요. 옻칠로 그리기가 쉽지 않거든요.

일반 채색화 물감과 달리 옻은 점성도 높고. 흔히들 무덤을 만들고 벽면에 그렸다 생각하시는데 화강암을 눕힌 상태에서 그린 후 축조한 겁니다. 벽화 제작 과정을 이해 못하니 무덤 만든 순서를 잘못 이해하고 있어요. 재료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해요. 또 강서대묘, 중묘를 복원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제가 한 번 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옻칠화는 천년이 지나도 어제 그린 것처럼 보존이 가능하단 말예요.
  
<위> 이종헌 작가가 1990년대 중반에 직접 찍은 중국 집안 5회분 5호묘 벽화 일부. <아래> 중국 집안 오회분 4호묘를 조사하고 일부를 직접 본을 떠서 현대 옻칠 회화로 재해석해 화강암에 그린 「고구려벽화 오회분의 모사화」
 <위> 이종헌 작가가 1990년대 중반에 직접 찍은 중국 집안 5회분 5호묘 벽화 일부. <아래> 중국 집안 오회분 4호묘를 조사하고 일부를 직접 본을 떠서 현대 옻칠 회화로 재해석해 화강암에 그린 「고구려벽화 오회분의 모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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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만약 기회가 주어져 평양의 강서대묘와 중묘를 복원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방문한 후 1천 5백년전의 모습 그대로 재현한다면 어떨까요?

이종헌 : 시간이 지나면서 온도의 변화로 인한 결로 현상으로 인해 훼손이 계속 진행되고 있어 지금이라도 빨리 보수와 복원을 시작해야만 해요. 제가 몇 년 전부터 '강서대묘·중묘 보수와 복원을 위한 남북한 공동연구' 팀을 꾸리려고 방법을 찾고 있는데 쉽지가 않더군요. 기회만 닿는다면 정말 제대로, 처음 만들어졌을 때와 똑같이 강서대묘와 중묘의 사신도를 복원하고, 동일한 재료와 옻칠벽화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재현해서 누구라도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어요. 제가 벽화를 전공한 이유도, 옻칠화에 목숨을 거는 이유도 다 여기에 있어요. 지키고 보존하고, 또 다음 세대에게 전해야 하죠. 그게 우리의 의무고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기자 : 우리나라의 대학에서는 옻칠예술을 전공할 수 있는 관련학과와 커리큘럼이 있나요?

이종헌 : 안타깝게도 지금은 학부에서 전공과목으로 개설조차 되어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서 미술 전공자들의 취업률이 낮으니 대학에서 예술 분야 전공을 축소시키는 과정에서 없어졌죠. 일본은 잘 알다시피 대학 커리큘럼도 잘되어 있구요. 옻칠예술가나 장인들이 그 나라의 대표 문화로서 대접을 받고 있어요. '재팬(japan)'이 옻칠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베트남은 중국이나 일본, 우리나라와는 좀 다르지만은 옻칠화 자체를 화가들이 기본으로 배워서 어떤 작업을 하더라도 자유자재로 적용할 만큼 자기네들의 고유한 문화로, 또 칠공예품들을 통해 생활예술로 정착했습니다. 중국은 옻이 동양 문화권의 시작과 함께 존재해왔다는 것을 잘 알아요. 동양 문화의 해석이 가능한 키워드인 걸 알죠. 그러니 미술대학 각 학과마다 옻칠전공을 두고 엄청나게 교육에 투자를 하죠.
  
이종헌 작가 소장의「조선유적유물도감」총 20권 중 제4권에 실린 강서중묘 내부 벽화 모습. 청룡, 주작, 백호의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이종헌 작가 소장의「조선유적유물도감」총 20권 중 제4권에 실린 강서중묘 내부 벽화 모습. 청룡, 주작, 백호의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 김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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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헌 작가가 1990년대 중반 직접 중국 집안 오회분 5호묘 내부 벽화를 찍은 사진이다.
 이종헌 작가가 1990년대 중반 직접 중국 집안 오회분 5호묘 내부 벽화를 찍은 사진이다.
ⓒ 이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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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껏해야 나전을 올리는 배경으로서의 칠, 제기의 옻칠 등 뭐 그 정도였지만 많은 변화들이 있어요. 옻칠에 대해 궁금해 하고, 하고 싶어 하고, 배우고 싶어 해요. 그럼 제대로 문화를 만들어야죠. 그저 기능적 측면이 아니라 동양 문화의 키워드인 '옻칠'을 문화의 맥락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 해요. 일본의 옻칠 예술은 정교해요, 대신에 대범하게 나가지를 못하구요, 중국은 대범하게 나가는데 정교함이 부족하구요. 우리나라는 대범함과 정교함을 다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있어요. 아시아의 옻칠 예술 문화의 중심으로 우뚝 설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기자 : 마지막으로 꼭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이종헌 : 우리 미술에 대한 올바른 이해, 저는 그것이 고구려 사신총, 오회분 사호묘, 오회분 오호묘와 평양의 강서대묘, 강서중묘에 있는 사신도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중국 미술을 베끼는 데서 시작한 미술이 아니라 이 땅에 살던 그 누군가가 그들만의 눈으로, 손으로, 감성으로 그린 그림 말예요.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동양의 문화를 해석할 수 있는 응집된 힘이 있는 그 그림들을 이 땅에 다시 살려내 보고 싶어요.

시급히 강서대묘 · 중묘 보수와 복원을 위한 남북한 공동연구』팀을 꾸려
강서대묘와 중묘의 복원과 보수에 들어가야만 해


기자 : 평양의 강서대묘나 중묘에도 우리가 언젠가는 갈 수 있겠지요. 통일의 전초단계로 남북한이 공동으로 강서대묘와 중묘가 지닌 옻칠 벽화의 예술성에 대한 연구를 같이 해서 복원도 하고, 재현을 통해서라도 시공간을 뛰어넘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꼭 보고 싶군요. 또 우리 전통 미술에 대한 폭넓고 다양한 이해들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해야겠군요. 긴 시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종헌 : 참 기자님, 마지막으로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드릴게요. 경주 포석정에 술잔을 띄우면 벽에 부딪히지 않고 떠다니는 술잔으로 풍류를 즐겼다는 이야기 아시죠? 그 때 사용한 술잔이 칠기로 만든 잔일걸요, 칠기로 만든 잔이 아니면 그렇게 뜰 수가 없거든요. 재밌죠? 문화의 맥락 속에서 부분을 이해한다는 거요.
  
동양문화권에는 경주 포석정과 비슷한 연못을 만들어 칠기로 만든 '이배귀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耳杯)'에 술을 따라 풍류를 즐겼다. 오른쪽 중간 사진의 이배는 이종헌 작가가 소장한 것으로 한나라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 유물을 발굴할 때 칠기 유물에 대한 예산이 제대로 편성되지 않아 칠기가 발굴되면 보존과 보수는 물론 그것을 관리조차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유물발굴 관계자로부터 직접 들은 적도 있다고 한다.
 동양문화권에는 경주 포석정과 비슷한 연못을 만들어 칠기로 만든 "이배귀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耳杯)"에 술을 따라 풍류를 즐겼다. 오른쪽 중간 사진의 이배는 이종헌 작가가 소장한 것으로 한나라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 유물을 발굴할 때 칠기 유물에 대한 예산이 제대로 편성되지 않아 칠기가 발굴되면 보존과 보수는 물론 그것을 관리조차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유물발굴 관계자로부터 직접 들은 적도 있다고 한다.
ⓒ 김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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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때에도 일본에서는 무기류에 녹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옻칠을 했다고 한다. 전자파 차폐 성질까지 갖춘 옻은 스텔스기와 무인자동차, EMP(전자기기 훼손전파) 차폐막 등 산업과 군사용 코팅재로도 가능하다고 한다. 옻이 일구어낸 문화는 아주 먼 오랜 옛날부터 오늘까지 그 모습을 바꾸며 우리 곁에 살아있었다. 옛날 1천 5백년전의 무덤에 그려진 옻칠 벽화의 귀중함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종헌 작가는 옻칠예술을 통해 동아시아의 문화를 이해하는 창문 하나를 만들고 있다.

태그:#이종헌, #강서대묘, #옻칠벽화, #집안 오회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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