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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여성은 특수한 방식으로 재현된다. 10대 미소녀 컨셉의 사진을 찍다가 모델을 성추행한 후 구속된 사진작가 로타의 작품에서도, 흔하고흔한 아동복 사진들을 보아도, '소녀'다운 순수함을 연기하지만 동시에 섹시함을 연기해야하는 걸그룹들의 모습을 보아도 그렇다.

어린 여성을 수식하는 말 앞에는 그들이 의도하지 않거나 원하지 않았던 이미지들이 따라 붙을 때가 많다. 어린 여성은 순수하고, 섹시하며, 순종적이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성적 매력을 내뿜는 사람으로 묘사되거나 해석된다. 말하는 대상이 아니라 오로지 해석되고 재현되는 대상이 되어버린 존재들의 의사와 결정권은 많은 경우 무시되었다.
 
배스킨라빈스 광고화면 캡처
 배스킨라빈스 광고화면 캡처
ⓒ 배스킨라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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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여성'의 재현과 관련해, 이번엔 아이스크림 판매 업체인 '배스킨라빈스'의 광고가 논란에 휩싸였다. 6월 28일 배스킨라빈스는 진한 화장을 한 여성 어린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광고 영상을 공개했다. 해당 영상에는 아이스크림 숟가락을 무는 어린이의 입술을 클로즈업하는 모습과 아이스크림을 입술 근처에 묻히는 등의 연출도 함께 담겨있었다.

곧바로 이 영상 광고는 어린이에 대한 성 상품화의 문제가 거론되었고 배스킨라빈스는 하루 만에 광고 영상을 내렸다. 배스킨라빈스는 이후 입장문을 통해 "부모님 참관 하에 일반적인 어린이모델 수준의 메이크업을 했으며 평소 모델로 활동했던 아동복 브랜드 의상을 착용한 상태로 이뤄졌다"라고 밝혔다.

배스킨라빈스가 광고를 내리고 입장문을 쓴 이후 온라인상으로 광고의 내용에 대한 여러 입장들이 제시되었다. 일각에서는 배스킨라빈스가 어린이에 대한 성 상품화를 하지 않았으며, 성적 대상화를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문제제기 자체가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광고 촬영 당시 광고 모델인 어린이와 그의 부모에게 동의를 받았기 때문에 외부인의 문제제기는 틀렸다는 것이다.

또한 배스킨라빈스 광고에 출연한 어린이가 진한 화장을 한 것이 문제라면 비슷한 수준으로 화장을 한 어린이 모델을 쓰는 아동복 업체들도 모두 잘못된 것이며, 의상 역시 선정적이라 보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왔다.

한편, 어린이 모델에 대한 선정적인 묘사, 진한 화장을 하게 만드는 한국 아동복 시장의 문제를 동시에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실제 해외의 경우 광고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이 선정적인 포즈와 옷을 입는 것에 대한 규제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보호해야할 어린이에게 성적인 묘사를 시키는 것은 문제이며, 어린이 모델에 대한 성상품화에 대한 더 많은 규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많은 지지를 얻었다. 실제로 해당 광고가 올라간 이후 일부 커뮤니티에서 나온 광고 모델에 대한 성희롱적 발언들이 문제시되고 있다는 상황을 생각해볼 때, 이 광고가 단순히 어린이의 '순수함'을 강조하기 위한 광고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우리 사회가 비슷한 방법으로 성적인 묘사들을 유통시키고 있다는 측면을 고려할 때, 배스킨라빈스 광고는 어린이에 대한 성 상품화라는 비판을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다.
  
배스킨라빈스가 인스타그램을 통해 밝힌 사과문. 현재 사과문은 삭제되었다.
 배스킨라빈스가 인스타그램을 통해 밝힌 사과문. 현재 사과문은 삭제되었다.
ⓒ 배스킨라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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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이 가라앉지 않자, 해당 광고 모델 '엘라 그로스'의 어머니가 "엘라가 많은 사랑을 받고 있기도 하지만, 일부 사람들의 상처되는 말과 부정적인 반응 때문에 혼란을 겪고 있다"라는 내용이 포함된 입장문을 올렸다. "아이스크림 맛을 재미있게 표현하고자 했던 광고가 의도와 다르게 해석"되는 과정에서 받은 어린이 모델과 가족이 겪은 상처를 설명한 입장문이었다. 

그러나 이 광고에서 어린이 모델이 표현하고자 한 '의도'가 무엇인지는 찾을 수 없다.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어린이 모델이 아닌 '성인'들이 구성해 놓은 욕망일 뿐이었다. 어린 여성에 대한 재현들은 항상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순수하면서 섹시하기를 바라고, 다른 '성인' 여성들처럼 성적인 기표를 드러내는 모습들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욕망들이 전시되었다.

애초에 문제가 발생한 원인은 무엇일까? 바로 어린이와 청소년이 권력관계 속에서 오로지 욕망이 투영되는 존재로만 사회에 놓여있다는 점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어린이와 청소년의 욕망은 성인의 입에서 말해지고 해석될 수 있을 뿐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오로지 대변되어야만 하는 존재인 순간, 어린이와 청소년의 성적인 실천은 통제된다. 결국 성적인 부분에 대해 자신의 의사를 밝힐 수 없게 된 어린이와 청소년은 더욱 쉽게 타인의 욕망의 대상이 된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순수하고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통제로서 모든 문제를 타개할 수 있다는 주장은 문제의 미봉책으로만 기능할 뿐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성인'의 성적인 욕망의 투영으로만 존재하는 사회를 넘어, 이들이 주체적으로 성적인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야 어린이와 청소년이 안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모든 어린이와 청소년의 욕망이 타인의 입으로 구성되는 사회가 아니라 이들이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위하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정보를 어떤 방식으로 제공받는지, 보호라는 명목의 통제로 인해 이들의 권리가 얼마나 침해받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나아가 성적인 가치관을 '피해'의 서사 바깥으로도 정립할 수 있는 페미니즘 교육, 그리고 어린이와 청소년의 욕망도 긍정할 수 있는 사회 변화가 필수적이다. 순수함과 섹시함을 넘어, 어린 여자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나와야 할 이유다.

태그:#어린이, #청소년, #성적 자기결정권, #배스킨라빈스,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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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여성 정치에 관한 책 <판을 까는 여자들>과 <집이 아니라 방에 삽니다>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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