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존감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네."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의 다니엘이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것은 자존감이었다. 그의 힘겨운 삶을 지켜낸 것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이었고, 자존감이었다. 그런데, <기생충>(2019)을 보는 내내 내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우리 사회의 '인간에 대한 태도' 때문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불편했고, 회복할 수 없는 현실이 암울했다. 박 사장은 자꾸 '선을 넘지 말라'는데, 그것은 사회적인 계층의 구분인가? 계속 불편하다.
 
 <기생충> 스틸컷

<기생충> 스틸컷 ⓒ CJ 엔터테인먼트

 
"아들아,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희망이 사라진 삶은 미래를 거두어간다. <마시멜로 이야기>(2005, 버클리북스)에서 유예가 가능했던 현실의 행복은,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2018, 웅진지식하우스)로 와서는 '바로 지금'으로 당겨졌다. 우리의 젊은이들은 더 이상 불확실한 미래에 현실의 행복을 미루지 않겠다 결심했다.

"아들아, 넌 다 계획이 있구나."

기택이 거쳐왔을 삶을 상상해보자. 아마 60년대의 산업화와 함께 태어나, 민주화의 시간을 관통하며 사회에 나왔을 것이다.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1990년대의 대한민국에서 직장인이 되었고, 부지런하고 건강한 충숙을 만나 가정을 이뤘을 것이다. 하지만, 급작스럽게 찾아온 IMF는 그를 실업자로 만들었고(1997년), 갓 태어난 아이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했을지도 모른다. 기택네 가족의 남다른 생활력과 결속력도, 이때 형성된 것일 수도 있다.

기택은 직장을 나오며 받은 퇴직금을 털어 넣어 치킨집을 열었을지도 모른다. 충숙은 최선을 다해 일을 했을 거고, 기택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한눈을 팔지 않았을 것이다. 머리가 빠른 아이들은 공부를 곧잘 했을 테고, 기우는 공대로 기정이는 디자인 학과로 꿈을 키웠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 이 나라에서 가장 일자리가 많이 만들어졌던 산업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모두가 힘들었던 시기를 거치면서 그들의 사업은 점점 기울어간다. 한집 건너 한집이 치킨을 팔았던 시기였다.

첫 번째 사업에서 실패하고 나니 그들의 삶은 더욱 더 팍팍해졌다. 하지만, 아이들을 두고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기택과 충숙은 간신히 장만했던 아파트를 정리하여 오래된 빌라로 옮겼고, 자금을 마련하여 고깃집을 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으로부터 비롯된 금융위기(2008년)는 우리 가계에도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고, 그들은 다시 실패했을 것이다.

집을 팔아 전세로 옮겨야 할 만큼 힘들어졌지만, 아이들의 교육은 포기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만 하면, 부모 세대의 실패를 넘겨주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전세는 월세가 되었고, 대왕 카스텔라가 실패(2017년) 하자 그들은 햇빛도 들지 않는 반지하로 옮겨야 했다. 부모를 사랑하는 아이들은 군대에 일찍 가거나 다니던 학원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가족을 지키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들은 20년의 세월을 겪으며 여기까지 내려왔다. 그들은 원래부터 '반지하'에 있지 않았다.  
 <기생충> 스틸컷

<기생충> 스틸컷 ⓒ CJ 엔터테인먼트

 
"아들아, 무계획이 가장 좋은 계획이다."

이제 기택은 더 이상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 20년 내내 이어진 실패는 그를 지금의 모습으로 바꿔 놓았을 것이다. 홍수로 물이 가득 찬 집에서 충숙의 전국체전 메달을 챙겨 나오는 그를 보고 있자면, 그의 충숙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아는 대한민국은, 가족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가장이 쉽게 무기력해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이렇게 돌아보고 났더니, 나는 기택의 '실패한' 인생이 온전히 그의 책임으로 보이지 않는다. 당신은 아무런 책임도 느끼지 않는가? 나는 마음껏 웃을 수 없었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은교>(2012)에서 어느덧 세월이 흘러 늙어버린 이적요의 한탄이다. 이것이 오직 시간에만 국한되는 것일까? 박 사장의 성공은 오롯이 박 사장만의 것이 아니고, 기택의 실패도 기택 가족만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껏 국가는, 사회 안전망을 확충하라는 국민을 자본에 기생하는 '게으른 실패자'로 비하하곤 했다. 우리는 시민으로서의 자존감에 상처를 입어야 했고, 합당한 이유도 없이 세상으로부터 비난받아야 했다. 부당하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묵묵히 책임을 다하며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굽실대지 않고 이웃이 어려우면 기꺼이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나의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원합니다. 나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다시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소환한다. 다니엘이 죽어가며 남겼던 인간 존중에 대한 요구는, <기생충>의 기택에게도 그대로 연결된다. 우리 사회는 기택의 삶에, 그의 상처 입은 자존감에 대해 책임이 있다.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오늘날의 영화읽기 기생충 황금종려상 자존감 기택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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