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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 다짐에도 애상에 젖는 그 밤중
황톳물 소용돌이에 휩쓸려
할미와 네가 자꾸 떠내려가는 꿈
깨어나 시계보고 또 잠들어 꾸는 흉몽
흰옷 입은 내 몸에 무수히 달라붙는 검은 나비 떼에 놀라
몸서리치는 순간 일제히 하늘로 오르는 검은 리본

-허정분 '불길한 꿈'
 
86개월(7년 여)이란 짧은 생을 살다가 간 손녀를 보살피던 할머니 시인은 늘 이처럼 불길한 꿈을 꾸었을지 모른다. 그 손녀를 하늘나라에 보내고 할머니는 슬픔에 젖었다.
 
 장애를 안고 태어나 86개월의 짧은 생을 살고간 손녀 유진이의 그림에 할미 허정분 시인이 노랫말을 붙인 시집 <아기별과 할미꽃> 표지
 장애를 안고 태어나 86개월의 짧은 생을 살고간 손녀 유진이의 그림에 할미 허정분 시인이 노랫말을 붙인 시집 <아기별과 할미꽃> 표지
ⓒ 학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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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눈망울이 유난히 컸던 손녀는 늘 할미에게 사랑의 표시를 해줘 기쁘게 했다.
▲ 유진 눈망울이 유난히 컸던 손녀는 늘 할미에게 사랑의 표시를 해줘 기쁘게 했다.
ⓒ 허정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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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여쁜 손녀가 하늘나라별이 되고 난 후 온 집안을 장악한 적막, 거실에 안방에 놀이방에 있어야 할 아이가 없는 공간에 피붙이들의 눈물과 회한이 자리 잡고 슬픔을 깔았다. 내애기, 내손녀, 어린 천사가 피우던 웃음꽃 울음꽃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송아지 눈망울로 말문이 트여 책 읽는 소리가, 고사리 손의 그림들이 손녀와 함께 사라진 집에서 참척의 애달픔이 할미의 넋두리로 흩어지곤한다."
 
슬픔과 회한과 그리움 덩어리를 허정분 시인은 <아기별과 할미꽃>으로 승화해 내었다. 유진이 할미 허정분 시인은 노래한다.
 
그 절집에 너를 버리고 와서
텅 빈 집안에서 정신없이 너를 찾는다
소파 위에 칠판 앞에 식탁에도 네가 있다
밥 먹고 그림 그리며 웃고 웃는 너는 있는데
불러도 찾아도 보이지 않는 네 모습

- 허정분 '텅빈 집'
 
유진 그림 속에는 언제나 가족의 이름이 들어있다.
▲ 유진 그림 속에는 언제나 가족의 이름이 들어있다.
ⓒ 허정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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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유달리 좋아하던 강아지를 손녀는 그림 속에 단골로 그렸다.
▲ 유진 유달리 좋아하던 강아지를 손녀는 그림 속에 단골로 그렸다.
ⓒ 허정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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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허망하고 모든 것이 절망이었을 할미, 타다 남은 장작의 마지막 불꽃 한 가닥 앞에서 신에게 살려달라고. 어린 손녀를 살려달라고 울부짖었을 할미의 절규가 노랫말 속에 절절이 녹아 스며들어 있다.
 
신이여. 어린놈 할미 눈에 넣어도 안 아프겠다고
오늘도 내일도 크지 말고 어여쁜 모습 그대로
오늘도 내일도 네게서만 세월이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할미가 한 말 소원대로 해주겠다고…
제 가슴에 대못을 박으셨나요

- 허정분 '너는 어디 가고'
 
맞벌이 부모를 대신해 보모를 자청한 할머니, 허정분 시인은 선천적 장애를 갖고 태어난 손녀 유진이를 끔찍하게 돌봤다. 마치 자신의 분신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말이다. 그림을 잘 그리던 아이, 글을 곧잘 짓던 아이, 동요한 곡 제 입으로 부르지 못했지만 할미 노래를 유난히 좋아하던 아이, 통증으로 온 몸이 타들어가도 언제는 해맑은 미소를 짓던 속 깊던 아이였기에 그는 유독 손녀와의 이별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손녀가 간 지 어느 덧 1년. 넋을 놓고 있던 할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손녀와 86개월간 울고 웃던 순간들의 기록을 가슴 속에서 건져 올렸다. 손녀가 기뻐할 일을 해야한다. 언제까지나 울고 있는 할미를 손녀가 본다면 가슴 아플거라는 생각에 흠칫했다. 그래서 손녀의 그림에 할미의 노래를 실어 책으로 꾸미기로 했다.

선천적 장애아로만 여기고 연민과 안쓰러움을 담아 바라보고 사랑해준 가족, 동기간, 어린이집 이웃들, 제 부모의 지인들에게 어린 천사가 남긴 그림에 할미의 맘을 보태 날개를 단 것이다. 그 할미는 그동안 보살펴준 어린 천사를 대신해 책 끝에 인사말을 썼다.
 
"어린 영혼의 명복을 빌어주고 함께 슬퍼해주신 모든 동기간, 선생님, 이웃들과 애비 어미의 벗들과 지인들께 손녀를 대신해 마음 속 깊이 감사 말씀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유진  비록 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기천사 유진이. 지구별 할미 가족으로부터 무한한 사랑을 받았던 손녀 유진이
▲ 유진  비록 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기천사 유진이. 지구별 할미 가족으로부터 무한한 사랑을 받았던 손녀 유진이
ⓒ 허정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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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붙이를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식구들은 안다. 그 비통과 슬픔의 크기가 얼마나 크고 무겁고 무서운지를 말이다. 더군다나 당신보다 먼저 생을 마감한 자식이나 손자녀의 죽음 앞에서 무슨 할말이 있으랴. 그 어둡고 긴 시간을 견뎌내고 손녀 유진이와의 아름다운 추억을 한 권의 시집으로 엮어낸 허정분 시인에게 어느 작가의 말 한마디를 들려주고 싶다.

"육신은 한낮 껍데기, 영혼이야말로 죽지 않는 유일한 우리의 위안이다."

허정분 시인은 강원도 홍천 출신으로 한국작가회의, 너른고을문학회, 한국편지가족 경인지회 회원이며 시집으로는 <벌열미 사람들>, <울음소리가 희망이다>, <우리집 마당은 누가 주인일까>와 수필집으로 <왜 불러> 등이 있다. 2019년 경기문화재단 창작기금을 받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우리문화신문>에도 실립니다.


아기별과 할미꽃

허정분 (지은이), 학이사(이상사)(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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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시인.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한국외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냄 저서 《사쿠라 훈민정음》, 《오염된국어사전》, 시집《사쿠라 불나방》,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 》전 8권, 《신 일본 속의 한국문화답사기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