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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중심인 종로는 수많은 예술인들이 600여 년 동안 문화의 역사를 일궈온 유서 깊은 도시입니다. '종로의 기록, 우리동네 예술가'는 종로에서 나고 자라며 예술을 펼쳐왔거나, 종로를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이 시대의 예술인들을 인터뷰합니다.[편집자말]
 홍성덕 (사)한국국악협회 이사장
 홍성덕 (사)한국국악협회 이사장
ⓒ 종로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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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덕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의 삶은 오직 '국악'이라는 한길로 통한다. 판소리 명창으로 시작해 여성국극의 부흥을 이끌고, 국악의 발전과 국악인의 처우 개선에 힘써온 시간들이 바로 그 증표다. 예인에서 예술 행정가의 삶을 넘나들면서 국악의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전하고, 4대 판소리 가족으로 국악의 명맥을 이어가는 그녀의 '국악 예찬론'에 귀 기울여 보았다.

신화를 쓰다

명고수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옥내극장인 협률사(協律社) 단장을 하기도 했던 부 홍두한과 국악인이었던 모 김옥진의 사이에서 태어난 홍 이사장은 내재된 국악 유전자와 주변 환경의 영향으로 일찌감치 판소리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다. 15세 때까지 모친에게 춘향가의 이별가 등 판소리와 긴육자백이, 자진육자백이 등 남도잡가를 배우며 혹독하게 기본기를 익힌 데 이어, 명창으로 손꼽히는 강도근 선생, 홍정택 선생, 오정숙 선생에게 판소리를 사사하며 부지런히 소리를 갈고 닦았다.

1980년에는 탁월한 실력을 인정받아 남원 춘향제 판소리 명창대회에 참가해 장원(대통령상)을 획득하는 영예도 안게 된다. 이후 여성국극을 접하고 매력에 푹 빠진 그녀는 1986년 서라벌국악예술단을 창단해 여성국극의 돌풍을 이끈 주역이 된다.

<성자 이차돈>을 국립극장 대극장에 올려 최초의 매진 사례를 기록하는가 하면, '88서울올림픽' 축하공연과 1995년 광복50주년 기념공연 <별 헤는 밤, 윤동주>, 2002년 한일월드컵 축하공연 <자유부인> 등 기념비적인 순간마다 여성국극이 무대에 오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또한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뉴욕 카네기홀 등 세계 유수의 공연장에서 공연을 선보이며 여성국극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다.
 
 여성국극의 돌풍을 이끌었던 홍성덕 이사장
 여성국극의 돌풍을 이끌었던 홍성덕 이사장
ⓒ (사)한국국악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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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극장에서는 종종 공연을 했어도 대극장에서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어요. 대관료도 비싸고, 공연을 올리기까지 과정도 쉽지 않으니까요. 직접 관계자를 찾아가 설득하고 또 설득해서 성사가 된 거예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 섰을 때는 감격해서 무대에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나요."

금강산 온정리 문화예술회관 개관 공연과 중국 북경 희극극장 공연에는 많은 북한 동포들이 찾아와 관람하는 감동적인 순간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때 정말 굉장했죠. 가끔씩 관객들이 공연을 보면서 좋아하던 모습이 떠오를 때가 있어요. 안 본 사람은 말해줘도 몰라요. 한 번 보기만 하면, 국극의 매력에 빠지지 않고는 못 배길 걸요. 무대 화려하지, 의상 화려하지! 게다가 여자들이 남성 역할 하는 게 얼마나 매력적이에요? 남자랑 정말 똑같다니까. 그러다보니 그 당시 진짜 남자인 줄 착각하고 따라다니거나, 국극 배우가 사는 집 옆에 살 곳을 얻어놓고 생활하는 팬들까지 있을 정도였어요."

해외에서 폭발적 반응

국내에서는 안타깝게도 여성국극의 인기가 예전만 못하지만, 해외에서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다.

"2016년 미국 몽고메리에서 <황진이> 공연을 했는데, 관객들의 대다수가 외국인들이었어요. 공연을 본 관계자들이 '한국에 이런 좋은 예술작품이 있는 줄 미처 몰랐다. 도대체 한국의 어딜 가면 이 공연을 볼 수 있냐?' 하고 묻는데 말문이 탁 막히더라고요. 그 질문에 대답을 못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현지인들이 여성국극 전용극장을 만들어서 상설공연으로 하고 싶다고 의논을 하는데 먼 타향에서 저희가 계속 상주할 수가 없잖습니까? 우리나라에서 국극에 그렇게 관심 있는 사람들이 나와야 하는데 오히려 해외에서 먼저 그 진가를 알아주니까 그것만큼 서글픈 게 또 없습디다."

 
 베트남 여성신문에 소개된 여성국극의 인기
 베트남 여성신문에 소개된 여성국극의 인기
ⓒ (사)한국국악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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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한인회 초청공연으로 베트남의 호치민시 예술회관에서 <황진이>를 선보인 이후에도 신문에서 대서특필할 정도로 현지 반응이 굉장했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쉽게 공감 가능한 스토리, 독특하고 아름다운 의상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다.

열정적인 호응에 감동한 홍 이사장은 국악의 세계화를 위해 앞장서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해외 공연뿐만 아니라, 중국 허난 사범대학과 교류해 중국 관광객 유치를 위한 콘텐츠를 개발하고, 문경시에 국악예술인마을을 조성해 관광객 유치에 힘써온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경극', 일본에서는 '가부키'를 정책적으로 지원하고, 해외 관광객이 반드시 봐야 할 관광코스로 소개가 돼요. 대중들도 얼마나 자국의 전통예술을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는지 몰라요. 우리한테는 국악이 그만큼 귀한 보석이잖아요. 우리 몸속에 흐르는 피니까. 제가 종로에 국악회관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예요. 국극이야말로 해외 관광객들에게 가장 자신 있게 소개할 수 있는 국가 대표 문화 브랜드잖아요."

예술 행정가로서 국악 발전에 힘쓰다

홍 이사장은 전라북도 도립국악원 단장부터 대한민국 여성전통예술경연대회 집행위원장과 ㈔한국여성국극예술협회 이사장을 거쳐 2006년부터 ㈔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 이사장을 두 번 역임했다. 그러다 2011년에 어머니를 돕기 위해 전주에 내려와 '제37회 전주대사습놀이' 전야제 준비를 돕고 숙소로 향하던 아들, 김태현 ㈔한국여성국극예술협회 기획실장을 사고로 잃는 불운을 겪었다. 국악의 침체기 속에서 쉬지도 못하고 국악의 활성화를 위해 동분서주 뛰었던 어머니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던 아들이었던 만큼, 슬픔은 더욱 컸다.

"언젠가 아들이 눈물바람으로 찾아와서 저한테 꼭 할 말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무슨 말인지 해 보라고 했더니 엄마가 국악을 사랑하는 마음을 누군가는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안 그러면 혼자서 어떻게 이 힘든 일들을 다 해나가겠느냐 하더라고요.

저는 정말 몸과 마음을 국악에 다 바쳤잖아요. 지금도 가끔 그때 생각이 나요. 제가 하는 일들이 가르쳐서 되는 일은 아니잖아요. 직접 발품 팔면서 찾아다니고, 관계자들을 만나 설득하면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렇게 고생한 건 진짜배기잖아요. 누가 알아주길 바란 적도 없고, 제 마음에서 우러나서 해온 일이다보니 어떠한 일을 추진해서 성공적으로 끝나도 그 허전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좋으면서도 공허감도 동시에 밀려오거든요."

 
 국악사랑을 실천해온 (사)한국국악협회 홍성덕 이사장
 국악사랑을 실천해온 (사)한국국악협회 홍성덕 이사장
ⓒ 종로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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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제25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홍 이사장은 하늘나라로 간 아들이 생전에 '꼭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이 돼서 큰 역할을 해 달라'고 했던 약속을 지켰다. 또 손자 김성재군에게 대금을 가르치면서 아들의 오랜 숙원을 풀어주었다.

취임 직후부터 과감한 행보를 펼친 그녀는 우선 서울시와 손잡고 '국악인턴제도'를 도입하면서 국악과 졸업생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

"굉장한 보람이 되죠. 그렇지만 아직도 국악인들이 설 자리가 많지 않아요. 국악과가 폐지되는 학교도 늘고 있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국악을 그만두는 학생들도 있어서 그 명맥이 끊길까봐 걱정입니다. 졸업하고 나서 실기를 계속 연습하기 어려운 여건에 있는 학생들도 많아서 교육 프로그램도 제공하고 있고요. 서울시 국악예술강사제를 만들어서 후배들의 활동영역을 넓혀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 국악을 더 널리 홍보하고, 국악인들의 활발한 교류를 도모하기 위해 본래 목동 예총회관에 있던 협회 사무실을 종로로 옮기는 결단을 내렸다.

"옛날에 국악인들은 다 4대문 안에서 지냈어요. 그래서 이 국악로에는 대명창 선생님의 영혼들이 숨 쉬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조선시대 역사를 보면 임금님이 일 년에 한 번씩 백성들을 궁 안에 초대해서 국악을 보여주면서 함께 즐겼다고 하잖아요. 소리하는 선생은 정승 자리를 줘서 꼭 임금 옆자리에 앉혔다고도 하지요.

창작도 좋지만, 우리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듯이 그 뿌리는 잊으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민원신고 때문에 그렇게 어렵게 만든 토요국악야외상설 공연도 결국에는 없어져 버렸어요.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몰라요. 공연 활성화를 위해 필요한 예산도 부족하다 보니 여러모로 참 힘들더라고요. 그렇지만 저는 처음부터 이 길로 시작했고, 지금까지 쭉 해 왔으니 눈 감을 때까지 이대로 갈 겁니다."


(*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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