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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일 오후 대전 동구 낭월동 산내 골령골 임시추모공원에서 열린 "제69주기 제20차 대전 산내 학살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 사진은 고 앨런 위닝턴(Alan Winnington, 1910-1983)의 부인 에스타 위닝턴(87) 여사가 추도사를 하고 있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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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국전쟁에서 본 고통과 비참함으로 인해 평생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야만 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한국군경에 의해 민간인 7000여 명이 학살됐다고 보도했던 고 앨런 위닝턴(Alan Winnington, 1910-1983) 기자의 부인 에스타 위닝턴(87)씨는 남편을 이렇게 회상했다. 27일 오후 대전 동구 낭월동 산내골령골 임시추모공원에서 열린 '제69주기 20차 대전 산내 학살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에서였다. 

앨런 위닝턴은 영국 일간지 <Daily Worker>의 중국 특파원으로 있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으로 급파되었다. 그는 1950년 7월 대전 산내골령골 학살현장을 방문한 뒤, 목격자와 주민들을 인터뷰해 8월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라는 제목의 기사를 송고했다.

이 기사에서 앨런 위닝턴은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좌익 정치범 및 보도연맹원 등 7000여 명이 한국 군경에 의해 집단 학살된 후 암매장됐다"고 보도했다. 특히 앨런 위닝턴은 "총질, 구타, 그리고 목을 자르는 일들은 남한 경찰이 했지만 이것은 미국의 범죄"라며 "(학살이) 미군장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졌고 (학살과정에 동원된) 운전자 몇 명은 미국인"이라고 기록해 산내학살사건에 미군이 직접적으로 개입했음을 알리기도 했다.

이러한 앨런 위닝턴의 보도는 산내학살사건의 진상은 물론, 한국전쟁 당시 일어난 민간인 학살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핵심 자료가 되어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앨런 위닝턴의 부인 에스타씨 직접 산내학살 위령제에 참석, 앨런 위닝턴이 보았던 한국전쟁 당시 산내학살사건에 대해 증언한 것.

이날 에스타씨는 1949년 중국 베이징에서 통역으로서 앨런을 만났고, 한국 전쟁이 끝난 1953년 중국에서 결혼했다고 앨런과의 인연을 소개한 뒤, "한국에서 앨런은 무고한 시민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격과 사람들을 향해 수많은 폭탄들이 사용되는, 실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를 목격했다"고 말했다.

"눈꺼풀 사라진 아이 안고 운 여인, 평생 잊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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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일 오후 대전 동구 낭월동 산내 골령골 임시추모공원에서 열린 "제69주기 제20차 대전 산내 학살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 사진은 1부 행사로 진행된 "헌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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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일 오후 대전 동구 낭월동 산내 골령골 임시추모공원에서 열린 "제69주기 제20차 대전 산내 학살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 사진은 산내학살사건 유족인 전숙자(왼쪽) 씨와 신순란 씨가 자작시인 추도시를 낭송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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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앨런은 얼굴에 화상을 입고 눈꺼풀이 사라진 5살짜리 아들을 안고 울부짖던 한 여인의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며 "이 장면이 바로 앨런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그는 한국전쟁에서 본 고통과 비참함으로 인해 평생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야만 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그러나 앨런이 기억하는 가장 소름 끼치는 장면은 한국정부에 의해 학살된 수천 명의 지식인들이 대전 근처의 낭월 지역에 흙으로 대충 덮여있었던 광경을 목격했을 때였다"며 "그리고 앨런은 이 광경이 나치가 포로수용소 사람들을 학살했던 사건에 비유하는 기고문을 썼다. 하지만 앨런의 이 기고문은 전쟁 당사자들(미국정부와 영국 정부)에 의해 묵살되었다. 결국 그는 영국 정부로부터 반역자로 낙인찍히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후 여권은 압수조치 되었고, 만약 영국으로 돌아왔다면 앨런은 반역죄로 기소되었을 수도 있었다. 이후 단 한 명의 영국인이나 미국인 기자도 이 낭월지역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학살을 취재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하지 않았다"며 "앨런은 진실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20년 넘게 자신의 나라에서 추방당했다"고 밝혔다.

그는 끝으로 "앨런은 1983년 사망했다. 비록 이런 반인륜적 범죄행위를 세상에 공개한 그의 노력과 희생이 너무 늦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지만, 전쟁을 일으킨 자들로부터 희생당한 수많은 분들의 후손들에 의해 인정받게 되어서 그의 희생이 헛되지만은 않은 것 같다"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러한 에스타씨의 인사에 이날 위령제에 참석한 많은 산내학살희생자 유족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멀고 먼 영국에서 한국의 한 골짜기까지 날아와 '반인륜적인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기록해 두고, 증언해 준 위닝턴 부부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박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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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일 오후 대전 동구 낭월동 산내 골령골 임시추모공원에서 열린 "제69주기 제20차 대전 산내 학살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 사진은 고 앨런 위닝턴(Alan Winnington, 1910-1983)의 부인 에스타 위닝턴(87) 여사가 추도사를 한 뒤 앨런이 썼던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여주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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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산내학살사건 희생자 위령제에는 박영순 대전시정무부시장과 황인호 대전동구청장, 김창관 대전서구의회의장, 이나영 동구의희의장, 이대식 대전민중의힘 상임대표, 송승문 제주4.3희생자유족회장 등 대전지역 각 기관장 및 시민사회인사, 산내학살 유족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유족대표 인사에 나선 문양자 (사)대전산내사건 희생자 유족회 회장은 "지난주 산내 민간인 학살 사건의 현장 지휘 책임자였던 심용현 전 성신학원 이사장의 과거 행적과 관련해 성신학원 이사장이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공식 사과했다"며 "비록 자신의 잘못은 아니지만 전직 이사장의 과거의 만행에 대해 용기 있는 사과와 결단을 내린 성신학원 황상익 이사장께 감사의 뜻을 전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느리지만 조금씩 정의가 실현되고 진실규명에 다가서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그리 많지가 않다"며 "내년은 산내학살 사건 70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 유족들은 지금도 골령골의 어둡고 차가운 땅 속에 부모의 유골을 묻어두고 있다. 유골 한 조각이라도 가슴에 모셔놓고 죽는 게 우리 유족의 바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도 국회에서 잠들어 있는 '과거사법' 개정을 통해 유해발굴과 진상규명에 나서야 한다"면서 "그 길에 함께 힘을 모아 달라"고 호소했다.

"우리에겐 시간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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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일 오후 대전 동구 낭월동 산내 골령골 임시추모공원에서 열린 "제69주기 제20차 대전 산내 학살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 사진은 위령제 마지막 순서인 헌화와 분향을 하면서 오열하는 유족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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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대식 대전민중의힘 상임대표는 추도사를 통해 "밝히고 규명하여 대명천지에 누가 학살자들인지, 누가 학살되었던 우리의 부모형제인지를 역사 앞에 드러내어야 이 지긋지긋한 반복의 역사를 멈출 수 있다"며 "시간이 많지 않다. 젊은 아버지의 죽음을 보았던 아들과 딸이 그 아버지보다 더 백발이 되어가고 있다.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 피눈물의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사회 대개혁의 전진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날 합동위령제는 원불교 대전충남교구의 산내학살사건 희생영가 특별천도제와 천주교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의 산내학살사건 희생 위령 기도 등 종교행사로부터 시작됐다. 이후 2부 추모식에서는 희생자들에 대한 묵념, 유족대표 인사, 경과보고, 내외빈 소개, 추모공연, 추도사, 추도시 낭송 등이 이어졌고, 마지막 순서로는 헌화와 분향이 진행됐다.

합동위령제가 끝난 이후에는 대전기독교교회협의회 소속 목회자들이 산내학살지를 알리는 표지석 제막식을 가진 뒤, 주변에 꽃을 심는 행사를 진행했고, 행사장 주변에서는 대전작가회의 작가들의 '국가공권력에 의한 민간인학살 추모 전국문인시화전'이 열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