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의 한 장면

<바람이 분다>의 한 장면 ⓒ JTBC

  
"나만 잘 살았어. 어떻게, 그렇게..."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수진(김하늘)은 오열했다. 매몰차게 떠났던 도훈(감우성)이 '권태기' 때문이 아니라 '알츠하이머' 때문에 이별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도훈의 알츠하이머는 이미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수진은 자신마저 알아보지도 못한 채 "사랑합니다"라고 인사를 건네며 지나치는 도훈을 보면서 큰 충격에 빠졌다. 뒤늦은 깨달음은 깊은 회한을 불러 일으켰다. 수진은 죄책감에 빠져 신음하고 또 신음했다.

도훈을 원망하며 보냈던 지난 세월들을 떠올렸을까. 도훈의 진심을 모른 채 철없는 행동을 했던 자신의 과오를 회상했을까. 어설픈 코분장을 해가며 이혼 사유를 만들어 내려고 애썼던 일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수진은 고통 속에 식음을 전폐했다. 지인들과의 연락도 피하고 뜬눈으로 도훈과의 추억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결국 수진은 119 구급대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지기에 이르렀다. 참으로 애처롭다.

JTBC <바람이 분다>(연출 정정화·김보경, 극본 황주하)가 정해진 '수순'을 밟아나가고 있다. 예상됐던 전개로부터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 <바람이 분다>는 중반 이후에 등장할 '최루성 로맨스'를 위해 초반에 과도한 설정과 무리수를 뒀다. 결과적으로 시청자들은 '감동적이다', '가슴이 저린다'는 호평으로 돌아섰지만, 한편에서는 '감성팔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감우성과 김하늘의 열연 덕분에 가려지긴 했지만, 여전히 <바람이 분다>의 설정은 의문투성이다.

우선, <바람이 분다>가 그려나가고 있는 '감동'은 수진의 죄책감이 수반될 때 가능하다는 점에서 불편하다. 수진이 괴로워하면 괴로워할수록 그 진폭이 클 것이기에 수진은 더욱 속없는 캐릭터로 그려졌다. 도훈이 알츠하이머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수진은 "나만 잘 살았어"라며 고통스러워 한다. 수진이 후회하는 장면은 일견 감동스럽게 받아들여지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그가 괴로워할 만큼 잘못을 한 것인지 의아하다.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도훈의 선택
 
 <바람이 분다>의 한 장면

<바람이 분다>의 한 장면 ⓒ JTBC

 
과연 수진은 혼자만 잘 살았던 걸까? 결코 그렇지 않다. 수진의 5년도 충분히 힘들었다. 이혼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임신 사실을 알고 도훈을 찾아갔지만, 돌아온 건 "어디서 누구 씨를 받았는지 내가 알게 뭐야?"라는 모멸스러운 대답이었다. 결국 홀로 아이를 낳고 길렀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세월은 얼마나 버거웠을까. 마음 속으로 감내해야 했을 주변의 시선들은 또 얼마나 그를 짓눌렀을까. 

그동안 도훈은 그저 숨어서 몰래 지켜보기만 했다. 보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괴로웠다고 하지만, 현실의 어려움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던 수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렇듯 모든 책임은 수진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수진은 괴로워하고 있다. 아니, 괴로워해야만 한다. 이 얼마나 불공평한 일인가. 오히려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화를 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정작 화를 낼 수도 없는 형편이다. 도훈은 알츠하이머 환자니까 말이다.

"수진아, 내가 널 얼마나 힘들게 보냈는데... 왜 왔어?"

도훈의 '선택'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는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병을 숨기고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과정에서 수진의 가슴에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그 상처를 안고 수진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또, '묶었다'고 거짓말을 하고서 피임조차 하지 않고 (차유정으로 변장한) 수진과 관계를 맺었다. 아이를 갖고 싶다는 수진에게 선물을 안긴 것일까? 예상치 못했던 실수였을까? 참으로 이기적인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수진은 그 아이를 키웠다. 생각해 보면 그건 생각보다 끔찍한 일일 수 있다. 아무리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고 해도 관계를 맺던 당시 수진은 (변장을 해서) 유정인 상태였다. 수진의 입장에서 도훈은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난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 관계를 맺었다는 것 자체도 의아하지만, 그로 인해 생긴 아이에 대한 감정은 어땠을지 생각해 본다면 결코 간단치가 않다. 역시 수진은 도훈에게 화가 나야 정상이 아닐까?

모든 걸 숨긴 채 사라지는 게 진짜 사랑일까
 
 <바람이 분다>의 한 장면

<바람이 분다>의 한 장면 ⓒ JTBC

 
역시 가장 이해되지 않는 건, 도훈이 자신의 병을 숨겼다는 점이다. 잠시동안은 그리할 수는 있다. 알츠하이머는 가족이라 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병이 분명하다. 그러나 모든 걸 숨긴 채 사라지는 게 진짜 '사랑'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만약 수진이 불치병에 걸려서 그 때문에 떠나버리는 선택을 했다면, 도훈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의 성격상 가당치도 않은 일일 것이다. '사랑이란 말이야...'라며 일장연설을 했을 게 뻔하다.

친구들의 대응도 난감하긴 마찬가지다. 항서(이준혁)와 수아(윤지혜)는 굳이 자신들의 결혼식에 도훈을 불러낸다. 수진에게 도훈의 알츠하이머가 노출될 위험이 있는데도 말이다. 또 도훈과 수진을 양쪽에 세우고 함께 사진을 찍기까지 한다. 그 모습이 참 해맑아 당황스러웠다. 항서는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수진에게 모르는 척 연기를 해달라고 요구한다. 수진의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는 그의 태도가 당혹스럽다. 아무리 눈물을 끄집어 내기 위한 설정이라 해도 과하다는 인상이다.

본격적으로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한 <바람이 분다>는 시청률 5%대로 진입하며 상승세를 탔다. 감우성과 김하늘의 남다른 감성 연기 때문인지 시청자들의 몰입도도 높은 편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바람이 분다>가 이야기하는 '슬픔'이라는 게 쉬이 공감되지 않는다. 작정하고 시청자들을 울리는 것도 좋지만, 캐릭터와 이야기의 설득력이 떨어지는 건 아쉽기만 하다. 훨씬 더 좋은 드라마가 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에 하는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필자의 개인 블로그 '버락킴' 그리고 '너의길을가라'(https://wanderingpoet.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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