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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의 도전을 말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한편으로 궁금하다. 도전을 하라고 말하는 그들 역시 '도전하는 삶'을 살았는지 말이다. 그래서인지 '도전'이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그와의 만남은 뜻깊었다.

재작년이었다. 고등학교 선배를 만나러 용인 신갈동에 갔다. 선배가 맛있는 커피를 사준다 해서 따라 간 커피공방. 우리를 유독 반갑게 맞아주는 사장님이 있었다. 사장님은 정성스럽게 커피를 내려줬고, 자신을 '공방장'이라고 불러 달라고 말했다. 

알고보니, 세계 최대 종합 화장품 기업인 '로레알(L'Oréal)'을 한국 현지화에 성공시킨 김상주 전 회장이었다. 삼일회계법인 회계사로 시작해 스위스그랜드호텔(현 그랜드 힐튼 호텔) CFO(최고재무책임자), 로레알 코리아 CEO(최고 경영자)까지 했다. 그런 그가 왜 공방장이 된 걸까. 그의 꿈과 도전에 대해 듣고 싶어 다시 커피공방을 찾았다.

기회가 되느냐, 순간이 되느냐를 가르는 것
 
 김상주 공방장이 커피를 내리고 있다.
  김상주 공방장이 커피를 내리고 있다.
ⓒ 이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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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독하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은행 시험을 여러 번 봤지만 낙방을 면치 못했다. 방적공장에 들어가 경리로 일하게 된다. 월급 3만 원짜리 경리 직원일 뿐이라도, 나름대로 성취감이 있었다.

입사한 지 2년이 지났을 때였다. 평소 안면이 있던 여공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저녁을 먹고 나와, 사무실 앞을 허겁지겁 뛰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12시간 주간조 근무를 마친 후였다. 어딜 그렇게 가냐고 물으니, 여공은 야학에 간다고 했다.

일하고 공부하는 게 힘들텐데도 "그 시간만큼은 정말 행복하네요"라는 여공의 말을 듣고 내가 여기서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됐다고. 몇 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그는 결국 공장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그동안 모아둔 적금을 깨 대학 입시 학원에 등록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모멘텀(계기)을 만나게 됩니다. 이 계기가 기회가 되느냐,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 되느냐는 개인에게 달렸습니다. 저는 이때 필요한 건 반드시 결과를 만들어내겠다는 열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장학금을 타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생활비가 모자라서 입주 과외까지 했다. 공부를 하면서 고생을 한 탓인지 그 무렵 결핵에 걸렸다. 막상 병이 생기니 취업이 어려워졌다.

교수님과의 상담 끝에 대학원 진학을 택했다. 공부를 마치고 그는 회계사가 됐다. 첫 직장은 삼일회계법인이었다. 회계사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회계 일에 회의감이 들었다. 동료에게 상담을 하고 싶었지만, 다들 할 일에 지쳐 있었다. 불현듯 대학 시절 교수님의 한 마디가 떠올랐다. 당시 회계 법인의 대표이사님이었다.

"회계사라는 직업이 나에게는 족쇄와 같습니다. 만약 내게 이 족쇄가 없었다면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그에게 다시 '모멘텀(계기)'이 찾아왔다. 회계법인을 떠나 한 특급호텔의 CFO(최고재무책임자)를 지냈다. 그리고 로레알 코리아 회장에 있을 때였다. 12년 간 고속 성장해 온 로레알 코리아와 함께 국내 수입화장품 시장을 키운 김상주 현 공방장은 50대 초반의 나이에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 이른 은퇴 이유를 물었다.

"일찍 은퇴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대학원 시절 품었던 꿈이었습니다."

결국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로레알 코리아 회장 자리를 내놓았다. 그에게 로레알은 자식과도 같은 기업이었다. 프랑스 회사 로레알을 한국에 들여와 현지화 시킨 사람이 바로 그였다. 하지만 꿈을 위해 내려왔다. 은퇴 후 미국에서 방문교수를 지내고 한국에 돌아와 정말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 대학에서는 청년들을, 기업에서는 창업인들을 가르쳤다.

시간과 커피 볶는 능력을 기부하다

나중에 상황이 나아지면 어려운 학생들을 돕겠노라, 다짐하곤 했다. 로레알 코리아 회장 자리에 올랐을 때, 그때가 온 것이라 생각했다.

"기부에 대한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어요. 로레알 코리아 회장을 할 때 보육원과 연계하는 지원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어요. 어려운 환경에 놓인 학생들에게 공부할 기회도 만들어주고, 기회가 된다면 우리 회사 견학을 와서 언니 오빠들 일하는 걸 볼 수 있도록. 꿈을 키우는 다리를 만들어주고 싶었죠."

그런데 언젠가부터 프로그램은 의례적이고 형식적으로 진행됐다. 기부의 의미가 '돈만 주는 일'로 변질됐을 때, 그는 지원 프로그램을 중단했다고 말했다. 기부에 대한 생각은 다시 우연히 찾아왔다.

대학 교수로 재직 당시, 졸업을 앞둔 제자의 진로 상담 날이었다. 대화를 하다가 제자가 보육원 출신이고 아직도 그곳에서 생활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보육원은 고등학교 때까지만 지원을 한다고 알고 있었던 그는 제자의 말을 궁금해 직접 찾아갔다고.

알아보니 그 보육원은 학생들이 공부할 의지만 있다면 대학교까지 지원해주는 곳이었다. 보육원에서 꿈을 갖고 진로를 찾는 제자를 보면서 그는 다시 기부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게 된다.

하지만 기부의 방법이 문제였다. 단순히 돈을 기부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자신의 시간과 커피를 볶는 조그만 능력을 기부하는 방법을 택했다.

스페셜티 커피공방은 그렇게 시작했다. 그가 기부할 수 있는 시간은 아침이 유일했다. 매일 아침 출근하기 전 원두를 볶고, 볶은 원두를 부담없는 가격으로 판매했다. 그 판매 수익금은 제자를 통해 알게 된 보육원에 기부했다.

"내가 정성 들여 볶은 커피를 마시는 분들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기부를 하는 셈이 됩니다. 그저 그러한 마음을 가진 분들과 어려운 아이들을 연결해 주는 가교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10만 원이든 100만 원이든 금액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중요한 거죠."

여러 직책을 거쳐 지금 현재 커피를 볶기까지 김상주 공방장에게는 수많은 '모멘텀'이 있었다. 모멘텀은 선택의 순간, 도전, 인연, 스승 그리고 계기라는 단어로 대체될 수 있다. 그는 자신에게 있어서 모멘텀은 인생을 바꿀 '계기'였다.

"타이틀은 옷과 같아요, 본질은 변하지 않죠"
 
 멀리서 인터뷰 왔다는 말에 흐뭇한 미소를 짓는 김상주 사장님.
  멀리서 인터뷰 왔다는 말에 흐뭇한 미소를 짓는 김상주 사장님.
ⓒ 이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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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하는 고생, 아니 '노력'이라고 하죠. 노력은 정해져 있는 것 같아요. 얼마나 빨리 하느냐의 차이죠. 저는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을 젊은이들이 미리부터 하면 더 빨리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회사나 연봉에 연연치 말고 많은 경험을 해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 과정이 '행복을 찾는 과정'이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 

인터뷰 초반에 그에게 물었다. "커피 볶는 회장님 아니면, 사장님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그는 말했다.

"타이틀은 옷과 같아요. 안에 있는 본질(사람)은 변하지 않죠."

​그는 직함은 그저 입고 있는 옷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런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지위를 포기하면서 '도전하는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지금도 여전히 취업을 위해 달리는 청년들이 있다. 취업박람회나 학교 취업센터, 국비지원 등을 여러 방법을 찾아보지만 종종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에 힘이 빠지곤 한다. 스페셜티 커피공방에서의 인터뷰를 마치고 깨달았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은 결코 의미 없는 일이 아니라는 걸.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는 게시돼 있습니다.


태그:#커피와인생, #커피볶는회장님, #도전, #모멘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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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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