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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올 때였다. 이렇게까지야... 사회 구석구석 공기처럼 스며있던 성폭력의 실체가 속속들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하루하루가 위태로웠다. 드러난 사실이 고작 빙산의 일각임을 알기에, 더욱 초조했고 분노했다. 무어라도 해야 했다. 미투에 동참하는 집회나 시위의 대열에 몸을 실었다. "성폭력을 근절하라", 목이 터져라 외쳤다.

미투의 집회장과 시위장에서, 분노가 점점 커지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강퍅해졌다. 문득 이 할퀴어진 마음들이 애처로웠다. 도닥여 주고 싶었다. 용감히 #ME TOO를 증언한 그녀들을, 그리고 "너는 나다"로 #WITH YOU를 목이 터져라 외치는 그녀들을.

생생한 현장의 마음들을 그대로 담고 들어온 늦은 밤, 들어오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노랫말을 쓰고 곡을 붙였다. 느낀 마음 그대로를 노랫말로 쓰고 보니, 곡은 신기할 정도로 금방 붙여졌다. 이 노래라면, 분노로 버석버석해지는 마음들에 몇 방울의 수분이라도 공급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노래라면, 분노로 꽝꽝 얼어붙은 마음들을 조금이나마 따뜻하게 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상상을 해 보았다. 집회나 시위장에서 작은 소리로 시작된 이 노래를 이어 부르는 순간들을. 내 입으로 불러낸 노랫말이 하나 될 이유임을 확인하고, 왜 이 싸움에서 물러나지 말아야 하는지를 다짐하는 순간들을. '너희가 우리를 아무리 훼손시키려 해도 우리는 절대 무너지지 않아. 이렇게 노래 부르며, 더 공감하고 위로하면서, 더 단단해질 거야.'

이렇게 만들어진 노래가 세상에 나왔다. <퍼플민>의 <우리 가는 길>. <퍼플민>은 여성 노래패로 고양파주민우회에서 결성된 노래 동아리다. 물론 민우회 회원 여부와 상관없이 노래패에 가입할 수 있다. 지난해 #ME TOO 시위에 치열하게 참여하던 중, <퍼플민>은 시위장의 결기를 다지는 비장함과 동시에 시위가 축제 같을 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게 됐다. 여성 인권 집회장이나 시위장에서 처절한 구호만이 아니라, 서로 눈을 맞추며 입을 모아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다면... 우리에겐 언어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겐 '노래'가 필요하다.

여성의 인권을 찾으려는 자리가 왜 축제여서는 안 되는가? 우리의 투쟁은 왜 '낭만'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우리는 투쟁을 격노로만 채울 이유가 없다. 을밀대를 올랐던 최초의 고공농성자 강주룡이 "모단 껄"을 욕망하며 '낭만'을 구한 것처럼, <미스터 션샤인>의 고애신이 규수가 되기를 거부하고, '총'으로 자신의 싸움을 '낭만'으로 만든 것처럼, 우리 또한 가파른 삶을 관통할 '낭만' 하나쯤, 노래로 탑재해 봐도 괜찮지 않은가?

<우리 가는 길>은 이도영이 작사 작곡했고 이도영, 윤숙희, 윤일희가 함께 불렀다. 모두 프로페셔널한 음악인이 전혀 아니어서 애로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인생이 그렇듯이, 역경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하나가 되어 부르는 노래는 우리를 성폭력의 피해자를 넘어 생존자로 위치시켜 주었다. 이 노래를 부르며 공감하고 연대하는 순간들이 또 하나의 시작이 되기를 믿기에.

<퍼플민>의 퍼플은 여성성을 어필하기 위한 이름이 아니다. 성폭력으로 얻어맞은 상처는 없어지지 않는다. '멍'을 남긴다. '퍼플'은 '멍'의 색이다. '멍'을 가진 여성들의 고통을 잊지 않으며, 그들과 연대하고자 하는 멤버들의 의지를 담은 이름이다. 그래서 네이밍은 그들이 누구인가를 정의한다. <퍼플민>은 '멍든' 여성들의 또 하나의 우리다.

<퍼플민>의 공적인 역할과 함께 리더 이도영의 개인적 성취에도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고 싶다. 그녀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꾸었던 꿈을 지금 50이 훨씬 넘은 나이에 이루고 있다. 잊지 않으면 절대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가슴속에 고이 묻어두었던 소녀가 '멍든' 여성의 연대자로 다시 태어났다. <퍼플민>의 앨범 두 곡 중 다른 하나 <떠나는 그대에게>는 이도영의 싱글 곡이다.

고군분투 끝에 만들어진 <퍼플민>의 노래가 오늘 드디어 세상과 만났다. 모든 음원 사이트에서 <퍼플민>의 노래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퍼플민>을 음원 사이트에서 치면, <우리 가는 길>과 <떠나는 그대에게>를 만날 수 있다. 이제 <퍼플민>은 어렵게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온 '멍든 이'들과 함께 같은 '길'을 걸으려 한다. <퍼플민>의 노래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연대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ME TOO에 #WITH YOU로 화답한 <우리 가는 길>의 노랫말이다. 오늘도 성폭력이 사라진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며.

<우리 가는 길>

그대가 걸어온 길은 외롭고 힘겨웠지만
우리함께 걸어가는 이 길은 이제 외롭지 않아요
우리가 가는 이 길은 여전히 힘겨웁지만
우리가 만들어갈 세상은 따뜻한 봄의 나라죠
우리 모두 같이 이 길을 걸어요
손을 잡고 함께 이 길을 걸어요
우리가 가는 이 길은 아직도 힘겨웁지만
우리가 이루어갈 세상은 꽃 피는 봄의 나라죠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 게시 예정


태그:#퍼플민 , #우리 가는 길 , #떠나는 그대에게, ##ME TOO, ##WITH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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