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에는 스크루지라는 멋진 캐릭터가 나온다. 그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꿈에서 본 뒤 큰 깨달음을 얻은 인물이다. 비슷한 느낌의 연극이 있다. 공상집단 뚱딴지의 <거리의 사자>다. 공상집단 뚱딴지는 2009년 극단을 출범시키면서 공연했던 작품을 10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렸다.  
 
극중 주인공은 아홉 살 소녀 이조벨로 17년 전 놀이터에서 죽었지만 자신의 죽음을 모른 채 헤매는 유령이다. 이조벨은 자신을 집으로 데려다 줄 친절한 어른을 찾아 헤맨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죽음을 깨닫는다. 이후 한층 차분한 얼굴로 마을 사람들의 숨겨진 고통과 아픔들을 파악하기 시작한다. 
 
연극은 어린 이조벨의 시각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줄로만 알았던 마을 사람들의 이면을 파헤치는 구성으로 이뤄져 있다. 캐나다 작가 쥬디스 톰슨의 대표 작품으로 알려진 <거리의 사자>는 다문화사회인 캐나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차별과 단절, 극단적인 이기심의 충돌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이조벨은 너무 어렸다. 아이들이 보아야 할 세상이라면 순수하고 아름다워야 마땅했다. 그러나 죽은 이조벨은 유령이기에 세상의 내면을 볼 수 있었는데 실제 세상 사람들은 하나같이 분열되고 배제된 어두운 존재들이었다. 인물들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사회화된 사람들이지만 무대의 조명이 화려하게 바뀔 때마다 자신들의 원초적 욕망을 그대로 표출하곤 했다.
 
연극 무대는 객관화된 삶을 볼 수 있는 장소라고 본다. 이해하기 쉬운 연출이라면 그 속에서 우리는 삶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연극은 너무 무거워서도 또 가벼워서도 안 된다. <거리의 사자>는 약간 무거운 편이 속했다. '죽음'이라는 추상적인 부분을 시각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극 중 가장 중요하게 그려진 건 삶과 죽음의 거리였다. 죽음은 삶을 볼 수 있었지만 삶은 삶조차 보지 못했다. 아니 사는 게 무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개개인은 온전히 타인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 타인을 이루고 있는 삶을 알지 못했다. 이러한 불이해는 사회관계망까지 나아갔고 어지러운 끈을 만들어냈다. 
 
공연의 한 장면 소녀 이조벨을 죽인 건 누구인가.

▲ 공연의 한 장면 소녀 이조벨을 죽인 건 누구인가. ⓒ 공상집단 뚱딴지

  
고통 유발자와 고통 받는 이는 동일하다
 
극 중 인물들은 대화를 하는 듯했지만 한편으로 독백을 하는 듯했다. 소통의 대상이 바로 눈앞에 있었지만 소통을 하지 못했고 이해 받지도 못했다. 서로 자신의 의견만이 옳다며 큰 소리를 쳤다. 연극이 진행되는 내내 이러한 인물이 너무 많이 등장했다. 때문에 약간 어수선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는 하나 하나 다 연결되어 있었다. 하나의 작은 사건이 끝나는가 싶으면, 그 사건에서 고통을 받았던 캐릭터가 다시 다음 사건으로 옮겨가 새로운 고통 유발자로 그려지기를 반복했다.
 
첫 번째로 나온 인물은 슈 아줌마다. 서른여섯 살의 그 아줌마는 왕년에 나름 섹시했다. 그러나 아이들을 키우고 집안 일을 하느라 심신이 축 쳐졌고, 이 때문에 남편은 슈를 한심하다고 여기며 다른 여자와 연애를 한다. 이외 학부모들의 질타에 내몰린 여성 교사, 차별받는 이민자, 독거 장애인, 동성애자, 결혼을 앞둔 남녀, 범죄자 아들과 그를 입양하여 키운 양어머니, 암으로 죽어가는 여인 등이 연달아 나왔다. 작품은 이들의 사연을 통해 소외당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다문화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우리 시대 어디에서나 존재할 법한 그들은 겉으로는 평범하게 살고 있었지만, 무대 조명이 바뀔 때면 진짜 속마음을 드러냈다. 그때마다 이조벨은 경악했다.

인물들의 욕망은 내부에서 거친 물결을 일으켰다. 그러나 조명이 꺼지고 현실로 돌아올 때, 그 욕망들은 아무 티도 내지 않았다. 가면 뒤에 감춰진 듯 고요하기만 했다. 단 한 사람, 어린 이조벨만은 이를 모두 보고 있었다.
 
연극의 한 장면 욕망을 표현한 장면

▲ 연극의 한 장면 욕망을 표현한 장면 ⓒ 김재호

  
누군가의 죽음은 한 사람만의 짓이 아니다
 
이조벨은 극 내내 '사자'라는 단어를 내뱉는다. 17년 전 길을 걷던 자신을 공포로 몰아넣은 존재를 사자라고 여긴 것이 큰 이유였다. 아이의 시선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로서 사자가 대표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순간 이조벨은 자신이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지 죽었을 거라 상상조차 못했다.
 
원래 사자는 초원에 살거나 인간이 해를 입지 못할 공간에 있어야 한다. 그런 사자가 거리에 있을 경우 마을 사람들은 공포심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유령인 이조벨 말고 그 사자가 인간의 탈을 쓴 채로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마을 사람은 없었다. 죽은 자 아니고서는 알아보지 못하는 또 하나의 욕망이었다. 그런 사자는 아이들과 마을 사람을 크게 위협하는 존재였다. 사자의 탈을 쓴 이가 거리를 돌 때면 그 캐릭터는 냉정한 모습으로서 타인에게 고통을 주곤 했다.
 
이조벨은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사자가 오고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미 거세돼버린 유령이 내지르는 소리는 인간의 소리가 아니기에 마을 사람들은 듣지 못했다. 관객들은 이조벨과 같은 위치에서 무대를 계속 관망하며 안타까워했다. 관객은 이조벨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러던 중 이조벨이 퍼즐처럼 사건의 한 단면으로 들어갔다. 바로 스스로의 죽음을 접하고서다. 이때 관객들은 자신들이 동일시했던 소녀의 극중 참여를 보고 경악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안에서 비롯된 작은 나비효과가 이조벨과 같은 죄 없는 아이를 죽게 한 것은 아닌지 두려움이 엄습했다.
 
타인의 죽음은 삶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편견과 오해 속에 살고 있었는지를 말이다. 집을 찾는 여정의 끝에서 죽음을 알게 된 이조벨은 관객을 향해 이렇게 부르짖었다.
 
"당신의 삶을 사세요, 당신의 삶을 살아가세요."
 
이조벨의 외침은 타인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해본 자들에게 고하는 말이면서, 자기 죽음의 원인이 되는 근본을 향한 외침이었다. 그 존재가 어쩌면 다시 타인을 힘들게 하는 존재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그리고 자신과 같은 억울한 유령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무대 뒤쪽에 나란히 자리한 일곱 개의 문이 무덤처럼 보였다. 살아 있는 자들이 나오고 죽은 자가 들어갔다. 연쇄적인 시간과 공간, 인간관계 속에서 벌어진 누군가의 욕망들이 보였다. 정말이지 나의 삶을 사는 것은 너무도 어렵다. 타인을 배제 못하고 남의 시선 속에서 행동하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이리라. 그럴 경우 욕망은 사자가 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를 고통으로 내몰 가능성이 있다. 그것들은 연쇄반응을 일으켜 이조벨과 같은 피해자를 또 만들 것이다. 연극이 끝나고 밖으로 나온 뒤 나는 스크루지처럼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본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한편, <거리의 사자>는 17세 이상 관람가로, 공연시간은 100분이다. 오는 22일까지 마포아트센터 플레이맥에서 상영된다.
거리의사자 공상집단뚱딴지 쥬디스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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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문화, 과학 및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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