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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획은 미국 외교정책의 변천 속에서 동아시아, 한반도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종래 대부분의 연구는 한반도문제를 중심으로 미국의 외교정책을 논의했다. 이 기획은 반대로 미국외교정책의 특징을 고찰하는 가운데 한반도문제를 살펴본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미국의 외교정책사는 기존 유럽나라들과는 결이 다른 정치문법을 채택해온 역사이기 때문이다.

외교정책 상의 변형과 변주, 애매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흐르는 미국외교정책의 내적 핵심과 문법이 있다는 게 필자의 핵심 주장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미국과 동아시아, 미국과 한반도 관계의 역동적 변화상을 보다 잘 이해하고 들여다 볼 수 있다고 판단한다. - 기자말 

 
일본이 만주침략을 위해 건설한 남만주 철도회사의 대표 열차
▲ 일본 만철의 상징, 특급 "아시아호" 일본이 만주침략을 위해 건설한 남만주 철도회사의 대표 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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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한미수호조약으로부터 시작된 23년간의 한미관계는 을사조약과 함께 주한 미국공사관 철수라는 새드 엔딩으로 그 막을 내렸다. 그간 조선에 재임한 미국 공사로는 초대 푸트 공사를 시작으로 파커, 딘스모어, 허드, 씰, 알렌, 모건, 그리고 대리공사였던 포크 해군소위와 락힐까지 합치면 도합 9명이었다. 이 가운데 포크 소위가 대리공사로 재임한 게 18개월, 알렌이 9년간 봉직한 시기를 제외한다면 나머지 7명 공사의 재임기간은 평균 2년이 안될 정도로 짧았다.

한미수호조약을 체결한 지 2개월 만에 임오군란이 터졌다. 그리고 푸트 초대 공사가 내한한 지 1년 반도 되지 않아 청일전쟁의 도화선이 된 갑신정변이 발생했다. 민중들의 반봉건·반외세 혁명운동인 갑오농민전쟁이 조선왕조의 조종을 고했다. 조선의 종주권을 놓고 두 차례의 동아시아 전쟁이 발생했다. 왕비가 일본공사가 고용한 일본 낭인의 손에 무참히 살해됐다. 이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왕은 러시아 공사관에 몸을 맡겼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주도하는 민권운동의 거센 파고가 왕권을 위협했다.

궁중음모가 하루가 멀다하고 난무했다. 민씨 중전 일파를 중심으로 하는 과두지배세력은 친청, 친일, 친러, 종국에는 친일로 배를 갈아탔다. 미 국무부의 엄정중립 훈령을 어겼다고 해서 씰, 알렌 등 두 명의 공사가 문책성 인사를 당했다. 출렁이는 조선정국에 따라 한미관계 역시 롤러코스터를 탔다. 미국은 그제야 자신들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아니라 폭풍 한 가운데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과 관련하여 역대 주한공사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 락힐(William W. Rockhill)이다. 락힐은 1886년 12월에 대리공사로 조선에 파견돼서 다음 해 4월까지 약 5개월 정도만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한미관계에서는 그다지 존재감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락힐은 헤이의 문호개방정책이나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미영일 연합을 기반으로 하는 동아시아 세력균형정책을 입안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 미국 대외정책부서의 실세였다. 요즘으로 치면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나 CIA 동아시아 지국장의 역할이 이 한 사람에게 맡겨진 셈이다.

락힐은 매킨리 대통령과 루스벨트 대통령 재임기에 중국을 주무대로 활동했다. 특히, 루스벨트에게 절대적 신임을 받아서 1905년부터 1909년까지 중국대사를 역임했다. 20세기 초반의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을 설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락힐의 입장에서 문호개방과 세력균형의 적절한 배합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이익을 실현하는 상책이었다(Cullinane and Goodall, 2017:5-6).

보다 구체적으로, 태평양 지역과 중국 내에서 문호개방과 열강들 사이의 세력균형이 적절하게 유지될 수 있다면 한반도를 일본의 보호 아래 두는 것뿐만 아니라 만주에서 일본의 이익을 보장하는 것 역시 불가피하며, 이를 통해 극동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간주했다. 따라서 만주에서 일본의 이익을 훼손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하는 게 미국이 동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자국의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는 선결요건이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세력균형은 오랜 기간 유지하기 어려울 뿐 만 아니라 시시각각 변하는 정세로 말미암아 유리그릇처럼 깨지기도 쉽다. 미국 입장에서는 태프트·가쓰라 밀약과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서 동아시아, 한반도 지역에서 일본의 입지를 강화시켜줬다고 생각했겠지만 만주이권과 상당한 전쟁배상금을 기대했던 일본국민들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일본인들은 동맹국으로 간주해온 미국이 포츠머스 조약에서는 오히려 러시아 편을 들었다고 판단했다. 또한 이를 계기로 미국에 대한 불만을 차근차근 쌓아가고 있던 형국이었다.

이는 포츠머스 조약 반대투쟁의 격렬함에서 거듭 확인된다. 포츠머스 조약 내용이 신문 지상에 알려지자 일본 안에서는 조약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일본 측 대표인 고무라 외상을 "조기(弔旗)를 들고 맞아들이자"는 <만조보> 사설은 그런 분위기를 잘 대변했다. 9월 5일에 개최된 히비야 공원 대회를 통해 반대운동은 그 절정에 달했다(김용구, 2004:447).

극우집단인 흑룡회와 강화문제동지회가 주최한 히비야 공원 대회에서 일본인들은 루스벨트와 미국을 격렬히 규탄했다. 일본 근대사에서 대중적인 우익 민족주의 운동의 시작을 알린 포츠머스 조약 규탄대회가 끝나자 집회 참가자들이 내무장관 관저를 포함해 경찰서, 교회, 관영 신문사 등을 무차별 습격하는 등 군중폭동으로 사태가 발전했다. 그 결과, 11명의 사망자와 수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일본정부가 9월 6일, 계엄령을 선포하고서야 질서 유지가 가능해졌다(Esthus, 1967:95).

일본 입장에서는 삼국간섭에 이어 또다시 전쟁에선 이겼을지 모르지만 외교에서는 패배했다고 생각할만한 이유가 상당했다. 더구나, 을사보호조약 체결이후 한반도에서와는 달리 만주에서의 일본의 입지는 여전히 불안했다. 포츠머스 조약의 5조, 6조에 의하면 요동반도의 조차권과 장춘-여순 철도의 일본 이양은 청나라 정부의 승인을 얻어 실시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에 고무라 외상은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만주문제에 관한 북경조약'을 청나라와 체결하여 포츠머스 조약에서 규정한 대로 여순과 대련에서의 러시아의 이권을 양도받았다.

동아시아에서 열강 등 사이에 평화가 왔다고 판단한 미국은 만주에 대한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 특히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자국의 군사, 경제적 이익 확보를 위한 생명선으로 간주해온 만주철도, 곧 만철(滿鐵) 부설권 및 경영권에 대한 미국의 지분확보 시도가 일본의 심기를 건드렸다(Clyde, 1966:186).

일본 입장에서는 만철에 대한 개입만으로도 미국의 만주진출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고 판단할 근거가 충분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2년 전만 하더라도 사생결단으로 전쟁을 벌였던 일본과 러시아가 협력을 재개했다. 만주와 몽고에서의 경제적 이권을 놓고 열강들 간에 '총성 없는 만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러일 양국이 만주문제로 4차에 걸쳐 비밀협약을 체결한 것은 바로 미국의 만주진출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미 전조가 있었다. 포츠머스 회담 도중 미국의 철도왕 해리만이 일본에 직접 와서, 세계일주 철도계획의 일환으로 만철을 미일 합작사업으로 할 것을 교섭하여 가쓰라 총리와 예비각서까지 마련한 상태였다. 그러나 포츠머스 회담을 마치고 귀국한 고무라 외상의 강력한 반대로 해리만의 구상은 백지화됐다.

1909년, 태프트가 대통령에 취임하자 '탄환대신 달러를'이라는 슬로건을 앞세워 달러 외교를 추진하면서 미국은 만주지역에 경제 진출을 본격화했다. 태프트의 달러외교는 일본이나 러시아 입장에서 대단히 공격적이었다. 헤이 장관 이후의 기존 투자정책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미국 정부 차원에서 투자계획이 마련됐다는 특징을 지녔다. 녹스 국무장관의 만철 중립화 방안이 대표적이다.

원래 미국은 러시아가 매물로 내놓은 만철 일부 노선을 매수하든가 아니면 일본이 건설한 기존 만철 노선 옆에 새로운 지선을 건설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에 일본이 포츠머스 조약 위반으로 강력히 항의하자 1909년 12월 녹스 장관은 '평화와 문호개방을 위해 러일 양국 간 완충지역을 건설'한다는 명분 아래 아예 만철 중립화 방안을 발표했다. 향후 투자를 포함한 만철의 관리감독 및 소유, 경영을 관련국들이 조달한 기금을 통해 설립한 중립적 기관에 맡기며, 이 계획이 여의치 않을 경우 영국과 미국 정부는 이해당사국들을 만철의 자금조달과 건설계획에 참여시켜 금주(錦州)와 아이훈(璦琿)을 잇는 진아이(錦璦)철도를 비롯한 기타 철도노선을 부설한다는 게 핵심 내용이었다(Clyde, 1966:192).

미국의 만철 중립화 제안은 일본과 러시아의 완강한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이 제안이 만주 지역에서의 양국의 기득권을 심대히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러일 양국은 미국의 달러외교에 불안해했고 불만이 가득했다. 그래서 1910년 4월부터 교섭을 시작하여 2차 러일협약을 체결했다. 미국의 만주진출에 대해 러시아와 일본이 공동전선을 편 것으로 평가되는 2차 러일 협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만주에 있는 양국 철도를 개선하든지 연장하던 지간에 양국은 어떤 경쟁도 하지 않는다. 둘째, 두 나라 사이에 체결된 기존 조약 및 협약을 준수할 뿐만 아니라 만주의 현상유지를 위해 양국은 맡은 바 책임을 다한다(Tomimas, 1919:100~101). 만주에서의 양국의 영향권을 확정한 네 차례의 러일협약으로 극동지역에서 일본과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충돌할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졌다.

태프트의 달러외교는 중남미 지역에서 미국이 기존에 행하고 있던 대외정책을 만주에 적용한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정책의 핵심은 한마디로 미국 정부가 미국인 자본투자자의 경제적 이익을 보장해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미국은 무력사용도 불사했다. 중남미는 먼로독트린 이후 미국의 영향권 아래 놓였다. 일례로 스페인 식민지에서 독립한 쿠바는 미국 상원의 동의 없이는 헌법 개정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요컨대, 달러외교는 중남미 지역을 바나나공화국으로 상징되듯이 미국 독점자본의 놀이터로 바꿔놨다.

당시 만주의 정세는 중남미와는 매우 달랐다. 만주에는 미국 투자자들의 이권을 지켜주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미국 군대도 없었다. 설령 군대를 동원한다해도 러시아와 일본의 대규모 병력을 당해낸다는 보장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녹스 장관에게 일본을 우호적으로 대하고 가급적 일본의 이익을 침해하지 말 것을 권고했던 것이다.

태프트 대통령과 녹스 장관은 전임 대통령의 말에 귀 기울지 않은 채 만철 중립화 시도 등 대규모 투자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러자 일본과 러시아는 미국의 만주 침투에 대응하기 위한 공동전선을 형성했다. 태프트의 '달러외교'를 문호개방도 세력균형도 달성하지 못한 채, 일본을 불필요하게 자극해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입지를 약화시킨 정책실패의 상징으로 평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Esthus, 1959:444).

녹스의 만철중립화 방안 역시 러시아와 일본이 기존의 반목과 대결에서 벗어나서 협력정책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제공했고, 프랑스와 영국은 양국의 연대를 환영해 마지 않았다.

왜냐하면, 러시아는 삼국협상에 따라 영국, 프랑스의 유럽동맹의 일원이었고, 일본은 영국의 아시아 동맹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달러외교는 미국의 동아시에서 입지약화는 물론, 만주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을 강화하기는커녕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Griswold, 1962:157).    

하지만, 루스벨트의 동아시아 세력균형정책도 태프트의 달러외교도 서구 제국주의 중심의 국제질서를 옹호하는 한 더 이상 세상변화에 적합하지 않게 되었다고 보는 편이 보다 타당할 것으로 여겨진다. 한마디로, 제국주의 열강의 세력균형 정책은 폭발의 임계점을 향한 시한폭탄을 작동시켰고, 그에 따라 새로운 국제정치 문법의 등장이 절실하게 요청됐다. 이러한 상황을 충족시켜 줄 역사적 사건이 유럽에서 터져 나왔다. 서구열강 사이의 '전면전'이자 '총력전'인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 참고문헌

김용구. 2004. 『세계외교사』. 서울대학교출판부.
Clyde, P. H. 1966. International Rivalries in Manchuria, 1689-1922. New York: Octagon Books.
Cullinane, M. P. and Alex Goodall. 2017. Open Door Era.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Esthus. R. 1959. "The Changing Concept of the Open Door, 1899~1910." Mississippi Valley Historical Review 46. no 3.
Esthus. R. 1967. Theodore Roosevelt and Japan. Seatt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Griswold, W. A. 1962(1938). The Far Eastern Policy of the United States.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 Press.
Tomimas, S. 1919. Open-Door Policy and the Territorial Integrity of China. New York: A. G. Seiler.

 

태그:#태프트대통령, #달러외교, #만철중립화방안, #2차러일협약, #락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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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 정치이론, 한국정치, 국제관계, 한미관계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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