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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5일. 열하로 떠나기 전 여유롭게 베이징 둘러보기로 정했다. 고궁 입장권은 구하지 못했지만 천안문까지라도 가보자고 마음먹고 치엔먼을 나섰다가 깜짝 놀랐다.

지하도를 건너 광장 방향으로 가는 길이 청명절 연휴를 맞아 각지에서 몰려든 인파로 꽉 막혔다. 30분 걸려 지하도를 떠밀리다시피 건넜는데 앞쪽을 보니 더 이상 전진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건너 왔던 지하도를 다시 돌아 나와 유리창(琉璃廠)으로 발길을 돌렸다. 
 
천안문돵장을 가득 메운 중국관광객 연휴를 맞아 천안문을 찾은 인파, 그냥 인해전술이라는 단어만 떠오른다. ⓒ 민영인
 
명나라 때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를 하고 궁궐 건축에 필요한 유리기와를 구운 곳이라 하여 유리창이라 했으며, 그 후 명말청초 들어 고서적이 주로 거래되다가, 청건륭제 시절 사고전서(四庫全書)를 만들면서 유리창은 더욱 번성했다.

과거(科擧)를 보러 왔던 지방선비들이 낙방하고 돌아갈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지녔던 물건들을 내놓고, 몰락한 가문의 골동품, 서적 등이 나오면서 자연히 고서화나 골동품 등을 취급하는 시장으로 변했다. 따라서 연행 온 조선의 사신들도 꼭 들러야 되는 장소가 되어 연행록 곳곳에 유리창에 대한 언급이 있다. 
 
유리창 유리창 입구, 급변하는 현대 조류에 관광객이 더 이상 찾지 않아 유리창 거리는 퇴락했다. ⓒ 민영인
 
유리창은 단순한 중국 장터가 아니라 청과 조선 학자들의 교류의 장이기도 했다. 연암도 연경에 도착한 다음 8월 4일 일기에 의하면 정양문을 지나 유리창에 이르러 "모두 27칸이나 되며, 정양문에서 선무문에 이르기까지 다섯 거리에 국내외 모든 보화가 여기 쌓였다"고 했다.
 
중국판 동의보감 2016년 10월 산청군과 자매도시인 하남성 우주(禹州)시를 방문했울 때 작은 중의약박물관에 전시된 동의보감 책. 우주시는 약왕이라 칭송받는 손사막(孫思邈)의 출신지이자 중의햑의 고장이다. ⓒ 민영인
 
호기심이 많았던 연암은 궁금한 게 있으면 아무 가게나 불쑥 들어가 필담(筆談)으로 대화를 나눴다. 한 가게에서 그는 <동의보감>을 발견하고 가격을 흥정했으나 은 다섯 냥이라, 몇 번을 들었다 놓았다 하다 결국 사지는 못하고 그 자리에서 능어(凌魚)라는 중국인이 쓴 서문만 베꼈다. 열하일기 구외이문(口外異聞) 편에 기록되어 있다.
 
"이 <동의보감>은 옛 명나라 시절 조선의 허준이 엮은 것으로, 조선 사람들은 애초부터 문자를 알며,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동의라는 말은 무엇일까? 그 나라가 동쪽에 있으므로 의원에서도 동의라 일컫는 것이다. 허준이 비록 궁벽한 외국에 태어났으나 능히 아름다운 책을 지어서 중국에 유행되었으니, 글이란 그 뜻을 충분히 전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어떤 지역에서 지어졌다 해서 문제될 것은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 동의보감이 중국판으로 처음 나온 것은 건륭38년(1763년)의 벽어당(璧魚堂) 각본(刻本)이며, 이후 16차례나 발간되었다. 그러나 초판본에는 서문이 없고, 1766년 재판본에 능어의 서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연암은 재판본을 본 것이다.
정조22년(1798년) 서장관으로 연행을 다녀온 서유문(徐有聞)의 <무오연행록>에 의하면 유리창에는 책방이 열세 곳 있고 가게마다 동의보감이 서너 질 있었다고 한다.
 
연암보다 먼저 사행을 다녀온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1765년(乙酉, 영조41)부터 1766년(丙戌)까지 서장관인 숙부 홍억(洪檍)의 자제군관으로 사행단에 합류하여 청나라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으로 남겼다.

연암은 사행을 떠나기 전에 을병연행록을 읽었으며, 특히 유리창에서 만난 항주의 세 선비와 사귐을 기록한 '회우록'을 읽은 다음 담헌의 벗을 사귀는 도리에 감탄하고 자신도 이제야 벗을 사귀는 도리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한두 번 만나자 곧 옛 친구를 만난 듯이 마음을 기울이고 창자를 쏟아 호형호제 하였다. 친교를 맺어 진실한 맹세가 햇빛같이 밝았으며 7일 동안의 만남은 거의 즐거워 죽을 지경이었다."
 
특히 한 살 아래인 엄성과 가까웠는데, 엄성이 병이 위독하여 임종할 무렵 담헌한테 선물로 받은 조선산 먹을 꺼내 가슴에 올려놓은 채 향기를 맡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할 정도이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인들의 특성은 변함이 없다. 쉽게 마음을 열지는 않지만 한 번 마음이 통하면 오래 간다.
 
유리창의 영화는 이제 기록으로만 남게 되었다. 내가 1990년 처음 중국을 왔을 때만해도 그나마 제법 옛 모습이 남아 있어 북경의 관광지 중 하나였다. 그러나 컴퓨터와 휴대폰 등 전자산업의 발달로 지필묵연(紙筆墨硯)의 문방사우는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유리창의 거리도 시대의 조류에 따라 서서히 퇴락해 버렸다.
 
문방사보당 지필묵연은 더 이상 찾는 사람이 없어 문방사보는 이미 옛말이 되었다. ⓒ 민영인
 

덧붙이는 글 | 개인블로그 '길 위에서는 구도자가 된다'에도 실을 예정입니다.

태그:#신열하일기, #유리창, #문방사보, #동의보감, #연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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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지리산 자락 경남 산청, 대한민국 힐링1번지 동의보감촌 특리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여전히 어슬픈 농부입니다. 자연과 건강 그 속에서 역사와 문화 인문정신을 배우고 알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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