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드라마 <이몽> 스틸 컷

MBC 드라마 <이몽> 스틸 컷 ⓒ MBC

        
에펠탑이 준공된 1889년 3월 31일로부터 거의 정확히 30년 뒤인 1919년 3월 13일. 이날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한국 독립운동가가 있다. 애국 결사인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 강화회의'에 참가하고자 에펠탑의 도시를 찾은 김규식이다. 1881년 생인 그는 이때 38세였다.
 
'파리 평화회의'로도 불리는 파리 강화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의 처리를 위한 협상이다. 이 회의에 김규식이란 대표를 파견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것이 신한청년당의 의도였다.
 
김규식이 중국 상하이에서 파리로 출발한 것은 2월 1일이다. 파리로 가는 동안 3·1운동이 발발했고, 도착한 뒤 대한민국임시정부(4월 11일)가 수립됐다. 이런 흐름을 반영해 김규식은 신한청년당뿐 아니라 임시정부까지 대표해 '한국 민족의 주장'이란 요청서를 5월 12일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했다.
 
파리 강화회의를 주도한 쪽은 제1차 대전 승전국들이다. 일본 역시 승전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한청년당과 김규식의 활동은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 사건은 상당히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청년들이 벌인 일이라는 점에서도 그랬다.
 
그 점은 김규식 파견을 주도한 여운형(1885년생, 34세)이 이 일을 계기로 국제적 주목을 받으며 크게 부각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그 직전만 해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여운형은 이를 계기로 임시정부 외무부 차장으로 선임된 데 이어, 국빈급 대우를 받으며 일본을 공식 방문하기까지 했다.

일본이 조용히 덮으려고 한 '그 사건'
 
3·1운동에 놀란 일본은 한국 청년 여운형을 환대하고 그의 의견을 청취하는 방법으로 한국 민중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 그래서 여운형을 초청해 일본 각료들과 대화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김규식 파견 사건은 그런 결과로까지 이어진 대단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그때 파리에 사람을 파견한 쪽은 신한청년단만이 아니었다. 김규식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사람을 파견한 쪽도 있었다. 김규식 사건의 경우에는, 여운형에 대한 국빈급 환대에서 나타나듯이 '용납할 수는 없지만, 용기는 대단하다고 본다'는 게 일본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훨씬 무시무시한' 또 다른 한국인의 파리 파견에 대해서는 일본이 그런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김규식 사건은 오늘날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반면, '훨씬 무시무시한' 이 사건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이 조용히 덮으려 한 것도 이 사건이 잘 알려지지 않은 한 가지 이유가 됐다고 볼 수 있다. '훨씬 무시무시한' 이 사건을 주도한 인물은 MBC 드라마 <이몽>의 주인공이다. 약산 김원봉이 사건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었다.
   
드라마 <이몽>의 김원봉(유지태 분)은 펜이 아니라 총을 들고 독립운동을 한다. 김원봉은 실제로도 그랬다. 그런 김원봉한테 여운형의 운동 방식이 마음에 찰 리 없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약산 김원봉 평전>에 이런 대목이 있다.
   
 김원봉.

김원봉. ⓒ 위키백과

 
"김원봉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내 각국의 대표들에게 피압박민족의 설움을 호소하고 열국의 동정을 얻어 독립을 얻자는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국가의 존망과 민족의 사활이 걸린 큰 문제를 외국인에게 호소해 그들의 결정을 기다린다는 것은 결코 할 일도 아니거니와 해서 될 일도 아니다."

여운형과 김규식의 방식도 의미 있고 중요하지만, 김원봉이 그 방식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던 현실적 이유가 있다. 승전국들이 주도하는 파리 강화회의에서 승전국 일본한테 불리한 결정이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위 책은 김원봉의 생각을 이렇게 정리한다.

"일본이 혹 패전국이기라도 한다면 또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일본은 당당한 연합국의 일원이다. 열국이 대체 무엇 때문에 저희 우호국과 원수를 맺으면서까지 약소민족을 위해 싸워줄 것이냐? 그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판단에 따라 약산(若山) 김원봉(1898~1958)이 약수(若水) 김두전(1890~1964), 여성(如星) 이명건(1901~ ?) 등과 함께 기획한 것이 파리 강화회의에 사람을 파견하는 일이다. 약산 및 약수의 '약'과 여성의 '여'는 '같다'를 의미한다. 약산은 산처럼, 약수는 물처럼, 여성은 별처럼을 뜻한다. 산처럼 크고, 물처럼 넓고, 별처럼 빛나는 삶을 살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들이다.

일을 주도한 김원봉은 당시 스물을 갓 넘긴 청년이었다. 그는 큰형 내지는 삼촌뻘인 여운형과 정반대 계획을 수립했다. 그는 대표가 아닌 '자객'을 파리에 파견하는 작전을 세웠다.
 
한상도 건국대 교수의 <대륙에 남긴 꿈, 김원봉의 항일 역정과 삶>은 "자객의 신분으로 김철성을 파견하여 일본 대표를 암살해 조선 민족의 혁명 정신을 앙양시켜 보자는 계획"이 약산·약수·여성 등한테서 나왔다고 말한다. 일본 대표 등이 모인 자리에 청원서를 제출하는 게 아니라 일본 대표한테 총을 쏘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위 김삼웅 책은 이렇게 말한다.

"김원봉은 4년 전 국내 무전여행 중 부산에서 만난 김철성에게 그 소임을 맡겼다. 김철성은 그동안 일본에서 중학을 마치고 중국으로 건너와 오송동제대학(吳淞同濟大學)에 다니고 있었고 김일이라는 가명으로 활동 중이었다."
  
김철성은 김원봉의 제안을 받고 자객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기꺼이 프랑스로 떠났다. 그 후 상황은 이렇다.

거사 당일 벌어진 황당한 일
 
 MBC 드라마 <이몽> 스틸 컷

MBC 드라마 <이몽> 스틸 컷 ⓒ MBC

 
"김철성은 권총과 여권을 구해 파리로 건너갔다. 그리고 며칠 동안 일본 대표의 동정을 살피며 기회를 노렸다."
  
그런데 거사 당일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짐보따리를 풀어본 김철성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막상 기회를 포착해 거사를 하려고 행장을 풀어보니, 있어야 할 권총과 실탄이 사라졌다. 누군가가 뒤를 밟아 숙소에서 무기를 훔쳐간 것이다."
  
김철성은 할 수 없이 파리를 떠나야 했다. 그가 계획을 성사시켰다면, 이로 인해 독립운동의 양상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승전국 대표들이 모인 프랑스 파리에서 한국 청년이 일본 대표를 쓰러트렸다면,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에 버금가는 혹은 못지않은 결과가 산출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김철성은 울분을 삼키며 에펠탑의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훗날 김원봉이 회고한 바에 따르면, 당시 파리에 있던 어느 한국인이 김철성의 행장에서 권총을 몰래 빼내 처리해버린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고 한다. 김철성의 계획이 사전에 노출돼 있었던 것이다.
 
여운형이 김규식을 파견해 파리 강화회의에 호소문을 제출할 당시, 스물을 갓 넘긴 김원봉은 이처럼 김철성을 파견해 일본 대표 암살을 시도했다. 파리에 대표가 아닌 자객을 파견한 이 사건은 청년 김원봉의 독립운동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를 보여주는 예고탄이었다. 암살·파괴 활동과 전쟁을 통한 독립투쟁만이 한국 해방의 첩경이라고 판단한 그의 상황 인식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일이었다.
이몽 김원봉 파리 강화회의 파리 평화회의 김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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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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