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여순사건 71년 만에 당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처형된 세 명의 유족이 청구한 첫 재심이 열렸다. 승소하면 특별법이 없더라도 다른 피해자들도 구제받을 길이 열려, 유족들의 한(恨)이 깊은 만큼 명예회복에 대한 기대감마저 높다.

굵은 빗줄기가 하염없이 내리던 4월 29일 14시에 순천지원 316호 법정에서 첫 재심이 열렸다. 앞서 13시에는 법원 입구에서 여순사건재심대책위원회에서 준비한 기자회견이 열렸다. 역사적인 재판 소식에 유족뿐만 아니라 언론과 시민들의 관심이 여느 때보다 뜨거웠고, 취재진을 포함하여 56명만 방청이 가능했다.  
 
4월 29일 71년 만에 열리는 여순사것 첫 재심에서 유족과 시민들이기자회견을 갖고 올바른 판결과 여순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 여순 유가족 4월 29일 71년 만에 열리는 여순사것 첫 재심에서 유족과 시민들이기자회견을 갖고 올바른 판결과 여순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 배주연

관련사진보기

 
이번 재심에서 유족이 승소하면, 여순특별법이 없더라도 군법회의에 회부된 모든 피해자들이 구제를 받아 명예회복을 하고, 소송으로 보상도 받을 수 있다. 앞서 2005년에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이하 '진화위') 법이 제정되어, 피해를 확인한 후 소송을 제기한 일부 유족들만 보상을 받았다.

앞서 1948년 11월에 김백일 중령이 관련된 고등군법회의 명령 3호 내란 및 국권문란 혐의로 처형된, 102명 중 3인의 유족인 장경자, 신희중, 이기화씨는 2011년 10월에 광주고등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검찰의 항고에도 7년 5개월 만인 2019년 3월 21일에 대법원은 "민간인을 군법회의에서 처형한 것은 불법적이며 위법적 행위"였다며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4월 19일에 여순사건재심대책위원회가 결성되고, 29일에 재심 첫 재판이 열렸다.  

방청을 못하고 법정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유족들은 달라진 분위기 탓인지, 그간 "빨갱이"라는 낙인이 두려워 감추며 살았던 과거를 하나 둘 털어놓기 시작했다. 90세 박정남씨는 "산 증인이요. 그런데 늦게 와서 동상만 (재판장에) 들어갔다"며 아쉬워했다. 전남 보성 웅치 삼수부락 출신으로 여순사건 당시 19살로 5남매 중 큰딸로 아픔을 겪었다. 10월생인 막내가 돌이 지난 11월 1일 아침에, 42살인 부친은 장남(큰동상)과 자다가 끌려가 군산형무소로 이송되었다.
 
4월 29일 순천지원 입구에서 71년 만의 첫 재심을 앞두고 기자회견이 열렸다. 비가 옴에도 역사적인 첫 재심을 방청하기 위해 다수의 유족과 시민, 언론인들이 참석했다.
▲ 여순사건 첫 재심 기자회견 4월 29일 순천지원 입구에서 71년 만의 첫 재심을 앞두고 기자회견이 열렸다. 비가 옴에도 역사적인 첫 재심을 방청하기 위해 다수의 유족과 시민, 언론인들이 참석했다.
ⓒ 배주연

관련사진보기

 
"나는 죄가 없다. 배고프니 밥 좀 주라 항께, 거시기(간수)들이 무르팍을 밟고 그래갔고 1년 만에 돌아가셨어." 가족들의 도움으로 겨우 교도소에서 나왔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곧바로 별세했다. "입관을 할라고 본께 다리가 안 펴진께 다듬이돌로 눌러갔고. 죽었은께 오독오독 펴갔고 입관을 했어. 우리 아버지를." 

"산 중에 산 죄밖에 없제. 아무 사정이 없단 말이오. 큰동상이 커서 해군의장대에 갔는디, 그것도 전부 죄가 없어." "내가 시집을 가서 낳은 딸(셋째)은 전두환 때 (청와대 경호실로) 들어갔는디, 사돈네 팔촌까지 조사하는디 아무 죄가 없은께 들어가서 근무하다가 롯데호텔 시집도 갔어." "파출소 가서 어디 뺨 하나도 맞으면 안 돼. 우리 가족이. 우리 아부지가 그렇게 죄가 없어. 나 살았을 때 고치고 싶어."

즉, 연좌제가 적용되던 시절임에도 고인이 무혐의라는 것이 드러났기에 장남과 외손녀가 공직에 취업할 수 있었다. 한편, 당시 군산형무소에서 수감 중에 사망한 피해자는 혜택을 봤으나, 고인의 경우는 출소한 후에 죽었다는 이유로 보상을 전혀 받지 못했다.

42살 모친이 졸지에 유아를 포함한 5남매를 부양해야 하는 상황인지라, 박씨는 스무살만 먹어도 노처녀라 듣던 사회 분위기에서도 시집을 못 가고 동생을 돌보며 살았다. 27살이 되어서야 12살 연상에 이미 10살, 7살, 4살 삼남매가 있는 남자와 가정을 꾸려 딸들도 낳았다. 고단한 인생살이에 "여순반란이 날 죽인다. 날 죽인다. 피가 여기서 뭉쳐가꼬. 그것이 핏덩이가 넘어가 병원을 강께 "당신 운이 좋은 사람이요. 명이 질고. 여기서 있었으면 수술도 못한디. 핏덩이가 넘어갔은께 괜찮소."

우체국에 근무하는 49살 정진호씨는 순천 안풍동이 고향으로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진화위'에서 조사를 해서 피해자로 인정을 받았지만, 소송을 안 해서 못 받았다. 정씨는 부모를 통해 이야기를 들어 알게 되었다. 당시 아버지는 10대였다. "그때 당시에 반란세력이라 했다는 그 분들을 비호했다는 이유로. 도주하는 것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경찰서로 연행되어서 고문을 당한 후유증으로 두 분이 모두 돌아가셨다. 직접적인 증거가 없으니까 교도소는 가지 않았다."

이 사연을 옆에서 듣던 정성민씨(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완도유족회인 완도평화재단 이사)는 "미소송자이네"라며 안타까워했다. 당시에 "소송해야 하는 것을 몰라서도 있지만, 두려워서도 못 했던 이들도 있다"며, "희생당한 사람의 명단이 국가에 있을 것이다. 국가에서 개인들에게 어떻게 하라 알려줘야 했다"고 답답해했다.
 
여순사건 첫 재심이 열리는 날에 유족과 시민, 언론인들이 방청을 위해 순천지원 316호 법정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
▲ 재심 방청을 위해 가는 시민들 여순사건 첫 재심이 열리는 날에 유족과 시민, 언론인들이 방청을 위해 순천지원 316호 법정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
ⓒ 배주연

관련사진보기

 
벌교에서 온 신근우씨는 본디 고흥 대서 하장이 고향으로 유복자로 태어났다. 옆에 있던 아내가 귀가 어두우니 말을 크게 하라고 알려줬다. 신씨는 "나가 3개월인가 4개월인가. 할머니가 50년생이라고 호랑이띠라고. 유복자라고 이야기를 해줬다"며, 외가에서 컸다 고백했다. 모친은 출산 후에 외가로 가서 지내다 신 씨가 10살이던 때에 돌아가셔서, 신 씨는 오로지 외조부모에 의지했다.

호적과 마을에서 부르던 이름이 다른 부친은 26살에 "봄에 논에서 (부친이) 일하고 있는디 차를 타고 잡아감씨롱 '저 사람은 안 잡아가느냐?'" 해서 태워져 낙안 오금재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총살되었다. 신 씨의 아내는 벌교에 사는 고숙이 목격하고 "트럭에 사람을 엮어가고 많이 가더라꼬"라며, 경찰의 경계가 삼엄해 나중에야 외가에 소식을 전해 주었다고 덧붙였다. 

뒤숭숭한 터라 한참 있다가 큰아버지와 고숙이 가니 이미 시신은 부패되어 있었다. 그래서 옮길 수가 없어 고무신을 가슴 위에 덮어 표시를 해서 흙으로 덮어놓았다. 신씨가 16살 때에 "이장을 한디. 절을 하라 해서 한디. 여기도 아니다. 다섯 군데 절을 했어. 낸중에 바쁜께 '한 사보 질르면 나올 것인디' 옛날 말로. 고무신이 나오븐께 그 때부터 울기 시작합디다. 큰아버지와 고숙이 울기 시작한디. 나는 뭔 소린가 모르제."

신 씨는 "학교를 10살 때 댕깄게 할머니가 유복자이고 여순사건 때 잡혀가서 죽었다"고 말해주었다며, 동네 대서 주민들도 "봄에 니그 아부지는 일하다가 잡혀가쁘다. 증언해준 사람이 두 분이다. 살아서. 나도 진작 죽었으건디 약으로 산께"라며 헛웃음을 지었다.  
 
2018년 10월 20일 순천 팔마체육관에 있는 여순위령탑 앞에서 열린 여순사건 위령제에서  피해자들의 넋을 추모하고 있는 모습이다.
▲ 여순사건 위령제 2018년 10월 20일 순천 팔마체육관에 있는 여순위령탑 앞에서 열린 여순사건 위령제에서 피해자들의 넋을 추모하고 있는 모습이다.
ⓒ 배주연

관련사진보기

 
당시 빨갱이라 몰린 터라 내 자식들에게도 지장이 있다며 큰집에서 못 오게 해서, 모자가 외가로 가게 되었다. 할아버지 때는 부자였는데, 큰아버지가 술 먹고 노름을 해서 탕진을 했다고 한다. 신씨의 아내는 "재산도 큰집이. 아무도 없은께. 유복자니께 뭘 알 것이여. 다 뺏어다 잡사버렸다"고 말했다. 신씨가 오래 전부터 부친에 대해 알아보려고 보훈청에도 갔는데 기록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아는 사람 통해서 보성 유족회장을 찾아가 밝혀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동네 사람들은 행여 피해를 볼까봐 다들 쉬쉬하다가 이제야 부친에 대해 말해주었다. 신씨의 아내가 말하길, "그 때 밥을 쪼까 먹고 살만 했는디. 유지 사람들이. 배고픈 사람들은 자기 먹을 것 없어도 나눠주었다고. 시아버지가." 부친에 대해 찾는다고 하니까 "니그 아부지가 다른 사람이 나쁘다고 경찰서 끌고 갈라면, 저 사람은 죄가 없은께 나를 차라리 죽이고 그 사람을 살려주라고. 인제에서야 이야기를 말씀하세요. 금년부터." "우리는 근지 전지 모르제. 니그 아부지처럼 선한 사람이 없는디 진짜 억울하게 돌아가셨다." 생전에 고인이 선행을 베풀던 것에 대한 보답인지, 어느 분이 그 당시에 부친과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신 씨와 모습이 닮아서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빨갱이" 낙인이 두려워 피해자임에도 모두가 숨죽인 채 모두가 살아야 했던 세월이 벌써 71년이었다. 이번 첫 재심과 같은 기쁜 소식을 듣지 못하고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난 이들이 부지기수이다. 이제라도 살아남은 자들의 억울함을 재심 판결과 특별법 제정으로 공식적으로 풀어주고, 제주 4·3처럼 추모하며 국가폭력의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모습이 절실하다.

태그:#여순사건 첫 재심, #여순사건 유족, #여순특별법 제정, #국가폭력 피해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한자어로 '좋아할, 호', '낭만, 랑',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 '이'를 써서 호랑이. 호랑이띠이기도 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