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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이 있던 자리에 자라난 소나무들이 두 개의 석탑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어 신비롭다.
▲ 경주 원원사터 전경 법당이 있던 자리에 자라난 소나무들이 두 개의 석탑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어 신비롭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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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절터 하나 보자고 쉬지 않고 세 시간을 내달렸다.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니 245킬로미터가 찍힌다. 아무리 도로가 좋아졌다고는 하나 광주에서 경주까지는 멀고도 멀었다.

지난 주말 당일치기로 경주에 간다고 하니 모두가 아서라 말했다. 국보급 문화재가 도처에 즐비한 경주를 고작 몇 시간 들렀다 오는 건,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도시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거다. 국립경주박물관 한 곳만 둘러봐도 족히 서너 시간은 더 걸릴 거라고 말했다.

답사를 다닌답시고 대학 시절부터 경주를 제 집 드나들 듯 한 명색이 역사학도가 그걸 모를 리가 있나. 그저 수박 겉핥기식으로 둘러본다 해도 경주라면 월세 방 한 칸 정도는 얻을 각오를 해야 한다. 중·고등학교 시절 수학여행을 다녀간 걸 두고 경주에 가봤다고 말하는 건,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는 격이다.

사찰에 용왕이 모셔져 있다니

경주 외곽 궁벽한 산골에 자리한 외동읍 원원사터를 찾아가는 길이다. 절터는 고속도로 경주 나들목에서 나와 울산 방향으로 20킬로미터 남짓 떨어져 있다. 경주와 울산의 대략 중간쯤이다. 불국사 입구와 원성왕의 무덤인 괘릉을 지나니, 경주가 아닌 듯 풍경마저 차분하다.

안내판이 변변치 않아 내비게이션의 도움 없이는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길이 복잡하고 비좁아 내비게이션을 따라가기도 버겁다. 절까지 가는 대중교통편은 없고, 대형버스로는 접근이 아예 불가능하다. 도중에 요철이 심한 비포장도로까지 지나야 해서 승용차로의 접근조차 만만한 일이 아니다.

간선도로에서 절에 이르는 십리 남짓의 길 주변에는 변변한 가게 하나가 없다. 식당과 기념품 가게 등으로 포위되다시피 한 경주의 여느 관광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절 입구에는 널찍한 주차 공간이 마련돼 있지만, 경주 전체가 들썩이는 주말인데도 텅 비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언뜻 무속신앙의 신당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안에서 의식을 행할 수 없을 만큼 내부가 좁다.
▲ 원원사터 용왕각 내부 언뜻 무속신앙의 신당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안에서 의식을 행할 수 없을 만큼 내부가 좁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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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 드문 이곳을 부러 찾아온 건 절에 용왕이 모셔져 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어서다. 으레 깊은 산중에 터를 잡은 절에는 토착신앙이 습합된 흔적인 산신각이 자리하기 마련인데, 이곳은 용왕이 산신을 대신하고 있다는 거다. 당장 절집에 '용왕각'이라는 이름 자체가 낯설었다.

용왕이라면 바다를 주관하는 분이니, 필시 동해와의 인연이 있을 터다. 그러고 보니, 첩첩 산으로 둘러싸인 절터는 동남쪽 울산 방향으로 트여있다. 당시 서라벌 경주의 외항 역할을 하던 울산에서 경주에 이르는 길목에 수문장처럼 지켜선 모양새다. 이 길이 끊임없이 신라를 괴롭혔던 왜구가 쳐들어온 통로였다는 걸 떠올린다면, 절을 창건한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곳은 김유신 등이 뜻을 모아 세운 호국사찰이라고 한다. 삼국통일 전인 선덕여왕 시기 중국에서 밀교를 배운 명랑법사가 당나라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비법을 신라 왕실에 전수했는데, 이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창건됐다는 것이다. 하여 원원사는 사천왕사 등과 더불어 신라 호국불교의 발상지로 소개되고 있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이 죽어 동해의 용이 돼 왜구를 물리치겠다는 유언과도 맞닿아있는 느낌이다. 문무왕은 신라는 물론, 우리나라 역대 왕들을 통틀어 유일하게 바다에 묻힌 인물로 유명하다. 묻혔다기보다 불교식으로 화장된 유해가 바다에 뿌려졌다고 보는 게 정확할 테지만, 아무튼 불교의 호국적 성격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로 널리 회자된다.

멀리서 찾아와 소원을 비는 절

하지만, 원원사 창건에 관한 전혀 다른 이야기도 전한다. 믿거나 말거나 스러진 절터에 전설 한 꼭지 남아있기 마련이지만, 호국사찰이라는 <삼국유사>의 기록과는 사뭇 대비되는 이야기라 눈길을 끈다. 온갖 멸시에도 머슴들이 힘을 모아 절을 지었고, 그 불공으로 마을 사람들 모두가 복을 누렸다는 머슴 보구의 설화가 그것이다.

당시 지배층의 발원으로 창건된 게 아니라, 최하층 신분인 머슴들의 소원이 담긴 절이라는 이야기다. 원원사라는 이름도, '멀리서 찾아와(遠) 소원을 비는(願)' 절이라는 의미이니, <삼국유사>의 거창한 기록보다 소박한 구전 설화에 더 부합한다. 창건 당시는 몰라도, 적어도 고통 받는 백성들이 순례하듯 찾아와 복을 빌고 위안을 얻는 기도처였으리라 여겨진다.

곧, 원원사의 용왕은 인접한 바다에 기대어 사는 백성들의 기도를 들어주는 신으로 숭앙됐을지도 모른다. '왕즉불(王卽佛)'이었던 시대에 비록 부처와 공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에겐 부처보다 용왕을 더 신성시했을 수도 있다. 이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고래잡이에서의 무사와 풍요를 기원했던 제단으로 추정되는 반구대 바위그림이 있다.

사적 제46호로 지정된 절터에 걸어 오르자면, 새로 지어진 원원사를 지나가야 한다. 본 주인인 절터를 배려라도 하듯 야트막한 석축 위에 법당이 납작 엎드려있다. 마치 머슴들이 지은 절이라는 걸 알리려는 듯 여느 절집과는 달리 법당의 천불보전 현판도 한자가 아니라 한글로 적혀있다.

법당을 발아래에 둔 언덕 위에 우람한 석탑 두 기와 그 사이에 화사석을 잃은 석등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원원사터의 실제 주인이지만, 절이 훼철된 이후 오랫동안 방치된 탓인지 파손 상태가 심각하다. 그나마 멀쩡하게 보이는 곳은 끼우고 덧댄 보수의 흔적이다.

석탑과 석등 뒤의 빈터는 소나무 숲으로 변해, 가지런한 기단의 흔적만이 그곳이 법당이 세워진 자리였음을 알려준다. 우연일 테지만, 기단 위에 곧게 뻗은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석탑을 향해 경배하듯 고개를 숙이고 있어 신비롭기까지 하다. 7미터짜리 석탑이 유난히 커 보이는 이유다.

법당 터 바로 옆에 문제의 용왕각이 있다. 워낙 작아 흡사 장난감 블록처럼 보이기도 한다. 안내판이 세워져있기는커녕 건물에 현판도 달려있지 않다. 대신 건물의 여닫이문 위에 시주자들의 이름을 깨알같이 적은 푯말이 있어 이곳이 용왕각임을 알 수 있다.

내부의 정면 벽에는 파도 위에 용을 타고 있는 용왕이 그려져 있다. 파도 대신 산봉우리가, 용 대신 호랑이가 그려져 있으면 말 그대로 산신각이다. 용왕의 차림새와 건물의 위치, 내부 장식 등을 놓고 보면, 언뜻 무속신앙의 신당처럼 보이기도 한다.

용왕각 앞을 대숲이 시야를 가리고 있지만, 좌우로 산이 절터를 감싸 안아 포근한 느낌을 받는다. 건물도, 석물도, 땅조차도 초록빛에 물들었다. 일단 카메라부터 들이대고 보는 여느 절집과는 풍기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명당이란 게 이런 곳을 두고 하는 말인 성싶다.

국가와 종교, 무엇이 먼저일까
 
워낙 건물이 작아 장난감 블록처럼 보인다. 그 앞에 서면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
▲ 원원사터 용왕각  워낙 건물이 작아 장난감 블록처럼 보인다. 그 앞에 서면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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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조성한 원원사 범종에 양각된 '호국'이라는 두 글자가 유난히 또렷하다. 가만히 보면, 우리나라의 유서 깊은 사찰 중에 원효와 의상이 관련되지 않는 절이 드물고, 호국사찰 아닌 곳이 없다. 지금까지도 국가에 앞 다퉈 충성 맹세하듯 '호국'이라는 말을 앞세우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흔히 호국불교를 뗄 수 없는 한 단어처럼 이해하지만, 교리로 보자면 '호국'은 '불교'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다. 불교에서는 생명을 지닌 것은 그 자체로 소중해서 한낱 미물이라도 죽여선 안 된다고 설파한다. 불살생계(不殺生戒)라 하여, 승려를 비롯한 재가불자들이 지켜야할 다섯 가지 계율 중 맨 앞에 자리한다.

그런데도 호국불교를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처럼 인식하게 된 건 불교를 통치의 수단으로 받아들이고 활용하고자 했던 왕권의 영향이 크다. 이는 이곳 원원사의 창건 이야기를 담고 있는 <삼국유사>의 집필 이유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삼국유사>는 고려 말 몽골 간섭기 때 저술됐다.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당시, 승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호국'이 '불교'보다 절실했을 것이다.

곧, <삼국유사>의 기록은 외세의 지배를 받던 당시 민족의 뿌리와 우월성을 강조해야 했고, 결국 호국적 성격이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불교가 갓 전래된 시기의 화랑도도, 이후 팔만대장경의 조판 이유도,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의 승병도 모두 거두절미 호국불교의 전통이 계승된 것으로 이해됐다. 역사 기록에서 국가는 불교보다 늘 우위에 섰다.

지금이라고 다를까. 한번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승려의 전쟁 참여에 대한 찬반 토론을 진행해본 적이 있다. 화랑도의 세속오계에서 보듯 승려가 임전무퇴와 살생유택을 강조하고,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맞서 불경과 목탁 대신 칼을 들었던 역사적 사실에 대해 아이들끼리 생각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토론은 아예 시작되지도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파계'를 입에 담는 아이가 단 한 명도 없었던 탓이다. 전란 속에 종교보다 국가가 더 중요하다며, 승려도 백성 된 도리를 다해야 한다고 이구동성 말했다. 국난의 위기 앞에서 교리 운운하는 건 승려이기에 앞서 사람도 아니라는 등의 거친 말까지 튀어나오곤 했다.

아이들의 머릿속에서도 국가는 불교보다 늘 우위에 섰다. 그들은 종교를 넘어, 그 어떤 신념과 가치관도 국가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을 두루 공유하고 있었다. 이제와 생각하니, 그들의 생각이 조금은 위험해 보인다. 생뚱맞지만, 경주 원원사터의 용왕이 내게 가르쳐준 교훈은 이것이다.

태그:#경주 원원사터, #호국불교, #용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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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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