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이 기획은 미국 외교정책의 변천 속에서 동아시아, 한반도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종래 대부분의 연구는 한반도문제를 중심으로 미국의 외교정책을 논의했다. 이 기획은 반대로 미국외교정책의 특징을 고찰하는 가운데 한반도문제를 살펴본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미국의 외교정책사는 기존 유럽나라들과는 결이 다른 정치문법을 채택해온 역사이기 때문이다.

외교정책 상의 변형과 변주, 애매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흐르는 미국외교정책의 내적 핵심과 문법이 있다는 게 필자의 핵심 주장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미국과 동아시아, 미국과 한반도 관계의 역동적 변화상을 보다 잘 이해하고 들여다 볼 수 있다고 판단한다. - 기자말


먼로독트린 외에 별도의 외교적 원칙을 표방하지 않던 미국은 20세기의 전환기에 들어서 새로운 대외정책을 천명했다. 이 정책은 본래 동아시아, 특히 중국을 겨냥해 만들어 졌지만 조만간 미국 대외정책의 표준이 되어 한 세기 이상 지속될 예정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작동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1899년과 1900년 존 헤이 국무장관이 서구 열강 및 일본에게 회람한 두 개의 각서에서 유래한 '문호개방정책'이다.

'문호개방정책'이 중요한 것은 그 정책이 단순히 동아시아 어느 한 나라에 머무르지 않고, 20세기 이후 한반도, 중국, 일본을 위시한 러시아 등 동아시아 전체의 국제정치지형을 형성하는 데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반, 유럽에는 영국과 독일을 양대 축으로 세력균형 체제가 촘촘히 작동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 입장에서도 딱히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동아시아는 달랐다. 중국과 만주, 그리고 한반도를 중심으로 유럽 열강 및 일본의 세력쟁탈전이 벌어졌다. 어느 한 열강도 이 지역을 독점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독자적으로 대외정책을 펼칠 수 있는 지리적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2차 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인 '문호개방'이 유럽을 포함한 전 세계적 차원의 대외정책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20세기 미국대외정책의 골간은 바로 '문호개방정책'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윌슨주의로 상징되는 미국식 이상주의나 현실주의 혹은 세계 2차 대전 이후의 국제주의 영향으로 미국의 대외정책은 상당한 진폭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그 저변에는 흔들리지 않는 원칙으로서 '문호개방정책'이 깔려 있었다.

미국이 문호개방정책을 천명한 이유는 청일전쟁 직후 중국에서 전개된 서구 열강의 극심한 세력 다툼을 배경으로 한다. 청일전쟁과 삼국간섭이 마무리된 1898년은 '이권획득투쟁battle for concession'과 '조차의 난전orgy for lease'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최문형, 2001:256). 독일의 교주만 점령과 만주에서의 러시아의 독점적 지위 확립 시도가 모든 사건의 출발점이었다.
 
서구열강과 일본의 중국침탈  1898년 1월 15일 프랑스 신문 《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에 실린 열강들의 중국 분할 구상을 풍자하는 만평.
▲ 서구열강과 일본의 중국침탈  1898년 1월 15일 프랑스 신문 《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에 실린 열강들의 중국 분할 구상을 풍자하는 만평.
ⓒ Public Domain

관련사진보기

중국에서 열강들 간의 세력변화에 위기를 느낀 영국 역시 자국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기존의 '문호개방노선'을 포기하고 세력분할에 가담했다. 청나라가 홍콩 섬 건너편의 '구룡반도'로 잘 알려진 주룽 일대를 영국에 할양한 게 1898년 6월 5일의 일이었다. 이로부터 1년 3개월 후인 1899년 9월, 미국은 제1차 '문호개방원칙'을 천명했다. 이는 미국의 '문호개방정책'이 서구 열강의 세력분할과 무관치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처음에 헤이 장관은 서구 열강에게 '문호개방각서'로 알려진 다음 세 가지 원칙을 수용할 것을 요청했다. 첫째, 중국 내의 세력권 또는 조차지 내에서 어떤 국가도 조약 항 또는 기득권에 관여할 수 없다. 둘째, 중국의 관세율이 이런 세력권 내에서도 적용되며 관세는 중국해관이 징수한다. 셋째, 각각의 세력권 안에서 항세, 철도운임 등 자국민을 위한 편파적인 호혜조치를 취하지 않는다(Cullinane and Goodall, 2017:19-20).

이 정책의 핵심은 서구 열강이 조차와 할양을 통해 확보한 중국영토 안의 배타적 영향권 안에서 다른 나라들도 자유롭고 동등하게 무역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 원칙에 해당 국가가 모두 동의한다면 미국은 열강의 간섭에 대한 두려움 없이 중국과 무역을 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열강들은 대체로 냉담한 반응을 드러냈다. 영국은 마지못해서 그리고 일본은 유보적이지만 다소 적극적으로 지지했는데, 일본은 중국 내에서 아직 배타적 영역을 구축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만주지배에 상당한 이해가 걸린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 등 열강들은 문호개방원칙은 수용하겠으나 다른 나라들이 동의하지 않는 한 실천에 옮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헤이 장관의 1차 문호개방선언은 이처럼 무역통상 일변도의 매우 소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영향권으로 요약되는 서구 열강의 기득권을 그대로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영토보전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광산, 철도부설권에 관해서도 침묵을 지켰다. 요컨대, 정치와 경제의 연계성이 부족했다. 그런데 문호개방선언이 담고 있었던 미국의 정치적 목표를 실현시킬 수 있는 기회가 1900년 발생한 의화단 사건에서 찾아왔다.

구미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침탈이 도를 더해가자 비밀무술단체인 의화단이 외국인들을 습격했다. 의화단 사건은 베이징 주재 영국대사관에 모여 있던 각국 외교관들을 포위, 구금하는 사태로 절정에 달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미국을 포함한 제국주의 열강은 외교관들을 구출하기 위해 중국에 국제원정군을 파병했다. 1900년 8월, 국제원정군은 베이징으로 진격해서 포위망을 뚫어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파병한 2500명 해병대의 활약이 두드러졌는데, 이 사건은 훗날 <북경의 55일>이라는 유명한 할리우드 영화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발언권이 강해졌다. 이에 고무된 헤이 장관은 1900년 7월 3일자로 서구 열강에게 2차 문호개방정책을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두 번째 문호개방선언에서 비로소 '중국 영토와 행정의 통일성', 곧 중국의 주권과 독립 보존이 미국의 기본정책이며 중국 내 전 지역에서 평등하고 차별 없는 무역을 보장해야 한다는 문호개방정책의 전모가 드러났다. 헤이는 먼저 영국과 독일로부터 문호개방선언에 대한 지지를 확보한 다음, 다른 참여국들이 의화단 사건으로 입은 손실에 대해 중국으로부터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중재에 나섰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점은 미국은 자국의 문호개방정책을 일방적으로 발표할 뿐 열강의 답변을 별도로 요청하거나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의화단 사건을 진압하는 데 앞장섬으로써 독자적 대외정책을 실행에 옮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처음으로 얻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외교적 해결책 보다는 미국 특유의 일방주의 원칙, 곧 독트린을 앞세우는 군사적 행동주의의 그림자가 동아시아 정책 수행에 드리우기 시작했다는 점일 것이다.

문호개방정책은 윌리엄스(Williams, 1972) 등 미국의 수정주의 외교사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팽창주의적 경제 침탈을 위한 정교한 제국주의 논리를 고안해냈다기보다 기존 세력권 중심의 서구 열강들의 세력균형을 비판하면서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미국 특유의 대외정책 문법의 산물로 보는 게 타당할 것으로 여겨진다. 헤이 국무장관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이익실현을 위해 발송한 두 개의 각서에서 비롯된 문호개방원칙은 20세기 내내 미국대외정책의 주춧돌을 놓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미국을 대표하는 대외정책으로 정의할 수 있다.

문호개방정책은 큰 포부와 달리 20세기 초반에는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그다지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케난(Kennan, 2012:37)이 지적한대로, 문호개방정책이 중국에서 서구 열강의 영향권 추구를 충분히 방어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중국이 단일한 열강의 지배, 조선처럼 식민지로 전락하는 사태만큼은 방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할양·조차 방식을 통한 서구 열강의 영향권 추구는 막지 못했지만, 특정 열강의 일방적 독점은 허용하지 않음으로 해서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은 유지될 수 있었다.

사실, 문호개방정책에 포함된 두 개의 원칙은 성격이 상당히 달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문자 그대로의 '문호개방', 곧 중국의 관세주권 및 동등한 시장접근을 의미하는 경제원칙에서 중국의 영토주권 및 행정적 통일성을 옹호하는 정치원칙으로 강조점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전반기 내내 중국, 만주지역에서 일본의 팽창주의적 시도를 막아설 때마다 미국은 문호개방원칙 위반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 일본은 이러한 미국의 간섭이 헤이 장관이 천명했던 최초의 문호개방선언에 과연 부합하는지 따져 물었다(Clyde, 1966:168~169). 문호개방정책이 처음의 목표에서 벗어나 미국의 이익을 옹호하는 개입과 간섭의 도구로 변질되지 않았는지를 정확히 문제 삼은 것이다.

존 헤이의 '문호개방선언'은 단순한 대외정책을 넘어서 명실상부 하나의 외교원칙인 독트린으로 전환했다. 왜냐하면, 미국은 외교안보상의 중대한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적과 동지를 가늠하는 기준으로 '문호개방원칙'을 제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핵문제가 해결 기미를 보이는 끝자락에서 미국이 북한과의 국교정상화를 위한 최종 판단 기준 역시 중국, 베트남에서처럼 '문호개방원칙'의 수용 여부가 될 것이다.

문호개방정책은 구한말 한반도 문제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내정에는 무능했지만 오랜 재위 덕에 열강에 지속적으로 시달리면서 나름의 외교적 촉각을 보유한 고종은 미국의 문호개방정책이 조선의 독립을 유지하는 데 상당히 우호적임을 즉각 알아차렸다. 고종은 알렌 공사를 통해 조선이 문호개방정책의 범위 안에 포함될 수 있도록 미국정부에 요청했다(Lee, 1999:19). 다시 말해서, 미국에게 한반도문제와 동아시아정책의 일치, 즉 커플링을 요구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헤이 국무장관과 매킨리 대통령은 즉답을 피하면서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미국이 즉답을 피한 이유는 조선이 상업 이익을 핵심으로 하는 미국의 국익에 중국만큼 중요한 지역인가, 한반도를 과연 문호개방의 범주 안에 포함시킬 것인가 등의 문제에 대해 정책적 판단이 잘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결국, 한반도를 문호개방정책과 연계할지(coupling), 아니면 분리할지(decoupling) 여부에 대한 최종 판단은 차기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손에 맡겨졌다.

■ 참고문헌
김기정. 2003. 『미국의 동아시아 개입의 역사적 원형과 20세기 초 한미 관계 연구』. 문학과지성사.
최문형. 2001. 『한국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지식산업사.
Clyde, P. H. 1966. International Rivalries in Manchuria, 1689-1922. New York: Octagon Books.
Cullinane, M. P. and Alex Goodall. 2017. Open Door Era.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Dennett, T. 1933. John Hay: From Poetry to Politics. New York: Dodd, Mead.
Kennan, G. F. 2012. American Diplomacy 1900-1950.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Lee, Yur-Bok. 1999. "A Korean View of Korean-American Relations." in Yur-Bok Lee and Wayne Patterson (ed.s). Korean-American Relations, 1866-1997.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Williams. W. A. 1972. The Tragedy of American Diplomacy. New York: Delta.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 정치이론, 한국정치, 국제관계, 한미관계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