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여행

포토뉴스

마그마 수증기 덕에 자연온천이 발달한 미국 캘리포니아.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신성시하고, 백인들은 호텔과 리조트를 세운 이곳의 역사를 전현직 기자인 우세린 작가 부부가 충주 유순상 작가의 그림과 함께 소개한다.[편집자말]
해질 무렵 미 서부 최대 규모 국립공원인 데스밸리의 기괴한 풍경. ⓒ 우세린
  
"여기 창고에 쌓여 있는 가죽 봐. 가격이 계속 떨어져 이제 모피 사냥도 오래 못할 것 같아."
 
친구의 푸념은 가볍지 않다. 스물아홉 살 모피 사냥꾼 윌리엄 루이스 맨리(William Lewis Manly)도 덩달아 한숨을 토했다. 그가 내세울 거라곤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배운 사냥 기술이 전부다. 아홉 살 때 부모 품을 벗어나 미 동부 위스콘신 주에서 짐승을 잡아 모피를 팔고, 사냥감이 없을 때는 광산에 나가 곡괭이를 들었다.

벌목장에 나가 채벌도 했다. 하지만 잡을 동물이 줄어들고 모피 주요 수출 지역이던 유럽에서마저 패션 유행이 변해 비버 가죽 모자 등 모피 수요가 급감했다. 계산기를 아무리 두드려봐도 앞날이 불투명했다. 멕시코와 전쟁을 앞두고 '철밥통'인 미군에 입대하려 했지만 이마저 대기자가 너무 많았다.
 
'나도 서부로 가 볼까?' 맨리는 서부 개척에 모험을 걸어볼까 생각했다. 미 서북부 오리건주에 가면 주정부가 이주민 정착을 위해 땅을 준다는 소식을 들었다. 벌목장에는 일자리가 넘친다고 했다. 무엇보다 가까운 캘리포니아에는 모래에서 황금이 난다나.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지역신문에서 은근히 뉘앙스를 풍겼다. '소문에 사고 뉴스에 팔라'는 주식시장 격언도 있지만, 맨리는 얼른 승부수를 던졌다. 사람들은 '골드 피버'(Gold Fever), 이른바 '황금 열풍'에 빠졌다. 집을 팔고 마차를 구입해 서부로 향했다. 갓난아이를 업고 아메리카 원주민의 화살을 피해 3000km 대장정을 선택했다. 맨리도 운을 한번 시험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래, 가즈아!'
 
기회를 찾아 떠난 이민자의 골드 러시
 
1849년 봄, 청년 백수가 된 맨리는 나귀에 탄약과 도끼를 싣고 탐험가 6명과 금빛 땅 서부로 향했다. 마차를 타고 산을 넘고 돌풍을 피해 와이오밍주 그린강 어귀에 도착했다.

버려진 배에 몸을 싣고 남쪽으로 노를 저었다. 길이 3.5m, 가로 1.8m의 길고 폭 좁은 배는 수심이 얕고 돌이 많은 강에서 '로데오 소'처럼 뛰었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바위 뒤에서 호시탐탐 노리기도 하고, 때로는 길 잃은 그들에게 길잡이가 돼 주기도 했다.
 
배가 정박한 곳은 유타주 남쪽 솔트레이크시티였다. 그는 그곳에서 유럽계 이민자 골드 러시 마차 부대의 탐험가로 고용됐다. 탐험 대장은 원정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미 서부 최대 분지 지역을 관통하기로 했다. 일 년 강수량 평균 5㎜, 여름 낮 기온 50도, 해수면 이하 86m 지역. 더운 공기는 빠지지 않고 분지에 갇혀 가마솥처럼 끓었다. 사람 숨소리마저 대기를 데웠다.
 
황금을 찾아 서부로 떠난 골드러시 마차 행렬. ⓒ 유순상
  
길을 헤맨 지 거의 한달 째 대장은 뒤늦게 실수를 인정했다. 부정확한 지도가 들고 대열을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탐험대의 말과 소는 원주민의 화살에 맞아 죽는 것보다 굶어 죽는 것이 더 많았다. 자칫 더 머뭇거렸다간 다른 탐험대 소식처럼 대원들끼리 생존을 위한 살육전이 벌어질 수 있었다.
 
'늦깎이 취준생'의 골드 러시 행렬 구출 작전
 
늦깎이 취업준비생 맨리는 동료 존 해니 로저스(John Haney Rogers)와 활로를 개척하고 보급품을 조달하기 위해 남쪽 LA로 향했다. 탐험대 일부 사람들은 도망가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맨리와 로저스는 별을 이정표 삼아 묵묵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가까운 곳에 마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402km를 걸어 LA인근 란초 샌프란시스코(Rancho Sanfransico)에 도착했다. 멕시코계 주민들은 사막을 통과해 온 그들을 향해 경이로운 눈빛을 보냈다. 그들은 빵과 우유, 고기를 후하게 내줬다. 맨리는 오래 쉬지도 못하고 고립된 탐험대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당시 마차 모습. 안에서 요리도 하고 잠도 잘 수 있어 캠핑카의 원조라 할 수 있다. ⓒ 우세린
 
26일 만에 돌아온 본대는 묘지처럼 고요했다. 허공에 총을 한 발 쏘자 마차에서 사람들이 좀비처럼 걸어 나왔다. 어린아이는 바짝 말라 배만 볼록 나왔다. 아이 어머니는 아이가 정신이 이상해진 것 같다고 울먹거렸다. 어머니들은 말린 고기를 끓여 죽을 만들어 가족을 연명하고 있었다. 잔뜩 굶주린 말과 소는 뼈만 남아 안장이 흘러내렸다.
 
맨리는 보급품을 나눠준 뒤 탐험대를 남쪽 길로 안내했다. 황소가 지쳐 언덕을 타지 못하자 사람들은 손으로 뿔을 잡아 끌고 끈으로 묶어 당겼다. 하지만 나무 한 그루 없는 깊은 돌산과 한 조각 그늘조차 허락하지 않는 뜨거운 하늘은 여성과 아이를 주저 앉혔다. 맨리는 말했다.
 
"나는 당신들을 여기에 내버려 둘 수 없다. 이곳에는 당신들이 묻힐 무덤이 없다. 울적한 이곳 산꼭대기보다 차라리 저 반대편 꽃이 핀 언덕까지 가서 죽으라."
 
골드 러시 마차부대는 12월 한겨울에야 사막을 빠져 나왔다. 맨리는 뒤를 돌아보며 사막을 향해 작별 인사를 했다. "굿바이 데스 밸리(Goodbye Death Valley)." 이곳이 바로 서울의 12. 8배(7,800km²)인 미 최대 규모 국립공원이자 수 억년 된 암석과 물결치는 형형색색의 언덕, 지하동굴 속에 푸른 물고기가 서식하는 데스 밸리 국립공원이다.

그곳이 바로 탐험가이자 미래가 막막했던 20대 취준생 맨리에 의해 이름이 지어졌다. 그는 자서전 두 번째 편집본인 '데스 밸리 인 49(Death Valley in '49)'을 1894년 발표했다. 그해 골드러시를 한 사람을 일컬어 '포티나이너스(49ers. 현재 샌프란시스코 미식축구팀 이름)'라 부르고 있다.
 
데스밸리 지브리스키 포인트. 19세기말에서 20년대초까지 광산업이 활발했다. ⓒ 우세린
 
수 천년 전 고대 물이 흐르는 '밀실 온천'
 
데스 밸리 남쪽에는 온천으로 유명한 마을 테코파(Tecopa)가 있다. 이곳은 기원전 1000년, 아메리카 원주민 쇼숀(Shoshone)과 파이우트(Paiute)가 거주하던 곳이다. 유목 생활을 하던 그들은 추운 겨울 테코파 온천에 와 작은 동물을 사냥하고 콩과 식물을 채집하며 생활했다.

더운 여름이면 고도가 높은 산에 올라가 사슴과 양을 사냥하고 견과류를 따먹었다. 그들은 계절마다 이동을 해야 했기에 소유한 것이 없었고 가족 단위로 이동했다. 1830년 말 거래상 안토니오 아르미조가 방문했을 때 이곳에는 아메리카 원주민 70명이 살고 있었다.
 
이곳은 1860년대 데스 밸리 일대 광산 배후지역으로 백인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아메리카 원주민 파이우트(Paiute)족 추장 테코파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광산업자 브라운 형제가 1875년 이 땅을 사들여 브라운스빌이라고 이름을 지었고, 그 뒤 다른 광산업자 조너스 오스본이 LA 은행가들의 투자를 받아 이곳을 사들이고 테코파로 바꿨다.
 
한인 여행자도 이곳을 많이 찾는다. 온천 좋아하는 중장년층이 이곳을 거쳐 라스베이거스로 여행한다. 지금은 은퇴한 백인 노인들이 주로 거주한다. 주변에 마땅한 병원이나 식당이 없다. 주유소도 15km는 나가야 있다.

2010년 기준 인구 150명, 겨울철에는 따듯한 기온을 찾아 온 여행자까지 더해 500명쯤으로 늘어난다. 지역언론 <라스베이거스 위클리>는 2015년 10월 1일 '아무것도 없지만 은하수를 포함해 모든 곳을 가지고 있는 지역, 한국인이 고대의 물을 느끼러 오는 곳"이라고 썼다. 일 년 내내 투어버스가 들어온다.
 
딜라이트 온천 리조트. 한국인이 많이 와 한국어 화장실 안내판도 있다. ⓒ 우세린
 
우리 부부는 실내 유료온천 '딜라이트 온천 리조트(Delight's Hot Springs Resort)'에 먼저 갔다. 요일에 따라 요금이 다르지만 1인당 최대 25달러다. 숙박을 하면 온천은 무료다.

조립식 건물 4동에 밀실 온천이 하나씩 있다. 겉은 허름해 보이지만 문을 열자 탕에는 어른 가슴 높이까지 맑고 뜨거운 온천수가 가득하다. 탕마다 샤워장이 딸려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달칵" 문을 잠근다. 그 순간 세상이 은밀하고 야릇해진다. 밀실 온천은 더 '뜨거워진다'.
 
탕에서 나와 야외 의자에 앉아서 헐렁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왼쪽 입술에 피어싱을 한 백인 여성 베른이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마을 노인복지 부서에서 일하는 공무원이라고 소개했다. 낯선 아시아 여행자를 위해 마을을 소개해줬다.
 
"온천에 노란색 승복을 입은 티베트 승려나 일본 사람들이 많이 와. 12월 주말에는 마을 음악 축제가 있고 가까운 차이나 랜치(China Ranch) 마을에 가면 대추야자 나무(Date Palm)에서 수확해 만든 대추빵을 먹을 수 있어."
 
그러고는 가정폭력 지원단체에서 일하는 나에게 "정말 멋진 일을 하고 있네, 내가 존경하는 일이야"라며 "(나는) 라스베이거스에 가도 여성 셰프가 운영하는 스시집을 간다"며 "여성의 힘이 강해야 한다"고 고음으로 수다를 떨었다.
 
차이나 랜치 테이트 팜 앤 베이커리 전경. 강물을 끌어와 야자수를 재배한다. ⓒ 베이커리 페이스북
   
베른이 소개한 마을 차이나 랜치는 온천에서 차로 20분 거리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 나올 법한 암벽을 지나면 '차이나 랜치 데이트 팜 앤 베이커리(China Ranch Date Farm & Bakery)'가 나온다.

대추야자(Date Palm)는 중동과 이집트 지역이 원산지로 아파트 3층 높이 야자수에서 한국 대추 3배만한 갈색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다. 빵집에서 각종 꿀에 절인 대추야자 열매와 대추야자로 만든 빵과 쿠키를 판다. 농장 산책과 작은 박물관도 구경할 수 있다.
 
이곳은 '중국인 농장'(Chinaman's Ranch)이라 불렸다. 데스 밸리 붕사 광산에서 일하던 중국인 이민자가 1850년 이주해 수로를 개발하고 과일과 채소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길러 광산 마을에 팔았다. 하지만 1900년 모리슨이라는 자가 나타나 "여기는 원래 내 땅이었소"라며 총으로 위협해 중국인을 쫓아냈다. 그 뒤 그도 다시 땅을 다시 팔고, 현재 베이커리를 운영하는 가족이 사서 개발했다.
 
외계 행성 같은 수십 개 봉우리 아래 '머드 온천'
 
딜라이트 온천 리조트에서 나와 차를 타고 테코파 핫스프링스 로드 북쪽으로 1.3km를 가면 무료 노천온천인 테코파 머드 배스(Tecopa Mud Baths)가 나온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다. 도로에서는 온천이 보이지 않는데 수초 보호지역 반대편 갓길에 차를 세우고 작은 울타리를 넘어 300보쯤 걸어 들어가면 자연온천이 보인다.
 
테코파 머드 온천 입구. 출입구가 아니라 차단된 것으로 헷갈리기 쉽다. ⓒ 우세린
 
수초가 둘러싼 테코파 머드 온천. 다른 행성에 온 듯한 신비한 느낌을 준다. ⓒ 유순상
   
폭 10m, 길이 50m 갈고리 모양의 진흙 온천이 키 작은 수초가 난 곳을 따라 흐른다. 물은 불투명 잿빛이다. 유황 냄새도 강해 처음 방문한 사람이라면 선뜻 몸을 담그기 주저될 정도다.

주변에 진흙 언덕 여러 개가 고분처럼 봉긋하게 솟아 있다. 그 위를 걸으면 발이 스펀지처럼 폭폭 밟힌다. 외계 행성을 탐사하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든다. 온천은 완전 자연 상태다. 화장실이나 의자가 없다. 나체는 선택이다.
 
이곳 특징은 진흙이다. 온천 바닥에 화산재 성분인 벤토나이트(bentonite) 점토가 깔려 있다. 벤토나이트는 몸 속 중금속과 화학성분을 제거하고, 칼슘과 마그네슘, 철, 칼륨을 제공한다. 알레르기나 피부병, 소화장애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이 물을 마시며 몸을 치료했다고 한다. 온천 수온은 40~42도다. 하류로 가면 온도가 5~6도 이상 떨어진다. 수심은 어른 무릎 높이에서부터 2m로 다양하다. 3, 4월에는 진흙 진드기가 사람을 물 수 있으니 주의하자.
 
테코파 머드 온천에서는 바닥 진흙을 몸에 발라야 제대로 즐기는 것이다. ⓒ 우세린
  
각자의 데스밸리를 건너는 이민자들
 
온천에서 만난 셸포키 가족은 불가리아에서 9년 전 라스베이거스로 이민을 했다고 한다. 남편이 미국 영주권 복권에 당첨돼 어린 딸을 데리고 온 것이다. 가까운 곳에 더 청결한 유료 온천이 있지만 그곳에는 가보지 않았고 이곳에만 10번 정도 왔단다.

영주권 복권은 미 정부가 내전이나 기근지역 국가에 한해 복권식으로 추첨해서 영주권을 주는 제도다.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고 이 문호마저 급속도로 닫히고 있다. 나는 운 좋게 이민 와서 좋겠다며 이민 생활은 어떠냐고 물어봤다. 엄마 셸포키는 가까이 온천욕을 하고 있는 남편을 슬쩍 보고, 망설이더니, 짧게 말한다.
 
"좋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그냥 그래."  

남편은 그저 말없이 듣고 있다. 요거트의 나라 불가리아는 1990년 구소련에 벗어나 시장경제체제로 들어왔지만 자국 정치 분쟁 등으로 여전히 한 달 평균 임금(2015년 기준)이 60만 원밖에 안 돼 해외 이민이 많다. 이른바 '경제난민'이다. 90년대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대거 미국으로 이민을 한 한국의 자화상이다.
 
어디 그뿐인가? 캄보디아인은 1970년대 크메르루즈 군부의 집단학살을 피해 해외로 이민을 선택했고, 아르메니아인은 1800년대 말 터키 정부의 집단학살과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필리핀과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혼란한 자국 정치 때문에 미국으로 꾸준히 오고 있다. 남미 사람들은 미국의 정치 개입 등으로 혼란한 자국 정세 속에 갱 범죄로 시달리며 미 국경을 넘고 있다. 모두들 각자 '데스 밸리'를 건너고 있다.  
 
불가리아에서 이민한 가족이 목욕을 하고 있다. 엄마 셸포키(위쪽)와 아들이다. ⓒ 우세린
 
진흙 언덕에 그린 우리 이름과 하트
 
제임스메디슨 대학 프랭크 A. 보지크 3세(Frank A. Bozich III)는 논문 <원하지 않는 이민자>(The Unwanted Immigrant)에서 1800년대 들어 중국인과 아일랜드인 등 미국 이민자들이 대거 늘었다고 썼다.

특히 미국 남북전쟁 이후 영국인 초기 정착자들이 영국 본토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 주민(Colonist)'에서 '아메리칸(American)'으로 인식이 전환된 뒤 '자문화보호주의'(Nativism)가 더 확산했다고 분석한다. 인종차별도 강해졌다고 주장한다. 그는 논문 결론 부분에서 자조적인 목소리를 냈다.
 
'인종차별이 미국 정체성 일부인가? 미국시민이 되려면 타인종이라는 인식조차 버려야 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자문화중심주의자나 인종차별주의자의 생각을 받아들여야 하나? (중략) 이 질문에 관한 나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우리 부부는 돈이 아닌 꿈과 기회를 좇아 낯선 땅에 몸을 비비며 살고 있다. 언어장벽에 막혀 관공서에서 애를 먹어도, 지나가는 사람이 "너희 나라로 꺼져"라고 위협해도 묵묵히 우리 길을 가고 있다. 분명 한국과 다른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온천을 떠나기 전 우리는 진흙 언덕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랐다. 그 위에 우리의 이름과 하트표를 그렸다. 또 한 번 넘어가면 된다. 저 너머 꽃밭이 없다면 그까짓 것 내가 있는 곳을 꽃밭으로 만들면 된다.
 
온천을 둘러싼 진흙 언덕. 더 멀리에는 거대한 산맥이 둘러싸고 있다. ⓒ 우세린
 

덧붙이는 글 | 세명대 대학원 <단비뉴스>와 브런치 'brunch.co.kr/@name0904'에도 실린다.

태그:#이민, #온천, #테코파, #캘리포니아, #아메리카 원주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LA한인가정상담소에서 가정 폭력 생존자를 돕고 있다. 한국에서는 경기방송에서 기자로 일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독자의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