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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홉 살 둘째 아이는 가끔씩 뜬금없는 말을 한다. 갑자기 내 마음을 '쿵쿵' 거리게 한다. 그날도 그랬다. 시댁 쪽 장례식장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뒷좌석에 세상 편한 자세로 누워있다시피 하던 둘째 아이가 말을 꺼냈다.

"엄마 있잖아."
"응..."
"(갑자기 울먹울먹) 우리 반 남자 애들이, 자기들 크레파스를 안 쓰고 내 걸 쓰겠다고 그러는 거야... 내가 싫다고 그러니까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면서, 안 빌려주면 때릴 거라고 했어."
"응? 아니 왜... 걔들은 준비물 안 챙겨왔대?"
"아냐. 자기 거는 크레파스가 손에 묻는데, 내 건 안 묻는다고."
"그랬구나. 그래도 그렇게 말하는 건 좋은 태도는 아닌 것 같아."
"근데 엄마... 그건 폭력 아냐?"
"응?"


아이는 분명히 "그건 폭력이 아니냐"라고 물었다. 순간 단어 선택이 아이답지 않다고 생각했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세상에 아이답지 않은 말이 어딨어? 애 말대로 폭력이라고 느꼈다면 폭력인 거지' 싶어 "그래... 그건 폭력 맞지, 네 말이 맞다"라고 말해주었다.

'폭력'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봤다. '남을 거칠고 사납게 제압할 때에 쓰는, 주먹이나 발 또는 몽둥이 따위의 수단이나 힘'이라고 돼 있었다. 남자 아이가 원하는 물건을 주지 않자 여자 친구에게 표정과 말투, 그리고 제스처로 힘을 과시했다. 둘째 아이는 그걸 폭력이라고 느꼈다. 그런데 아이가 스스로 폭력적이라고 느끼는 상황에 대해 어떻게 하라고까지는 이야기가 더 나아가지 못했다.

여자 아이들을 키우다보면 이런 상황은 생각보다 많이 일어난다. 나 어릴 때 이런 일이 생기면 어른들은 '너를 좋아해서 그래'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듣고 자랐다.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해줄 수는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혼잣말이 나왔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 심쌤도 딸 둘을 키우시니까 이런 경우를 듣거나, 보셨을 것 같아요. 학교에서 남녀갈등 문제가 크다고 들었는데 심심치 않게 이런 비슷한 일들이 많은 것 같아요.
"네, 맞아요, 초등학교에 다니는 큰 딸이 1학년 때 같은 반 남자아이의 언어폭력 때문에 힘들었던 경험이 있어요. 얼굴을 볼 때마다 '멍청아! 이 바보야!' 계속 놀려대더래요. 학원에 있을 때도 지나가다 따라 들어와 다른 친구들 앞에서 'XXX는 멍청이래요!' 하고 놀려서 많이 속상해 했어요.

처음 한두 번은 아이들끼리의 귀여운 장난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 아이 생각은 달랐어요. 놀림이 지속될수록 수치심이 많이 쌓이고 창피했다고 했어요. 또 놀림을 당하는 입장에서 보건대 상대 아이의 말투나 표정 등은 결코 귀엽거나 가벼운 장난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해요. 오히려 매우 불쾌했다고 말했어요.

두 가지 생각을 했어요. '당사자가 겪은 일과 느낀 감정을 내 생각대로 축소 혹은 확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들어야겠구나!'라는 것과 '내 아이의 말만 듣고 앞뒤 없이 화를 내거나 일방적인 판단을 하지 않도록 신중해야겠다'는 거였어요. 아이 일에는 '내' 감정이 더 쉽게 이입되니까요. 

그런데 이게 꼭 남녀만의 갈등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어요. 여자아이들끼리도 남자아이들끼리도 이런 갈등은 많이 일어나니까요. 또 성별과 관계없이 무리 대 무리로 갈등을 겪기도 하죠. 물론 아이들의 성향과 힘의 차이, 자라온 환경, 사회가 강조해온 성별 역할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의 차이는 있다고 생각해요. 그 '현상' 중 남녀의 갈등이 더 두드러져 보일 수도 있어요.

같은 사람으로서의 공통점보다 남녀라는 성별에 의한 차이에 더 집중하는 사회 분위기라면 '남자라면~~, 여자라면~~'으로 시작해서 '남자니까~~여자니까~'로 구분하면 끝내기가 더 쉽고 편하니까요. 그런 면이 모두 부정적이기만 한 건 아니지만, 복잡한 인간과 인간관계를 단순하게만 보게 되거나 편견을 강화시킨다는 면에서 부작용이 크다고 생각해요."

- 그렇군요. 듣고 보니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일은 사실 남녀가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데도 우리는 때때로 "남자 애들은 원래..."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좀더 많은 것 같아요. 반대로 "여자 애는 그럼 안돼..." 이런 경우도 빈번하고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사회에서 자유롭게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배려와 매너가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성별, 연령, 인종, 학력 등에 상관없이, 기본적으로요. 가정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다른 교육보다 먼저, 중요한 가치로 교육 받아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도 모르게 고정관념과 편견이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요. 예를 들어, 남자아이들은 더 활동적이고 장난이 심하니까 '좀 때릴 수도 있다'든다, 여자아이들은 괜히 드세게 굴다가 '맞을 짓을 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 등이 그래요."

- 저는 이런 태도가 데이트 폭력과도 연결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제가 우리 둘째 아이 입에서 폭력이라는 단어를 듣고 놀랐지만, 조금 안심되는 것도 있었어요. 스스로 어떤 상황이 폭력적인 걸 아는구나 싶어서요. 폭력이 폭력인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가게 되는 경우도 많잖아요. 아직 어리지만, 어릴 때부터 그런 인식을 스스로 했다는 게 좀 반가웠어요.
"실제로 데이트 폭력을 겪은 사람들 중 대부분이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거나 '사랑을 극단적으로 표현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아요. 특히 남성보다 여성이 데이트폭력을 폭력이라고 여기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설문조사(남성 78.2%, 여성 94%) 결과도 있는데요."

- 왜 그렇죠?
"다른 어떤 이유보다 가부장적인 문화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볼 수 있어요. 가부장 문화는 한 집안의 가부장(주로 남성, 아버지)이 절대 권력을 가지면서 가족을 돌보고 권력을 행사하는 문화예요. 아버지의 말이 곧 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육체는 비슷한 어른 같아 보여도 남성인 아버지와 여성인 어머니는 동등한 어른, 사람이 아니었어요.

때문에 남성인 아버지가 여성인 어머니를 때려도 가정을 다스리는 일 중 하나로 여길 뿐 심각한 폭력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죠. 오히려 아내가 남편의 심기를 건드려서, 아내가 내조를 잘 못해서, 아내가 남편의 맘을 몰라줘서, 남편이 아내를 너무 사랑해서 등등의 이유로 남편의 폭력이 이해되고 받아들여졌어요.

안타깝게도 가부장 문화는 아버지 대에서 아들 대로 권력을 이어나가며 유지되었기 때문에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아내, 딸, 여동생, 여성을 대하는 태도 또한 그대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다보니 가부장 문화 속 여성은 남성의 말에 순종하고 보호 받아야 할 존재로 여겨졌고, 가부장 혹은 남성에 의한 강한 통제와 단속 등은 사랑과 관심의 하나로 생각하기 쉬웠어요."

- 대를 이어가는 가부장 문화, 좀 무섭네요.
"그렇죠. 게다가 이 가부장 문화는 가정뿐 아니라 사회/문화/정치/법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골고루 자리 잡아 왔기 때문에 집안에서 여성을 대하는 이런 태도가 사회로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어요. 물론 누군가는 '가부장의 시대는 끝났다'며 시대가 달라졌다고 하지만, 어디 그런가요? 여전히 가부장 문화의 흔적은 많이 남아 있어요. 사랑과 폭력을 혼동하게 만들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법을 제대로 배워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 저는 이미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요! 일단 데이트 폭력이 뭔지부터 짚고 넘어갈까요?
"먼저 데이트 폭력이란. '연인 혹은 부부' 관계에서 이뤄지는 폭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연인 사이에 폭력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데이트 폭력은 실제하는 폭력의 형태 중 하나예요. 심지어 매우 빈번하게요. 과거에는 데이트 폭력을 남녀 혹은 연인간의 사소한 다툼이나 과도한 애정표현 정도로 여겼다면 지금은 엄연한 '범죄'로 보고 있어요.

한 전문기관(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연애 경험이 있는 전국 만 19~59세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94.2%가 '데이트 폭력은 범죄다'라고 응답했어요. 또 91.2%가 '알려지지 않은 데이트 폭력의 사례가 매우 많다고 생각한다'라고 했어요. 그만큼 이제는 사람들이 데이트 폭력에 대해 예민한 관심을 가지게 된 거 같아요. 그만큼 데이트 폭력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구요."
 
- 데이트 폭력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나요?
"가장 흔하게 '언어 폭력'을 들 수 있는데요. 언어 폭력에는 얼굴 표정, 짜증난 목소리, 고함, 악의에 찬 말, 모욕 등이 포함되고 10명 중 8명 정도가 연인 관계에서 여기에 해당하는 폭력을 경험을 했다고 해요. 두 번째로는 정신적 폭력이 있어요. 통제와 간섭, 집착 등이 여기에 속해요. 구체적으로 연인의 스케줄 관리, 친구나 가족과의 만남 통제, 옷차림 강제, 집착 등이 있어요. 또 '너는 나 아니면 누구도 만날 수 없다'는 등의 말을 반복적으로 세뇌시켜 상대방의 생각과 행동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가스라이팅'도 정신적 폭력이에요.

마지막으로 신체적, 성적 폭력이 있어요. 손이나 물건으로 위협하거나 문을 세게 닫아 공포심을 주는 행동 등을 포함하여 꼬집거나, 밀치거나, 세게 잡거나, 뺨을 때리거나, 발로 차거나, 연인 앞에서 자해를 하거나, 심하게 때리는 등의 행동 모두가 신체적 폭력이라고 할 수 있어요.

또 연인 간 성폭력으로는 원하지 않는 성적 행동 요구, 성적 수치심이 드는 말이나 행동, 야한 동영상을 강제로 보게 하기, 노출 사진과 성관계 영상 보내기, 성행동을 하기 위해 때리거나 물건으로 위협하기,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 영상 촬영 강요 등을 들 수 있어요. 이 밖에도 우리가 범주화할 수 없는 많은 종류의 데이트 폭력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어요."

- 폭력의 양태가 정말 다양하네요. 생각하지 못한 것도 있고요.
"그렇죠? 내가 무심코 혹은 사랑과 관심이라고 생각해서 했던 일들이 다른 사람, 특히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폭력과 고통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 같아요. 무엇보다 '통제나 집착'은 데이트 폭력의 시작이 되어 더 큰 폭력이나 살인까지 이어질 수 있어요. 2017년도 경찰청 조사에 따르면 2017년에 검거된 데이트 폭력 가해자가 1만303명이었어요.

그 중 73.3%가 폭행·상해, 그다음이 감금과 협박, 마지막 0.7%가 살인(미수 포함)으로, 이건 한 달에 평균 6명의 사람이 죽거나 죽음 직전까지 갔다는 뜻이에요. 통제나 집착 등의 데이트 폭력 유형이 모두 살인으로 이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럴 위험이 적지 않다는 의미에서 전조 증상이 나타났을 때 엄격한 처벌이 있어야 더 큰 범죄를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통제나 집착'은 데이트 폭력의 시작이 되어 더 큰 폭력이나 살인까지 이어질 수 있다.
 무엇보다 "통제나 집착"은 데이트 폭력의 시작이 되어 더 큰 폭력이나 살인까지 이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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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달에 6명이요? 적은 숫자가 아닌 것 같아요.
"여기서 특히 눈여겨 봐야 할 것은, 평균 6명의 사람은 대부분 '여성'이고 데이트 폭력 대부분의 피해자 역시 대부분 '여성'이라는 점이에요. 물론 데이트 폭력을 행하는 여성 가해자도 있어요. 하지만 안전과 목숨을 위협하는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는 대부분 남성이에요. 물론 세상의 모든 남성이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는 아니에요. 하지만 발생한 데이트 폭력 사례에서 가해자는 대부분 남성이었어요.

그런데 가부장 문화 속에서 세워진 많은 법들은 데이트(성)폭력과 같은 '남성중심범죄'에 대체로 관대한 편이에요. 실제 살인이나 강력범죄가 아닌 이상, 데이트 폭력은 주로 특수상해, 폭행·협박 등의 혐의를 적용받아 2년 이하의 징역이나 집행유예 정도의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는 경향이 많다고 해요. 사람(여성)의 안전과 생명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만큼 성평등한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법규 마련이 시급하다고 생각해요."

- 그런데 청소년기 데이트 폭력의 모습은 조금 다를 것 같아요.
"작년에 만났던 고등학교 1학년 친구 T 이야기를 좀 할게요. T는 남자친구와 백일을 앞두고 이벤트를 준비했어요. '그동안 사귀어 보면서 서로에게 아쉬운 점 혹은 서로 고쳤으면 하는 점'을 이야기 하는 거라고 했어요. T의 취지는 아쉬운 점보다 좋은 점을 이야기하면서 훈훈하게 이벤트를 하는 거였는데, 남자친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거 같아요.

T에 대해 아쉬운 점을 진지하게 말하기 시작한 거죠. 'T는 좋은 사람인데 주변에 남자 친구들이 너무 많다, 특히 T의 친구들이 너무 남자를 밝히는 거 같으니 '건전하고' 좋은 친구들을 만났으면 좋겠다, T도 이제 남자친구도 생겼으니 주변의 남자사람 친구들을 정리하는 게 어떻겠냐'고요."

- 흠... 좀 일반적인 일 같긴 한데 이게 데이트 폭력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뭐죠? 제가 둔한 건가요?
"이런 케이스는 십대 아이들 연애 문제에서 종종 있는 일이에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자 아이들이 가부장제의 문화를 그대로 답습하는 걸 알 수 있어요. 가부장제 문화에서 '잘 배운' 대로 여성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거죠. 그 사랑을 기꺼이 받아주고 자신의 방식을 잘 따라주길 기대하면서요.

실제로 T는 남자친구가 그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를 굉장히 잘 배운, 어른스러운 남자사람처럼 여기는 느낌을 받았대요. 남자 아이들 스스로 여자를 '통제'하는 것을 굉장히 젠틀하고 멋있는 남자로 여긴다는 거죠. 이런 걸 '부드러운 가부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보기에는 여성을 보호하고 아껴주는 듯 사랑하는 듯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남성과 동등한 사람으로 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 그래서 T와 남자친구는 어떻게 됐나요? 헤어졌나요?
"네. 헤어졌어요. 먼저 T의 기분을 물었더니 자신의 인간관계를 맘대로 판단하고 부모님도 안 하는 친구 관리를 하려는 게 기분이 나쁘다고 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자신을 정말 좋아하고 걱정하는 마음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는데 자신이 너무 이해를 못하나?'라는 생각도 든다며 혼란스러워 했어요. 그래서 T에게 정말 좋아하는 마음과 걱정하는 마음이 있다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상대를 바꾸려 하기보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하는 게 먼저인 거 같다고 이야기 했어요.

상대방이 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나를 잃어버릴 만큼 나를 바꾸길 원하거나, 만날 때마다 주눅이 들거나 눈치가 보이게 한다면 좋은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이야기도 했구요. 또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힘든 부분이 있다면 서로의 의견을 묻고 들으며 합의해 나가는 게 맞는 거 같다고 이야기했어요."

- 이별은 누구에게나 아프겠지만, T가 이번 일로 배운 게 많을 것 같네요. 그런데요 심쌤, 이성친구와 문제가 생겼을 때 아이들은 주로 친구들과 문제를 상담하고 풀려는 경향이 있잖아요. 혹시 부모들이 도울 방법 혹은 신경 써서 봐야 할 것들이 있을까요?
"아이들이 이성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해도 사실 부모라고 해서 완벽한 답을 제시할 수는 없어요. 말하지 않을 때는 더 어려운 거 같고요. 사귀고 있는 것 같은데, 잘 사귀고 있는 건지 일일이 확인할 수도 없죠. 그래서도 안 되고요. 그렇기 때문에 평소 아이가 스스로를 사랑하고 타인을 존중할 수 있도록 알려주는 일이 참 중요해요.

인격적인 삶의 태도가 일상에 배어있다면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자신과 타인이 폭력 상황에 노출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확률이 크다고 봐요. 만에 하나 노출되더라도 빨리 알아채고 더 심한 상황으로 가지 않도록 예방할 수 있고요.

또 아이가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 거 같은데 기쁘지 않고 우울해 보여도 '알아서 하겠지' 하고 내버려 둬선 안 돼요. 간섭하라는 말은 아니고요, 자존감이 낮아졌거나 평소보다 지나친 감정의 변화를 보인다면 아이에게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주겠다'는 신호를 보낼 필요가 있어요. 실제로 아이가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고 해도 가능성을 열어두는 건 굉장히 중요해요. 특히 몸에 지속적인 상처나 폭력의 흔적이 보인다면 최대한 아이를 설득해 이야기를 듣고, 부모가 적극적으로 나서거나 재빨리 신고할 수 있어야 해요.

세상에 '원래 그런 것', '당연한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의 성격이나 행동, 어떤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 등을 '원래 그런 거'니까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거나 받아들이라고 강요할 수는 없어요. 그 '원래 그런 거'와 '당연한 것'들이 존재하기 위해 '누군가'는 끊임없이 희생되고 폭력에 노출 되어 왔을지도 몰라요. 그 '누군가'는 우리일 수도 있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어요.

데이트 폭력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해요. 사랑하니까 통제하고 싶고, 화가 나면 좀 때릴 수 있고, 그러다 보면 욱하는 마음에 죽일 수도 있다는 건 결코 당연한 게 아니에요. 사랑하면 상대방을 존중하고 좋아할 만한 행동을 하고,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도록 노력해야 해요. 그런 행동과 노력이 당연하지 않은 나 스스로와 끊임없이 싸워가면서요.

뻔한 말이지만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바라보지 않고 원래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서로를 대한다면, 데이트 폭력 뿐 아니라 많은 부분의 억압과 불평등도 사라지지 않을까요? 참, 마지막으로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 데이트 폭력/가정폭력 긴급상담전화는 1366! 지금까지 여러분의 심쌤이었습니다."

태그:#심에스더, #성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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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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