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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수호조약 체결장소 제물포 화도진에서 1882년 한미수호조약 체결. 현재 인천역 앞. 경상대 박종철교수 제공
▲ 한미수호조약 체결장소 제물포 화도진에서 1882년 한미수호조약 체결. 현재 인천역 앞. 경상대 박종철교수 제공
ⓒ 박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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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수호조약 제1조에 담긴 '거중조정Good office'은 초기 한미관계를 규정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용어다. 이 조항을 통해서 우리는 19세기 말 미국 동아시아정책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조선 입장에서 한미수호조약에 거중조정 조항을 집어넣은 것은 외교적 승리였다. '거중조정'의 핵심 내용은 조선이 다른 나라와 분쟁 시 미국이 중재에 나선다는 것이다.

거중조정 조항을 살펴보면, 체약국 일방과 다른 나라, 곧 제3국 간에 분쟁이 발생하면 "일경조지 필수상조 종중선위조처(一經照知 必須相助 從中善爲調處)"하기로 되어 있다. 즉 서로 알린 후에 선처하도록 중재 내지 거중조정 한다는 것이다. 영문은 다음과 같다. "the other will exert their good offices, on being informed of the case, to bring about an amicable arrangement"이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자동적인 주선 내지 거중조정을 규정하고 있다(김용구, 2004:288).

미국이 무슨 생각으로 거중조정 조항을 한미수호조약에, 그것도 상징적인 제1조에 포함시켰는지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중국이나 일본과 체결한 수호조약에서도 거중조정과 유사한 조항을 포함시켰던 사례를 감안할 때, 이 조항을 19세기 말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과 연관 지어 해석해 볼 수 있다.

미국은 1823년 먼로독트린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을 자국의 영향권으로 설정했다. 다시 말해서, 미주 대륙과 관련해서는 자국의 지역 안보를 우선시하는 일종의 현실주의 정책을 채택한 것이다. 반면, 유럽, 아시아 등 아메리카 대륙의 바깥 지역에서는 불간섭, 중립과 함께 상업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문호개방원칙을 천명한다. 따라서 우리는 거중조정의 의미를 중립과 문호개방이라는 두 가지 미국 대외정책의 핵심코드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이 거중조정을 한미수호조약에 넣은 것은 무슨 커다란 전략적 고려나 거창한 대외정책에 바탕을 둔 것은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대외정책을 수립하지 않는 것이 미국의 대외정책"이라던 키신저(Kissinger 1994:36)의 언급은 비교적 진실에 가까웠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최대 이해관계는 상업적 이익의 확보였다. 이를 위해 상대국으로부터 차별 없는 시장접근을 의미하는 최혜국대우 인정이 미국 동아시아 정책의 가장 큰 목표였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미국은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면서 중국이나 일본과 체결한 수호조약의 전례를 따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조선이 체결한 수호조약은 그 후 한 세기 이상 미국이 동아시아는 물론, 한반도에서 겪게 될 성공과 실패의 전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이 '강한 아시아' 표방한 이유

미국의 상업적 이익은 조약을 맺은 상대 나라와의 상호주의에 근거한다. 이를 위해서는 조약체결국의 법적, 정치적 안정이 필수적이며, 그 선결요건이 바로 체약상대국 주권의 인정이다. 미국이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주권 문제가 유난히 부각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영국의 아시아 정책이 아시아의 분할을 추구하는 소위 '아시아 약화weak Asia' 정책이었다면, 미국의 그것은 아시아 나라들의 독립을 유지하고 강화시키는 '강한 아시아strong Asia' 정책에 기반했다(Dennett, 1922). 미국의 '강한 아시아' 정책은 세력권 확보에 주력하던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 서구 열강은 물론, 오래 지나지 않아 제국주의로 돌변할 일본의 이익과도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강한 아시아'를 표방한 이유는 미국이 특별히 박애주의적이거나 이타적이었다기보다 이것이 미국의 상업적 이익실현에 가장 잘 부합했기 때문이라는 게 데넷 교수의 첨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 제국주의 침략 앞에서 힘겨워 하던 아시아 국가들에게 미국의 '강한 아시아' 정책이 큰 의지가 된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거중조정' 또한 미국의 '강한 아시아' 정책에 입각했다. 하지만 거중조정의 효력을 놓고서는 미국과 조선 사이에는 애초부터 생각이 많이 달랐다. 한미 간에는 물론, 미 국무부와 미국 현지의 조선 외교관들 사이에서 거중조정 조항의 해석을 놓고 상당한 파열음이 있었다.

미국은 거중조정을 조선의 독립과 영토적 통일성에 대한 도덕적, 외교적 지원으로 이해했다. 다시 말해서, 조선의 대외적 독립을 미국의 군사개입이나 강제력을 동원해서 보호하는 대외적 공약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조선은, 외부세력이 조선을 침공하거나 분쟁을 유발했을 때 조선의 영토적 통일성과 정치적 독립을 보장하기 위한 조처를 미국이 반드시 취해야한다는 구속력 있는 공약으로 간주했다(Lee, 1999:18).

최초의 거중조정은 청일전쟁 때 발생했다. 일본은 청나라의 공동철병 요구를 거부했다. 한반도에는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일촉즉발의 위기가 감돌았다. 미 국무부의 거중조정은 청일전쟁이 임박했다는 씰 미국 공사의 긴급보고와 함께 이승수 주미공사의 개입 호소를 받아들음으로써 취해졌다. 씰 공사는 선교사 등 조선 내 미국 거주민들의 신변안전을 위해서 군함 파견을 본국정부에 요청했다. 그레셤 국무장관은 씰 공사의 요청을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보고한 후 최신예 순양함 볼티모어 호를 제물포로 긴급 파견했다.

이승수 공사는 국무성을 방문해 한반도 사태의 긴급성을 알리며 한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에 따라 미국의 개입을 요청했다. 이에 그레셤 국무장관은 서울의 씰 공사에게 '조선의 평화유지를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하라'는 훈령을 보냈다. 이승수 공사가 다시 국무성을 찾아가서 난국수습을 위한 열강회의의 필요성을 강조하자, 그레셤 국무장관은 다음 날, 주일 던 공사에게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파병한 이유와 요구조건이 무엇인지를 일본정부에 문의하라'고 지시했다(최문형, 2001:117).

그레셤 장관의 이러한 조치는 '거중조정' 조항을 이행하는 데 있어서 조약상의 의무를 다한 것이며 조선정부에 대해서도 나름 성의를 보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청나라의 패배로 인한 동아시아에서의 세력균형 변화를 우려한 주청영국공사가, 청일전쟁에 대한 열강의 간섭조치를 미국이 주동해서 발의할 것을 제안했으나 미국은 중립의무를 들어 거부했다(Dennett, 1963:496).

그리고는 일본정부에게 미국의 외교적 입장을 전달하는 것 외에는 별도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아니, 취할 수 없었다고 보는 게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 이상의 조처는 미국의 불간섭, 중립방침에 정면으로 배치됐기 때문이다. 미국의 거중조정은 청나라와 일본 사이의 전쟁을 방지하지는 못했다. 조선정부의 기대와 달리 미국은, 거중조정을 강제력 있는 개입으로 이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중조정에 대한 두 가지 해석

청나라와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에도 미국은 청나라의 거중조정 요청을 접수했다. 미국은 프랑스에게 거중조정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프랑스의 대답은 당연히 '노'였다. 미국은 청나라에게 거중조정은 분쟁 당사국들의 동의 없이는 적용불가하다고 답했다. 미국은 조선정부의 거중조정 요청에 있어서도 청불전쟁 사례를 그대로 적용했다.

조선정부가 미국의 거중조정에 환상을 보인 것은 씰 공사 등 미국 외교관들과 당시 서울에 거주하던 알렌을 포함한 미국계 거주민들의 항의도 크게 한몫했다. 씰 공사와 미국 선교사들은 한반도에 드리워진 전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요청했다. 미 국무부의 공식해석과 달리, 이들은 거중조정을 일종의 군사적 개입조치로 확대해석했다. 거중조정을 군사적 조치로 이해하지 않으면 유명무실할 수밖에 없다는 게 이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이러한 항의에 대해 미 국무부는 조선 내 정치현안에 대한 개입은 미국 공사의 직무범위를 벗어난 것이라고 비판했다. 미국은 조선의 처지를 동정하고 조선의 주권이 존중되기를 희망하지만 엄정 중립을 지켜야하기 때문에 우호적 방법으로만 일본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레셤 국무장관은 거중조정은 군사적 개입과 동일하지 않으며 분쟁국 모두 거중조정을 수용할 때만 효력이 발생함을 재차 확인했다.

엄정중립 요청을 씰 공사가 받아들이지 않자, 미 국무부는 씰 공사를 전문 외교관이 아닌 선교사 신분의 알렌으로 교체했다. 새로운 공사 임명이 대통령의 고유권한 임을 감안할 때 차기 대통령 취임식 직전 취해진 씰 공사의 교체는 당시로는 대단히 이례적인 문책성 인사로 여겨졌다. 거중조정과 같은 대외정책를 놓고 미 국무부의 공식입장과 서울에 거주하던 미국인들 사이의 불협화음은 러일전쟁 직전 알렌 공사와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논쟁을 통해 터져 나왔다. 그리고 해방 직후에는 신탁통치 문제를 놓고 하지 군정사령관과 미 국무부 일부 인사의 논쟁을 통해 그대로 반복될 예정이었다.

정치현상, 그 가운데 특히 국제정치는 상대성이론이 작동하는 영역이다. 미국과 유럽 열강들 모두 차별 없는 시장접근, 최혜국대우를 요구하며 동아시아로 쇄도했다. 당시만 해도 미국과 유럽 모두 동아시아에서의 상업적 이익 추구가 최대 목적이었다. 미국에 대한 엄청난 환상을 심어주긴 했지만, 거중조정과 같은 정책의 차이가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과 유럽 사이에 중대한 정치적 입지의 차이를 낳았다. 조만간 등장할 '문호개방정책'은 이런 측면에서 '강한 아시아'를 표방한 미국 동아시아 정책의 결정판이었다.

 ■ 참고문헌

김용구. 2004. 『세계외교사』. 서울대학교출판부.
신기석. 1983. 『동양외교사』. 탐구당.
최문형. 2001. 『한국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지식산업사.
Dennett, T. 1922. "American Good Office in Asia." American Journal of International Law. Vol. 16. No.1.
-------------. 1963. Americans in Eastern Asia: A Critical Study of the Policy of the United States with Reference to China, Japan and Korea in the 19th century. New York: Barnes & Noble
Dowart, J. M. 1975. "The Independence Minister: John M. B. Sill and the Struggle against Japanese Expansion in Korea, 1894~1897." Pacific Historical Review. 44(Nov.).
Kissinger, H. 1994. Diplomacy. New York: Simon & Schuster.
Lee, Yur-Bok. 1999. "A Korean View of Korean-American Relations." in Yur-Bok Lee and Wayne Patterson (ed.s). Korean-American Relations, 1866-1997.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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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 정치이론, 한국정치, 국제관계, 한미관계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