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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남긴 메시지는 좀 뜻밖입니다. 종묘사직이 어떻고, 성군의 길은 어떻고 그런 엄숙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동부승지(지금의 비서실장) 정이한(鄭而漢)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세종실록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인과 야인을 대하는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오랫동안 평안에 빠져 있다가 혹 해이해지지 않을까 심히 걱정되는 바이다.
언제나 하루와 같이 정신을 바짝 차려
조금이라도 해이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곧 예조와 병조의 해당 관리들에게 이를 단단히 이르라고 명하였다.

"接待倭、野人, 所係匪輕, 忸於平安, 歲久日深, 凡事恐或至於緩弛, 當謹愼常如一日, 毋或少弛。" 卽命禮兵曹, 當該官戒飭之。- 세종 32년(1450) 2월 14일

일본인과 이방인(야인)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 태평세월의 안일에 젖어 방심한 채 지내다가는 큰일 날 수 있다, 부디 명심하라. 이러한 신신당부가 세종의 마지막 목소리였습니다. 마치 불길한 미래를 내다본 듯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후손들은 세종이 남긴 유언의 의미를 새기지 못했습니다. 세종의 걱정은 현실이 됐습니다. 사후 150년이 지나 나라는 왜란으로 초토화됐고 그로부터 다시 300여 년 후에는 아예 나라를 그들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세종의 지리적 시야가 매우 넓었다는 점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과 유구국, 북방 야인들이 자주 조선을 찾아와 조공을 바치기도 하고 물건을 교환하기도 했습니다. 고려 말에 들어온 중앙아시아계, 터키계 회회족(이슬람)들의 후손들이 조선 땅에 들어와 집단을 이루어 살았습니다.

조선 초에는 그들의 대표가 궁중의식에도 참석했습니다. 한-이슬람 교류사를 연구한 이희수 교수에 의하면, 회회인(이슬람교도)들이 신년 하례, 세자 책봉 등 중요 행사에 참석했으며 세종은 그들이 코란을 낭송하는 것을 들었다고 합니다.

세종은 중세 문명의 쌍벽을 이루고 있던 중화문명과 이슬람 문명을 편견없이 수용했습니다. 세종은 또한 국가 경영은 유교로서 했지만 내면적인 신앙은 불교에 의지했습니다. 세종이 늘 학문을 물었던 측신 설순(偰循: 시강관, 안동 현감, 집현전 부제학 등 역임)은 위구르족 출신이었습니다. 그것이 궁금하고 신기했던지 세종이 설순에게 가족의 내력을 묻는 장면이 실록에 나옵니다.

무엇보다도 세종이 만 5세일 때(태종 2년)에 아프리카와 유럽을 담은 세계지도인 강리도(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만들어졌습니다. 세종이 강리도를 보지 않았을 가능성은 거의 전무합니다. 세종은 세계지도를 보고 있었고 성군이기에 앞서 세계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종의 세계적 안목과 혼종적 포용력이 한글 창제, 지리지 편찬, 과학기구 제작을 비롯한 위대한 업적을 낳는데 밑거름이 되었을 것입니다. 유언이 시사하듯이 세종의 시선은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나라 밖을 향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도자의 덕목에서 시야의 광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안타깝게도 16세기부터 우리의 세계상은 점점 축소되고 일본의 세계상은 점점 확장됩니다. 그 변곡점이 16세기 말 임진왜란 즈음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다음 두 지도를 비교해 봅니다.

도요토미가 들고 다니던 부채의 의미
  
 16세기 중기에 제작된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混一歷代國都疆理地圖)
 16세기 중기에 제작된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混一歷代國都疆理地圖)
ⓒ 고려대 인촌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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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데요시의 부채 지도. 조선 침략의 야욕이 드러나 있다.
 히데요시의 부채 지도. 조선 침략의 야욕이 드러나 있다.
ⓒ 오사카성 천수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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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지도는 16세기 중기 이후의 우리의 세계상으로, 보다시피 정교하고 아름답습니다. 지도 이름은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混一歷代國都疆理地圖)로 강리도, 즉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와 흡사합니다. 그러나 세계상은 전혀 다릅니다. 1402년의 강리도에 담겼던 중동, 유럽, 아프리카가 사라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마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저 아래 작은 원안에 '일본'이라고 적혀 있을 뿐입니다.

세종이 소홀히 하지 말라는 일본이 완전히 무시됐습니다. 16세기에 우리는 세종의 말씀처럼 평안의 타성에 젖어 일본을 비롯한 나라 밖의 세상을 시야에서 놓쳐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일본은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이런 물음은 중요합니다. 국가간의 흥망사에서 어느 쪽의 지리적 시선이 먼저 상대를 포착하느냐는 누가 누구에게 먹히느냐로 귀결되는 사례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지도를 살펴 봅니다. 두번째 지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휴대했던 부채에 그려져 있던 것이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히데요시는 늘 이 지도를 보면서 조선반도를 넘어 중국 대륙을 넘보고 있었습니다. 조선반도에 서울(京), 중국에 북경과 남경이 강조돼 있습니다. 부산 아래 바다에 나타나 있는 굉장히 큰 섬이 대마도입니다. 그 바로 아래에 놓인 섬이 이키도(壱岐島)입니다. 그 아래가 규슈 지역입니다.

이를 강리도와 대조해 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강리도에 표기된 대마도와 이키도
 강리도에 표기된 대마도와 이키도
ⓒ 류고쿠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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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시피 강리도에서 대마도는 조선반도에 바짝 붙어 있고 이키도는 일본 쪽에 근접해 있습니다. 대마도는 우리 땅이고 이키도는 일본 땅이라는 뜻입니다.

한편, 히데요시의 부채 지도를 보면 대마도와 이키도의 크기가 과장돼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왜일까요? 규수쪽에서 이키도와 쓰시마를 발판 삼아 조선을 공격하겠다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는 것입니다(출처: Ron P. Toby, 2019 <Engaging the Other: 'Japan' and Its Alter-Egos, 1550~1850>).

일본은 조선침략의 야욕과 함께 16세기 말부터 상어처럼 왕성한 식욕으로 지리지식을 섭취합니다. 첫째, 일본의 소년 사절단이 16세기 말경에 유럽에서 돌아오면서 지도를 가지고 옵니다. 둘째, 유럽의 지도 전문가들이 일본에 건너와서 활동함으로써 일본 지도가 유럽에 전해지고 유럽에서 만든 최신 지도가 일본에 전해집니다.
  
 오르텔리우스(Ortelius)의 일본 지도. 한반도가 섬으로 그려져 있다.
 오르텔리우스(Ortelius)의 일본 지도. 한반도가 섬으로 그려져 있다.
ⓒ Swa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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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포르투갈의 지도제작가 이나시오 모레이라(Inacio Moreira)가 1590년~1592년 일본에 머물면서 지도를 제작했습니다. 그는 1591년 2월 교토를 방문해 히데요시를 만났고 그가 만든 일본 지도는 중요한 지리정보 자료가 됐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근대적 일본 지도는 예수회의  테이세이라(Luis Teixeira, 1564~1604)신부가 만든 것으로 임진왜란이 발생한 1592년에 완성됐습니다. 이 지도는 당대 유럽 최고의 지도명인 아브라함 오르텔리우스(Abraham Ortelius, 1527 ~ 1598, 플랑드르)에게 전해져 'Iaponiae Insulae Descriptio'(일본열도묘사, 위의 지도)라는 이름으로 세계지도에 수록됐습니다.

다시 그 세계지도가 일본에 전해집니다. 일본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 축적된 지리정보를 종합해 병풍에 세계지도를 그립니다(출처: Rupert Cox, <The Culture of Copying in Japan: Critical and Historical Perspectives>).

16세기 이전까지 지리적 시야에 있어서 조선보다 한참 뒤떨어져 있던 일본이 16세기 말부터 조선을 따돌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한 추세는 계속 이어졌고, 20세기 초에 이르러 우리는 일제에 강점당하고 말았습니다. 분단도 거기에서 유래됐다는 시각 또한 있습니다. 지리적 시야의 넓고 좁음이 이처럼 국가 민족의 흥망을 좌우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의 현재에 대해 묻게 합니다. 지금 우리의 지리적 시야는 어떠한가? 한반도에서도 분단선 아래에 갇혀 있지는 않는가?

시야가 닫힌 조선이 임진·정유왜란으로 초토화됐을 때 남녀노소 불문하고 조선의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붙들려 갔습니다. 그 가운데 도공들이 있습니다. 왜장에게 끌려간 도공들은 규슈 지역에서 도자기촌을 이루어 생존을 이어가면서 세계적인 명품 도자기를 만듭니다.

사쓰마의 조선 도공들

지금 '사쓰마(Satsma)'라 불리는 세계적 브랜드는 바로 조선 도공들이 집거했던 규수 지방의 지명 사쓰마(薩摩)에서 유래됐습니다. 그곳의 존재에 대해 한국인은 모르고 있을 때, 최초로 방문한 서양인이 있었습니다. 동경 주재 영국 외교관 사토우(Sir Ernest Mason Satow, 1843~1926)였습니다.

그는 1877년 2월 두 차례 사쓰마 도예마을을 탐방했습니다. 그는 탐방기를 일기에 적었고 나아가 이듬해 2월 23일 소논문 <사쓰마의 조선 도공들>(The Corean Potters in Satsuma)을 왕립일본학회에서 발표했습니다. 논문 내용을 일부 발췌해 소개하며 글을 이만 마치겠습니다.
 
"조선은 옛날 한 때 현재보다 훨씬 높은 문화를 누렸던 것 같다. 그렇게 볼 근거는 많다. 그러나 지금 조선인들의 문화 생활은 이웃나라들에 훨씬 뒤떨어져 있다. 이게 그리 놀랄 일이 아닌 것이, 조선은 16세기 말에 일본군의 침략으로 반도가 초토화되다시피 했기 때문이고, 또 중화 문명권에서 그런 재난으로부터 회복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세기 전만 해도 일본인이 배운 대상은 바로 조선이었다.

조선인들은 5세기 전에 몹시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고 있었다. 때문에 그 당시 일본인들은 어떤 대가와 어려움을 치르고서라도 조선 도자의 기술과 비법을 얻으려 했다. 500년의 전통을 지닌 조선 백자의 뛰어난 아름다움을 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시 조선 도공들은 모방할 가치가 있는 기술 수준을 지녔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비법은 어떤 비용과 고통을 무릅쓰고서라도 얻을 만한 가치가 있었음을 금방 인정할 것이다."

 
"사쓰마 지역에는 완전히 조선도공 일가들만 사는 마을이 하나 있다. 많은 조선인들이 1603년 말에 나에시로가와 즉 쓰보야에 모여들었다. 이 마을은 이치쿠에서 가고시마로 가는 한 길에 있다. 이 마을에서 가고시마까지는 약 12마일 거리이다. 그들은 모두 17개 성씨의 가족들이다. 

1624년부터 1644년 사이에 보키 테이요우(僕太陽?) 라는 사람이 가세다(笠田)에서 하얀 모래를, 이부스키(指宿)에서 하얀 도토를 발견했다. 이때부터 유럽 애호가들을 경탄시킨 백색 사쓰마 도자기(히비키데라 불린다)가 나오기 시작했다."

 
"도공들은 분업의 원리를 철저하게 숙지하고 있고 그에 따라 작업을 진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은 오로지 차 주전자의 몸통만 만드는데 하루에 약 150개를 만들 수 있다. 다른 사람은 뚜껑을, 또 다른 사람은 주둥이를 또 다른 사람은 손잡이를 삽입하는 돌출부 즉 귀를 맡는다. 마지막 사람은 이 부분들을 조합하는 일을 한다. 일반적으로 한 가족의 구성원이 협업을 하면서 일종의 협동조합 같은 것을 형성한다. 가마는 이런 가족들이 공동 소유한다."
"니시키데(錦手: 고급도자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 차례 구어야 한다. 맨 먼저 수야끼(素焼)를 한 뒤 유약을 입힌다. 그 다음 혼야키(本焼)를 한 후 채색을 하고 도금을 입힌다. 세 번째로는 천천히 은근하게 구워 색조를 향상시킨다. 이 세 차례 굽기에 걸리는 시간은 각각 24시간, 48시간 그리고 10시간이다. 마지막 굽는 과정에서는 도공이 가마 꼭대기 근처의 구멍을 통해 온도를 수시로 점검한다. 열이 올라가면서 점차로 원하는 색조가 나오게 된다.
"심수관 도요에서 나는 백토로 만든 여러 부류의 모델을 보았다. 구워서 유약을 바르면 자기는 엷은 크림색을 띠었다. 그렇게 해서 유명한 사쓰마 자기가 되는데 차차 도금이 입혀지고 채색으로 장식된다. 이곳 도공들이 가지고 있는 평범한 옛 도자기는 두 개 뿐이었다. 그 하나는 teuji-buro(丁子風爐) 이고 다른 하나는 쬐그만  애완용 강아지와 놀고 있는 어린이의 형상이었다. teuji-buro(丁子風爐)는 화로와 그 위 놓인 그릇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용품이다. 원래는 정향유를 추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은 단지 장식품일 뿐이다.

두 명의 도공이 백토로 관음보살상과 부처상을 만들고 있었다. 전형적인 불상의 얼굴과 의상이었고 발가락은 모두 같은 길이였다. 세 번째 도공은 고양이 자세로 앉아 있는 호랑이를 만들고 있었다. 15년전에는 이 마을에서 베코-야키(鼈甲燎)라고 하는 도기가 만들어졌는데 거북 등껍질에서 색깔을 본 땄다. 평범한 도기로서 대량으로 나가사키에 수출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3년 전까지만 해도 상투를 틀었는데 이제는 대부분이 머리를 일본식으로 따거나 외국 스타일로 자른다. 예전엔 특별한 경우에 전통 의복을 입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사쓰마 번주가 에도 가는 길에 마을을 통과할 때면 그들이 조선옷을 입고 나아가 인사를 했다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아직도 조선어를 알고 있다. 그들의 임무는 조선인 표류자와 일본 관리를 통역하는 것이다. 그들이 지금 다니는 사원의 이름은 옥산궁(玉山宮, 예전에 단군을 모셨음 - 기자 말)이다. 사원 입구에 푸른 무늬가 있는 한 쌍의 하얀 도자기 등(lantern)이 서 있다. 이 등은 마을 주민 17성씨 중에 16성씨가 사원에 기증한 것인데 등 받침대에서 그들의 이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출처: CHRISTOPHER DRESSER, <JAPAN, ITS ARCHITECTURE, ART, AND ART MANUFACTURES> (Routledge 출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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