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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내와 함께 로마의 고도(古都), 스플리트(Split) 구시가 안으로 깊숙히 들어갔다. 걷다보니, 도시의 주민들과 여행자들이 모두 몰려드는 것 같은 광장을 자연스럽게 만났다. 그곳은 과거 로마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Diocletian's Palace)의 안뜰로서 궁전의 중심부였던 페리스틸(peristyle) 광장. 이 광장은 현재도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구시가의 중심부가 되어있었다.

페리스틸, 혹은 페리스틸륨(peristylium)이라고 불리는 열주랑(列柱廊)은 여러 개의 기둥으로 둘러싸인, 로마 주택 뒷쪽의 안뜰을 말한다. 현재는 이 페리스틸 광장을 중심으로 스플리트의 로마 유적지들이 산재해 있어서, 페리스틸 광장은 로마유적을 답사하는 이들에게 이정표 구실을 하고 있다.
 
웅장한 대리석 기둥들이 도열하여 로마의 옛 운치를 살려준다.
▲ 페리스틸 광장. 웅장한 대리석 기둥들이 도열하여 로마의 옛 운치를 살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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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스틸 광장에 들어서자 갑자기 탁 트인 공간이 시원스럽게 나타났다. 광장을 둘러싼 웅장한 대리석 기둥들이 도열하듯이 서서 로마의 옛 운치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동서방향으로 총 12개의 기둥과 남쪽의 기둥 4개, 총 16개의 대리석 기둥이 늘어서서 반원형 아치를 우아하게 떠받치고 있었다.

페리스틸 광장은 황제의 알현실인 베스티뷸(Vestibul), 성 도미니우스 대성당(Katedrala Sv. Duje), 노천카페 룩소르(LVXOR)로 둘러싸인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광장의 정면에 서서 보니 삼각 지붕 모양의 구조물은 바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황제의 주거지로 들어가는 현관의 문이었다. 그리고 그 현관문 아래에는 지하궁전으로 내려가는 통로가 들여다보였다.
 
로마시대 군인들로 분장한 연기자들이 나와서 이벤트를 펼친다.
▲ 로마 병정. 로마시대 군인들로 분장한 연기자들이 나와서 이벤트를 펼친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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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페리스틸 광장은 로마제국 당시 행사나 회의 등을 주재한 장소이다. 지금도 이 광장은 흡사 로마제국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세트장같이 전형적인 로마시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간혹 이 광장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로마시대 군인들로 분장한 연기자들이 나와서 이벤트를 펼치기도 한다. 내가 광장을 방문한 시간에도 투구를 쓴 로마 병정 2명이 로마시대인양 광장 안을 활보하고 있었다.

아이보리색 석재들로 둘러싸인 광장의 한켠을 보니 유독 시커먼 색상의 한 조각상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이집트의 스핑크스상이었다. 크로아티아의 로마 유적지에 갑자기 웬 스핑크스상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스핑크스들은 장식용으로 복제한 건가?"
"아니, 실제로 로마인들이 이집트 원정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가져온 스핑크스 상들이야. 당시 이집트를 지배했던 로마 군인들이 스핑크스를 좋아했던 자신들의 황제를 위해서 가져다 놓은 거지. 외국의 희귀동물을 잡아와 왕에게 진상하듯이 스핑크스를 가져온 거야. 이 스핑크스들은 모두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을 장식하는 데에 사용되었어."

 
로마인들이 이집트 원정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서 가져온 스핑크스 상이다.
▲ 스핑크스 상. 로마인들이 이집트 원정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서 가져온 스핑크스 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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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역사가 지났는데도 이 스핑크스는 코 외에는 비교적 온전한데?"
"페리스틸 광장의 스핑크스는 온전한 편이지. 그런데 당시 가져온 이집트의 스핑크스가 모두 12기나 되는데, 그중 스핑크스 10기는 이교도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머리가 댕강 잘려나갔어."


나는 페리스틸 광장의 남쪽으로 더 걸어가 보았다. 황제의 알현실인 베스티뷸(Vestibul)이 광장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 황제의 알현실은 열주광장의 남쪽에서 계단 위로 올라오면 마주치게 되는 공간이다. 이 곳은 원래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에서 황제의 주거공간으로 들어가는 현관 역할을 하던 곳이다.

뜻밖이라는 느낌이 들게 되는 넓고 둥근 공간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다. 이 황제의 알현실은 잠시 고개를 들어서 멍하니 위를 바라보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다. 벽돌로 둘러싸여 올라간 건축물이지만 천장에 크고 동그란 구멍이 뚫려있기 때문이다.
 
뜻밖의 이 공간은 천장에 크고 동그란 구멍이 뚫려있다.
▲ 황제의 알현실. 뜻밖의 이 공간은 천장에 크고 동그란 구멍이 뚫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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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에 크게 뚫린 구멍에는 원래 구멍 크기만한, 천장을 덮는 반원형의 쿠폴라가 얹혀 있었다. 그리고 그 쿠폴라 내부에는 로마시대의 아름다운 모자이크 장식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쿠폴라도 모자이크도 모두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장식은 다 사라지고 건물의 골격만이 남은 모습이 왠지 더 처연하게 아름다웠다.

알현실의 동그란 벽면 곳곳에는 움푹하게 뚫린 공간인 벽감(壁龕) 여러 개가 눈에 띈다. 원래 벽감은 조각이나 장식품을 놓는 공간인데, 이 벽감 안에도 원래는 로마 신들의 생동감 넘치는 조각상들이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로마에서 공인된 이후 이 로마의 신들도 모두 안타깝게 사라져 버렸다.

이 알현실 공간에서는 가끔 '클라파(Klapa)'라고 하는 남성만으로 이루어진, 크로아티아 전통 아카펠라 그룹이 노래를 부른다. '클라파'는 크로아티아의 달마티아 지방에서 불려지는 전통적인 아카펠라 음악으로서, 유네스코의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유서 깊은 음악이다.

교회음악에서 시작되었다는 '클라파'는 친구들의 그룹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들의 아카펠라는 나라와 바다, 그리고 사랑과 포도주를 칭송하고 있었다. 남성 8명이 부르는 노래의 조화와 반복되는 멜로디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크로아티아의 달마티아 지방에서 불려지는 전통적인 아카펠라 음악이다.
▲ 클라파 공연. 크로아티아의 달마티아 지방에서 불려지는 전통적인 아카펠라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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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인들의 큰 덩치답게 이들의 엄청난 성량은 황제의 알현실을 웅장하게 울린다. 노래가 진행되자 길가던 여행자들은 모두 멈춰 서서 노래를 듣는다. 천장이 뚫린 넓은 돔의 광장 한가운데에서 시작된 클라파는 돔의 천장을 울리면서 소리가 더 아름답게 반사되었다. 정말이지, 이곳은 아카펠라를 하기에 완벽한 장소였다.

이 클라파 공연단은 아카펠라 공연이 끝나자 노래가 담긴 CD와 USB를 팔기 시작했다. 요새같이 핸드폰에 음악을 파일로 저장해서 듣는 세상에 웬 CD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예상외로 유럽의 관광객들은 이들의 CD를 많이 사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의 웅장한 음성, 로마유적에서의 울림에 매료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황제 알현실에서의 아카펠라 공연이 끝나자 여행객들은 자신들의 갈길을 찾아 흩어졌다. 로마유적을 더 답사하기로 한 나는 스플리트 곳곳에 흩어져 있다는, 머리 잘린 스핑크스들을 찾아다니기로 했다. 나는 수수께끼를 풀듯이 목잘린 스핑크스를 찾아나섰다.

지도 앱을 보니, 페리스틸 광장에서 골목길을 따라 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로마시대의 유적인 주피터 신전(Temple of Jupiter, Baptistery of St. John)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로마시대의 대표유적이니, 아마도 그 앞에 스핑크스 한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있을 것 같았다.
 
로마의 황제가 로마 신화의 주피터를 모시기 위해 세웠던 신전이다.
▲ 주피터 신전. 로마의 황제가 로마 신화의 주피터를 모시기 위해 세웠던 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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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는 것 같이 보이던 주피터 신전은 페리스틸 광장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 주피터 신전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로마 신화에 나오는 주피터를 모시기 위해 세웠던 신전이다. 당시에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던 이 로마의 황제는 자신과 주피터를 동일시하였다고 한다.

"여기, 신전 앞에 스핑크스 한 마리가 앉아 있어"
"역시, 이교도의 조각상이라는 이유로 머리는 처참하게 잘려나갔네. 스핑크스가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는지 스핑크스의 앞발도 잘라버렸어. 스핑크스를 완전히 파괴해서 버릴 수도 있는데 얼굴과 발만 잘라버렸네. 목 잘린 모습으로 놔 둔 것은 아마도 다른 종교는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시위일거야."

  
목 잘린 스핑크스 한 마리와 관리인 할아버지가 앉아 있다.
▲ 신전 입구. 목 잘린 스핑크스 한 마리와 관리인 할아버지가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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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핑크스 옆, 신전 입구에는 여행객들의 스플리트 사진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유명한 할아버지 한분이 앉아계셨다. 신전 입장료를 받는 관리인 할아버지인데, 앉은 위치가 신전 입구 계단 앞이어서 신전 사진에는 이 할아버지가 안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나도 신전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기를 꺼내들었다. 사진 안에 잡힌 할아버지는 익숙한 듯 약간 겸연쩍게 웃었다.

신전 건축물의 외관은 로마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남기고 있었다. 나는 신전 내부로 천천히 들어가 보았다. 신전 내부는 탄탄하고 딱 맞아떨어지는 장방형 석재로 빈틈없이 쌓여 있었다. 신전 안에는 입구를 통해서만 햇빛이 들어올 뿐, 온통 신비한 어두움 속에 있었다.
 
신비함 속의 신전 내부는 로마시대와 중세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남기고 있다.
▲ 신전 내부. 신비함 속의 신전 내부는 로마시대와 중세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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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의 천장은 둥근 원통모양의 궁륭(穹窿)에 격자모양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 이러한 아치형 천장은 이 신전에 남은 로마식 건축의 훌륭한 유산이다. 로마시대에는 신전의 중앙, 신상(神像) 안치소에도 주피터의 석상이 늠름하게 서 있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다른 종교의 흔적이 이어지고 있었다.

로마의 이 주피터 신전은 중세 초기부터 기독교의 세례당으로 이용되었다. 그래서 현재는 신전 안쪽에 세례자 요한상이 서 있고, 신전 중앙에는 십자가 모양의 큰 석제 구조물이 자리를 잡고 있다.
 
아드리아해 연안에서는 얼마 남아있지 않은 매우 귀한 조각상이다.
▲ 크로아티아왕 조각상. 아드리아해 연안에서는 얼마 남아있지 않은 매우 귀한 조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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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반(洗禮盤)을 넣어 두었던 이 석조물의 전면에는 화려한 로마식 장식과는 거리가 먼, 고졸한 석제조각이 눈길을 끈다. 십자가를 쥐고 있는 중세 크로아티아 왕을 묘사한 조각상이다.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아드리아해 연안에서는 얼마 남아있지 않은 매우 귀한 조각품이다. 하지만 마치 어린이가 그린 듯한 왕의 익살스러운 모습에 자꾸 웃음이 나왔다.
 
신을 모시던 곳에서 돈을 바치고 소원을 빈 사람들의 흔적이다.
▲ 석조물 안에 모인 돈. 신을 모시던 곳에서 돈을 바치고 소원을 빈 사람들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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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십자가 석조물의 안을 들여다보니 놀랍게도 여러나라의 지폐와 동전이 가득 떨어져 있었다. 동전들은 황금처럼 빛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우리나라의 천원짜리 지폐도 간간이 떨어져 있다. 로마와 기독교의 신을 모시던 종교적인 신비 속에서, 돈을 바치고 소원을 빈 사람들의 흔적들이다.

주피터 신전의 어둠 속으로는 한줄기 햇살만이 계속 스며들고 있었다. 아마도 로마인들은 이 한줄기 빛이 옮겨가면서 주피터 신상을 비추도록 신전을 설계했을 것이다.

지금은 신도 없이 텅빈 공간이 오히려 더 신비하게 다가온다. 신들의 신비한 공간에 서서, 나는 나의 삶을 되돌아 보았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기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체코, 슬로바키아 여행기를 게재하고자 합니다.


태그:#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여행, #스플리트, #스플리트여행,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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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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