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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우데자네이루에서 7700킬로미터, 비행기에서 바라본 대서양과 포르투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7700킬로미터, 비행기에서 바라본 대서양과 포르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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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에서 유럽으로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7700킬로미터. 1500년부터 1822년까지 300년 넘게 브라질을 식민 지배했던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 도착했다.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라비아로, 지구 한 바퀴를 돌겠다는 처음의 여행 계획에 유럽은 없었다. 하지만 남미에서 아프리카로 바로 가는 비행기는 거리가 더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유럽보다 비쌌다. 아프리카는 비행기도, 승객도, 다른 나라와의 교류도 드물기 때문이리라.

유럽은 전에 한 번 짧게나마 여행한 적이 있어서 흥미가 적었지만, 머무는 동안은 언제나 그렇듯,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자고 마음 먹었다. 수백 년 동안 전세계에 식민지를 만들어 지배하고, 문명과 근대화의 모델이 된 유럽의 저력은 과연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리스본 에두아르도 7세 공원에서는 도심과 항구 너머, 대서양으로 흐르는 타구스강이 보인다. 대항해시대, 저 바다 너머는 미지의 세계였다. 그 시절 대서양의 수평선은 지금보다 더욱 아득했을 것이다.

광대한 바다로 나아간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부와 권력과 기회를 열망하는 귀족과 군인과 상인, 사명감에 들뜬 성직자, 모험심에 찬 선원들. 그리고 갑판 아래에는, 가장 힘겹게 노를 젓고 일을 해야하는 이름 없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리스본 에드아르도 7세 공원 너머로 보이는 타구스강.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가로질러 대서양에 닿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긴 강이다. 길이는 1038 킬로미터.
 리스본 에드아르도 7세 공원 너머로 보이는 타구스강.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가로질러 대서양에 닿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긴 강이다. 길이는 1038 킬로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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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우데자네이루와 리스본, 라틴아메리카와 유럽은 많이 달랐다. 배낭여행자로서 내가 느끼는 가장 큰 차이는 '안전'이었다. 리우데자네이루 뿐만 아니라 중남미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항상 안전에 신경을 써야했다.

좁고 어두운 골목길은 되도록 피하고, 등에 메야할 백팩을 배에다 멨다. 조심에 조심을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콜롬비아 보고타 야간버스에서는 수면 마취제 강도를 당하고, 페루 이카에서는 백팩 소매치기를 당하고, 리우데자네이루 숙소에서는 핸드폰과 지갑을 훔치려는 도둑을 잡았다.

물론 유럽에도 소매치기가 있다. 전에 유럽을 여행할 때는 런던 박물관에 줄을 서 있다가 카메라를 도둑맞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붐비는 관광지가 아니라면 그런 위험은 거의 느낄 수 없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이기에 스마트폰이나 카메라는 흔한 물건이다. 길가에는 쓰레기와 오줌이 적고, 거리에서 생활하는 홈리스도 적다.

동아시아인을 '치노!'라고 부르는 사람도, 기분 나쁘게 유심히 쳐다보는 시선도 적어서 마음이 편했다. 공원의 널찍한 벤치에 누워서 한숨 낮잠을 자고 일어나, 유럽과 중남미의 격차에 대해 생각했다. 듬성듬성 이가 빠져 엉덩이가 불편했던, 쿠바 각지의 서글픈 벤치들이 떠올랐다.

해질 무렵 리스본 부두에는 노을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청년들이 가득했다. 중남미에서 느끼기 어려웠던 풍요로움과 여유가 있었다. 길과 건물들, 광장과 사람들. 중남미와 유럽의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그 유사함 속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조금 더 깨끗하고 조금 더 안전하다는 것. 그 작은 차이들이 모여서 삶의 질을 크게 좌우한다는 것을 느꼈다.

브라질과 포르투갈, 피지배국과 지배국, 신대륙과 구대륙, 중남미와 유럽의 격차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유럽의 지중해 맞은편, 또다른 거대한 식민지였으며, 가장 가난한 대륙 아프리카는 또 어떤 모습일까. 지구 한 바퀴를 다 돌고 나면, 내 좁은 시각과 옹졸한 마음이 조금은 넓어질까.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이자 대서양이 시작되는 포르투갈에서, 아프리카로 향하는 새로운 발걸음을 시작한다.
 
 해질녘 리스본 부두에서 노을을 맞이하는 청년들
 해질녘 리스본 부두에서 노을을 맞이하는 청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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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의 브라질 이민자들

리스본에 도착하자마자 감기에 걸렸다. 남반구의 여름에서 북반구의 겨울로 갑자기 이동했으니 몸이 많이 놀랐나 보다. 있는 옷을 전부 껴입어도 별 소용이 없었다. 유라시아에서 건너간 병원균에 의해서 아메리카 대륙의 수많은 원주민이 죽었다는 <총, 균, 쇠> 이야기가 생각났다.

'나는 유라시아 사람이지만 아메리카에 8개월 동안 있었으니, 다시 유라시아 병원균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닐까'. 한 친구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독감의 고향'이라고 알려주었다. 리스본 최저가 다인실 숙소에서 며칠을 푹 쉬었다. 하루 7유로(한화 9000원)의 '풋볼 호스텔'.

"풋볼? 이름부터 시끄러워 보이네! 아픈데 좀 조용하고 좋은 숙소에서 쉬어야지! 참 나..."

인터넷 무료통화로 동생이 말했다. 가족의 사랑, 가족의 염려, 가족의 오지랖, 가족의 잔소리는 끝이 없다. 호날두와 네이마르의 유니폼이 벽에 붙어있는 풋볼 호스텔은 6인실 방 네 개가 붙어있는 분주한 숙소인데, 특이하게도 나 말고는 전부 브라질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브라질 여행이 다 끝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며칠 머물다 가는 여행자 보다 장기 투숙하며 일을 하거나 일을 구하는 중인 이민자들이 많았다. 포르투갈의 레스토랑은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보다 더 비싸기 때문에 당연히 요리를 해먹었는데, 이민자들도 마찬가지라 식사 때마다 주방에서는 냄비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졌다. 놀랍게도 유럽은 유럽인지라, 중남미의 수많은 숙소에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식기세척기가 설거지를 대신했다.

시끄러운 숙소지만 사람들은 정이 넘쳤다. 아파서 누워있는 나를 위해 방을 조용하게 비워주고, 소금과 약을 챙겨주었다. 덕분에 몸도 마음도 조금은 나아졌다.

"포르투갈의 식민지 역사에 대해서는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 어쨌든 브라질은 포르투갈어를 쓰니까 포르투갈에 와도 불편함이 없지. 브라질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많은 브라질 사람들이 유럽으로 오고 싶어해. 포르투갈은 브라질 사람들에게 유럽으로 가는 관문이야.

나는 열다섯 살 때 부모님이랑 같이 이곳에 왔어. 자리 잡느라고 부모님이 엄청 힘들게 일하셨지. '일자리와 교육의 기회'가 브라질 사람들이 이민을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 같아. 브라질과 다르게 포르투갈 학교에서는 영어도 잘 배울 수 있었어.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고, 친구 몇 명이 같이 타투숍을 오픈해서 운영하고 있어. 타투에 대한 어두운 이미지를 바꾸려고 인테리어를 하얗고 밝게 꾸몄어."

 
 리스본 중심가 골목 문신가게 Famila Amorim Tatoo 의 타투이스트 레난 케사르 알베스 Renan Cesar Alves 씨(오른쪽)와 그의 동료 나이송 씨
 리스본 중심가 골목 문신가게 Famila Amorim Tatoo 의 타투이스트 레난 케사르 알베스 Renan Cesar Alves 씨(오른쪽)와 그의 동료 나이송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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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게도, 몸을 조금 추스리고 난 뒤 포르투갈에서 처음 만난 인터뷰이, 리스본 중심가 골목 문신가게 '파밀리아 아모림 타투'의 타투이스트 레난 케사르 알베스 Renan Cesar Alves씨 또한 브라질에서 온 사람이었다.

세계의 모든 식민지는 침략과 지배를 바탕으로 하고, 그래서 착취와 상처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독립 이후 인종 구성과 언어, 사회 형태에 따라서 지배국과 피지배국 간의 관계는 다양하다. 식민지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았던 아시아와 달리 중남미 국가들은 그 기간이 길었고, 식민 지배국의 언어를 쓰고 있다.

오랜 혼혈을 거쳤으며, 나라마다 차이는 있지만 주로 유럽 백인 후손들이 여전히 권력의 주류를 이룬다. 54퍼센트의 백인, 39퍼센트의 혼혈, 6퍼센트의 흑인이 살고 있는 브라질에 원주민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만큼 지배국 포르투갈에 대한 반감도 적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양국 모두 5년 이상 상대국 거주자에게 선거권을 주는 등 교류도 활발하다. 포르투갈 사람은 브라질 공항 입국심사대에서 외국인 줄이 아닌 내국인 줄에 선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식민지 시대는 끝났지만, 식민지의 영향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자유롭고 풍요로운 분위기의 리스본 거리. 명물인 트램이 거리 곳곳을 누빈다.
 자유롭고 풍요로운 분위기의 리스본 거리. 명물인 트램이 거리 곳곳을 누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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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의 오누이

"영국 여행자 이사벨라 버드 여사가, '여행자는 가장 서툰 짓을 능하게 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닌다'고 했는데, 그런 특권을 마음껏 누리다 왔으면 좋겠다."

7년 전 인도 여행을 떠날 때 여동생 예슬이 해준 말을 이번 여행에서도 종종 생각한다. 말도 글도, 길도 문화도, 모든 게 낯선 여행자니까, 다른 사람들의 눈치 덜 보고, 몰라도 막 부딪혀 보고,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고 싶을 때 떠올리게 되는 말이다. 때로는 뭔가 실수나 잘못을 할 때도 여행자니까 괜찮다고, 위안을 삼기도 한다.

1년 동안 덴마크에서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이주노동을 한 뒤, 아프리카와 유럽을 여행하던 예슬을 2년 만에 세비야에서 만났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스페인 세비야까지는 버스로 일곱 시간. 유럽연합 가입국들이라 국경 검문도 필요 없이, 그저 강을 하나 건너니 나라가 바뀌었다.

예슬은 덴마크의 일식집과 베트남 음식점에서 일했는데, 열두 시간 넘게 초밥을 말았다거나, 월급의 40퍼센트 이상을 세금으로 내는데 혜택으로 돌아오는 건 거의 없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그렇게 살기 좋다는 덴마크인데 기본 근로기준법도 안 지키드나?! 이주노동자라서 그렇겠지. 와, 젠장, 덴마크도 별 수 없네!"

한탄스러웠다. 다른 나라들의 선망을 받을 정도로 안정된 복지국가인 덴마크에서도 비국민에 대한 차별은 확실했다. 자주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서비스직 이주노동자로서의 고생이 꽤 많았으리라.

스물한 살에 알바로 적은 돈을 모아 배를 타고 인천항을 떠난 동생은, 세 살을 먹은 뒤에야 남한으로 돌아왔다. 이후에도 여행을 자주 하는 그는, 일상에 갇혀 살아가는 나에게 가장 직접적인 자극과 용기를 주는 사람이다.

땡전 몇 푼 없어도 여행을 시작하고, 세계 각지의 다양한 친구들과 더불어 사는, 집시 같고 히피 같은 사람이다. 여행의 소소한 기술들, 현지인의 소파를 빌려 숙박을 해결하는 '카우치서핑'도, 목적지가 같은 사람들이 모여 차를 공유하는 '블라블라카' 도 그가 알려주었다.

2년 만에 만난 누이와 보낸 9일. 서기 711년부터 1492년까지, 781년 동안의 이슬람 지배로 인해 아라비아와 유럽 문명이 뒤섞여 독특한 모습을 띈 안달루시아 지방. 그곳의 많은 것을 함께 보고 경험했어야 하는데, 리스본에서 시작된 유라시아 감기몸살은 기어이 꼬박 일주일을 넘겼다.

세비야와 그라나다 거리의 가로수는 대부분 오렌지나무였다. 아시아에서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으로 전해졌다는 오렌지나무. 과일 하나에도 세상의 세월이 담겨 있다. 겨울이라 주렁주렁 열린 오렌지들을 종종 따먹으며 골목 골목을 걸었다.

나는 보통 만 원 이하 최저가 다인실 숙소에 묵는데, 자기도 가난한 배낭여행자면서 '이럴 때 좋은 데도 묵어보는 거야' 하고 너스레를 떨며 아픈 나를 챙겨주는 동생 덕분에 편안한 숙소에서 머무르며, 불고기와 파쪼래기, 감자볶음 같은 고향음식을 해먹었다.

그가 루마니아의 한국 슈퍼에서 일부러 공수해 온, 그야말로 '항공 수송' 해 온 라면과 카레는 몸 속에 인이 박힌, 남한의 맛이었다.
 
 아시아에서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으로 전해졌다는 오렌지나무. 과일 하나에도 세상의 세월이 담겨 있다.
 아시아에서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으로 전해졌다는 오렌지나무. 과일 하나에도 세상의 세월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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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비야 스페인 광장의 플라멩코 공연.
 세비야 스페인 광장의 플라멩코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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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만에 만났지만, 애틋하고 따듯한 소통 보다는 언제나처럼 잔소리와 티격태격대는 말들이 더 많이 오가며, 9일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배낭에 보조가방에 기타까지 메고서, 동생은 터미널로 가는 시내버스에 올랐다.

언제 다시 볼 지 알 수 없는, 아쉬운 이별의 순간. 멀리 떨어져 있으면 늘 그리운 가족에게, 막상 옆에 있을 때 나는 왜 좀 더 따듯하지 못한 걸까. 그는 2년 동안의 유럽 생활을 마치고 대만을 거쳐 고향으로, 나는 8개월의 아메리카 여행을 마치고 아프리카로, 다시 각자의 길을 떠났다.

원래대로 익숙한 저가 숙소로 자리를 옮겨 세비야에 이틀을 더 머물며,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 아프리카 모로코로 갈 준비를 한다.
 
 그라나다 산미구엘 전망대에서 본 노을.
 그라나다 산미구엘 전망대에서 본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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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행 #세계일주 #유럽여행 #포르투갈 #스페인 #리스본 #세비야 #그라나다 #이민자 #탈식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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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달동네 생활영화인 늘샘. 남쪽 바다 미륵섬에서 자라, 지리산 골짜기 간디학교에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인디스페이스, 늘장, 로드스꼴라, 청년활동지원센터에서 활동. 영화를 만들고, 글을 쓰고, 노래합니다. 인디언식(式) 이름은 '땅을 치고 춤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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