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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식 이래로 대한민국 1918년 건국을 명확히했다.
▲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식 당시 문재인 대통령 발언 갈무리 문재인 대통령은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식 이래로 대한민국 1918년 건국을 명확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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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의 역사수정 공세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017년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2년 후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내년 8.15는 정부 수립 70주년이기도 합니다"라고 명백하게 밝혔다. 보수정권 9년간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을 비롯하여 뉴라이트 계열에서 벌어진 역사 수정주의 공세에 대한 헌정차원의 응답인 셈이다.

'태아가 언제 사람이 되는가'라는 질문은 진통설, 일부 노출설, 완전 노출설, 독립 호흡설 등으로 구분되는 법학의 주요 논쟁거리에 해당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이 언제 탄생하였는가에 관해서도 '1919년 임정 법통론(48년 정부수립론)'을 주축으로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1948년 건국론'이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되고 있다.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들은 대체로 근대 국가의 3요소가 주권, 영토, 국민이므로, 남루한 방 한 칸에 간판을 겨우 유지했던 임시정부의 초라한 형편상, 그것을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국제사회의 감시 하에 치러진 합법 선거를 통해 들어선 대한민국 단독정부만이 유일한 한반도의 합법 정부이기 때문에 48년 건국이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뉴라이트 계열의 주장과는 달리, 현실은 헌법의 영토조항과는 별개로 아직 38선 이북의 영토를 수복하지 못하고 있다. 영토라는 근대국가의 조건이 아직 미충족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또한 뒤이어 유엔에 동시 가입한 북한의 건국(영토, 주권, 국민)도 인정해야 하는 논리적 자가당착에 이르게 된다. 

본디 사상이라는 것은 '생각의 체계'라서 부분만 떼어 근거로 쓸 수 없다. 또한 국가는 생물이 아니라서 분초까지 정확히 과학적인 탄생일을 결정할 수도 없다. 학문적 정의에 맥락을 결여하고 무리하게 현실을 끼워 맞추다 보면 흔히 발생하는 논리 오류인 것이다.  

무엇보다 '1948년 건국론'은 국가권력의 정통성과 식민지 기간의 민족 정당성이라는 권력의 출처에 대한 역사적-국가론적 인식이 심히 결여된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헌법이 채택하는 임정 법통론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과거의 국가는 정복으로 수립되었지만, 근대국가는 주권재민의 원칙에 따라 사회계약으로 수립된다. 다시 주권을 임차하여 국가를 창출하는 사회계약은 모든 국민의 일반의지(general will)의 확인으로 이루어진다. 

또 루소가 말한 일반의지의 표명은 민중봉기의 형태를 띤 시민혁명의 형태로 표출된다. 구체제의 몰락을 가져온 프랑스 혁명이 대표적이며, 영국의 식민지에서 맞서 싸운 미국 독립혁명이 대표적이다. 이와 같이 혁명의 결과로서 헌법이 탄생하여 근대국가가 수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 민주공화국의 핵심은 사회계약이 창출해낸 헌법이며, 법통은 헌법의 연속성을 뜻하므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함은 곧 현실의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말한다. 일시적인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주권을 회복한 이래 헌법은 위와 같은 맥락으로 "1919년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라고 말하며 그 정당성을 승인하고 있는 것이다. 

3.1 운동은 식민지배에 신음하며 주권을 찬탈당한 한반도의 인민들이 더 이상 타국의 지배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일반의지의 표출이었다. 식민지배를 당하고 있는 민족이 민족자결권을 행사하여, 일제 통치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순간 대한민국의 건국이 시작된 것이다. 그 결과물이 바로 대한민국의 탄생이며 자연스레 임시정부가 망명정부로서 발생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3월 1일에 발생한 반제국주의 독립운동과 공화정 수립 시민혁명이라는 민중봉기의 결과물로 수립되었고, 대한민국의 정식정부는 그 법통을 이어받아 1948년 8월 15일에 출범하였다. 따라서 '대한민국'이라는 개념이 생긴 것은 1919년인 것이다. 그것을 떠받드는 정부가 망명의 시기가 지나 임시에서 정식으로 승격되었다는 차이만이 존재한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교과서에서 배울 수 있는 표준적인 답변이다.

1919년 3월 1일에는 혁명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쉽게 간과 되고 혼동되는 지점이 있다. 그동안 3.1 절은 항일 민족독립 운동의 반제국주의적 관점에서만 고찰되어 3.1운동으로 명명되었다. 그러나 공화정 수립을 위한 민중봉기라는 관점으로 되짚어 본다면, 이는 민주공화국으로 천명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을 낳은 분명한 시민혁명에 해당한다. 한마디로 핵심은 '대한'이 아니라 '민국'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3.1운동은 미국의 대통령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 힘입어 일어났으며, 고종의 장례식을 기점으로 삼아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는 시위를 조직하는 과정에서 사람을 가장 효과적으로 불러 모을 수 있는 하나의 기제에 불과하다. 조선과 대한제국, 그 망국의 군주의 장례식에 봉기가 일어났다고 해서 그것을 조선회복운동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우리 민족사의 비극이 식민지 독립 투쟁과 민주공화국 건국이라는 민족과제가 한꺼번에 주어졌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한마디로 민중혁명을 일으켜 우리 민족의 손으로 조선왕조를 폐할 기회를 박탈당한 상태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국권을 탈환해야했던 두 가지 근대화 과제가 동시에 섞여버린 데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을 비롯하여 악정을 펼친 구체제 조선왕조는 시민혁명의 대상이었으며, 동시에 국권을 약탈해 세운 일제의 식민통치 역시 타도되어야할 독립투쟁의 대상이었다. 핵심은 적폐 조선왕조의 안락사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탄생과 투쟁이기 때문이다. 
 
1948년 8월 15일 광복절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수립일임을 명확히 했다.
▲ 대한민국 정부수립 경축식 전경 (1948) 1948년 8월 15일 광복절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수립일임을 명확히 했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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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한반도에서 정통성을 경쟁하던 북한은 3.1 운동을 민족혁명으로 인정하지 않고, 일어나지도 않은 김일성의 공산혁명만을 유일한 혁명으로 인정한다. 이로 인해 탄생한 북조선인민공화국만이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같이 북한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함으로써, 스스로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적자임을 선언해주는 선택을 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제헌국회가 대한민국이 임시정부를 계승하는 것을 명백히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1919년 3월 1일에는 근대 민주공화정을 수립하기 위한 민중혁명이 있었고 그 방법으로 식민지 본국에 항쟁하는 항일운동이 일었다. 그로 인해 탄생한 신생공화국의 망명정부는 건국과 독립운동을 함께해야 했던 비극에서 정식 정부로의 승격이라는 '광복'을 맞게 된 것이다. 명백히 8월 15일이 건국절이 아닌, 광복절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입니다.


태그:#광복, #임시정부, #광복절, #건국, #정부수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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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근로자, 부업 작가 『연애 결핍 시대의 증언』과 『젊은 생각, 오래된 지혜를 만나다』를 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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