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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역사 왜곡 처벌 특별법 비판하는 나경원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2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 참석, 더불어민주당·민주평화당·정의당이 추진하는 '5.18 역사 왜곡 처벌 특별법'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 5.18 역사 왜곡 처벌 특별법 비판하는 나경원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2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 참석, 더불어민주당·민주평화당·정의당이 추진하는 "5.18 역사 왜곡 처벌 특별법"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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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문재인 대통령은 자유한국당이 추천한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위원 3명 중 2명에 대해 재추천을 요구했다. 추천한 인사들이 법으로 규정한 자격에 미달한다는 이유였다. 거절한 두 인사는 권태오 전 한미연합군사령부 작전처장과 이동욱 전 <월간조선> 기자였다.

그러나 한국당은 오히려 대통령의 요구를 두고 "대단히 무례하다"라며 문제가 된 두 인사를 다시 추천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한국당이 조사위원 추천 자체를 하지 않아 법 시행 후 넉 달이나 표류해 왔던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다시 자격 미달 인사 추천으로 기약 없이 표류할 위기에 처했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5.18 진상규명법)'은 진상규명위원의 자격을 "판사·검사·군법무관 또는 변호사, 역사고증·군사안보 관련 분야, 정치·행정·법 관련 분야 또는 물리학·탄도학 등 자연과학 관련 분야 등의 교수·부교수 또는 조교수, 법의학 전공자로서 관련 업무, 역사고증·사료편찬 등의 연구활동, 국내외 인권 분야 민간단체 종사자 등으로 각 분야에서 5년 이상 재직·종사한 자"로 규정하고 있다.

권태오와 이동욱의 이력은 조사위원의 자격 조건에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들을 조사위원으로 재추천하겠다는 한국당의 행태는 노골적으로 '5.18 진상규명법'에 어깃장을 놓겠다는 것이다. 한국당의 이러한 태도는 단순한 어깃장 놓기를 넘어 5.18 민주화운동과 대한민국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신군부의 쿠데타로 시작된 5.18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는 박정희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저항이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박정희의 독재는 그해 10월 26일 시민들의 저항이 아닌 김재규의 총탄에 급작스럽게 마감하고 말았다.

독재타도를 외쳤던 국민들은 박정희의 죽음이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으로 이어질 것이라 기대했지만 군은 바로 다음 날인 10월 27일 계엄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전두환 신군부는 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동원해 계엄사령관이었던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강제로 연행하고 군을 장악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신군부의 쿠데타는 민주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를 한순간 수포로 만들었다. 재야인사, 야당의원 그리고 국민들은 계엄해제와 민주주의의 이행을 요구했다. 시민들은 가두시위를 통해 신군부에 저항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를 기해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야당 인사였던 김대중 등을 소요조종혐의로 연행하는 방식으로 시민들의 저항을 탄압했다.

전두환은 포고령을 내려 모든 언론을 검열하고 일체의 정치적 발언과 활동을 금지했다. 대학에는 휴교령이 떨어졌고 포고령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구속될 수 있었다. 신군부는 시민들의 저항을 억압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가동해 정권의 완전한 장악에 다가섰다. 시민들은 군대의 위세에 눌려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광주는 달랐다. 광주 시민들은 일제히 거리로 나와 민주주의를 외쳤다. 이에 신군부는 공수특전단으로 구성된 진압군을 광주에 투입했다. 공수특전단과 시민들이 전면으로 충돌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군대의 총기 사용과 이에 대한 시민의 무장으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고 대규모 살상이 빚어지고 말았다. 이것이 5.18이다.
 
 518 당시의 상황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
 5.18 당시의 상황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
ⓒ 기획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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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에만 국한되지 않는 5.18 민주화운동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이 전남도청에서 최후의 저항하던 시민들을 모두 진압하면서 작전명 '화려한 휴가', 광주진압작전은 끝났다. 그러나 5.18 민주화운동은 끝날 수 없었다. 5.18은 신군부의 정권장악 과정에서 국민을 무력으로 탄압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신군부의 정권 장악은 5.18을 기점으로 완성됐다.

그렇기에 5.18 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열흘 동안 광주에서 발생한 사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군부라는 정당성을 상실한 권력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이었다. 5.18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곧 신군부 권력에 대한 심판이었다. 신군부의 광주 진압은 1980년 5월 27일 끝났지만 5.18 민주화운동은 5.18의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뤄질 때까지 끝날 수 없었다.

5.18의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저항은 신군부의 광주 진압작전이 종료된 직후부터 시작됐다. 특히 신군부와 미국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제기는 5.18 운동의 한 축을 이뤘다.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었던 미국 주도의 연합사가 신군부를 지원 또는 묵인하지 않았다면 공수특전여단과 20사단이 광주 진압작전에 투입될 수 없었다는 주장을 근거로 했다.

1980년 12월 9일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 광주분회장이었던 정순철과 전남대 학생이었던 임종수는 광주 미국문화원 철조망을 넘고 건물 지붕에 올라갔다. 그들은 지붕을 뜯어내고 석유를 부은 뒤 불이 붙은 신문지를 던졌다. 미국문화원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5.18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한 방화였다.

하지만 5.18 문제가 불거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한 전두환 정권은 단순한 전기 누전 사건으로 덮으려 했다. 임종수는 재판의 최후 진술에서 "백성을 백주대낮에 학살한 저 살인마들은 지금도 권좌에 앉아 있고 너희들은 그 권력의 주구가 돼서 우리를 재판하고 있지만, 역사의 법정은 우리의 무죄를 알려줄 것이고 너희들의 유죄를 단호히 심판할 것"이라며 전두환 정권을 비판했다.

1982년 3월 18일에는 부산에 소재한 고신대 학생들이 움직였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건물로 지었으나, 당시에는 미국문화원으로 사용하던 부산미국문화원 건물을 점거한 후 불을 질렀다.

1983년 9월 22일에는 5.18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이 대구 미국문화원에 폭발물을 투척해 고등학생 1명이 숨지고 경찰 4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85년 5월 23일에는 서울지역 대학생 73명이 현재 서울특별시청 을지로청사에 있던 미국문화원을 점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86년 5월 21일에는 또다시 대학생들이 부산 미국문화원을 점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렇듯 5.18의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 하에서 계속됐다. 그리고 전두환, 노태우 정권은 어김없이 5.18의 진실을 요구하는 국민들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억압하고 처벌했다. 5.18 민주화운동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서 시민저항운동의 한 흐름을 형성했다.

5.18 진상규명의 계속된 좌절

1987년 6월 항쟁은 1988년 여소야대 정국을 만들었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12.12사건과 5.18 민주화운동이 정치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국민들도 5.18의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강하게 요구했다. 결국 국회에서는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구성되고 청문회가 개최됐다. 무명에 가까웠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5.18 청문회를 통해 일약 스타로 떠오르기도 했다.

결국 1988년 11월 전두환은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백담사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그해 12월 양심수들을 석방하며 여론을 달래려 했다. 하지만 뒤로는 김영삼, 김종필 등 야당인사들과 합당을 통해 정국을 돌파하고자 했다. 국민들의 5.18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대한 기대는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출범하면서 또 다시 좌절되고 말았다.

1993년 신군부의 노태우 전 대통령이 퇴임하고 김영삼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국민들은 다시 5.18의 진실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하지만 3당 합당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과 같은 민주자유당 소속이 됐고, 민주자유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에게 5.18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1993년 5월 14일 김영삼 대통령은 이런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진상규명은 역사를 올바르게 바로잡고 정당한 평가를 받자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결코 암울했던 시절의 치욕을 다시 들추어내어 갈등을 재연하거나 누구를 벌하자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 모두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명예를 높이 세우는 일입니다. 진상규명과 관련하여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이는 훗날의 역사에 맡기는 것이 도리라고 믿습니다. 진실은 역사 속에서 반드시 밝혀지고 만다는 것이 저의 확신입니다.

이제 미움과 갈등의 고리를 바로 우리 모두의 손으로 끊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에 다시 보복적 한풀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5.18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명확히 선을 그은 것이었다. 특히 5.18 진상규명을 "보복적 한풀이"라 칭한 것은 많은 국민적 분노를 야기하기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는 오히려 5.18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여론에 불을 붙였다. 1994년 시민들이 전두환, 노태우 등을 서울지방검찰청에 고소·고발했지만 검찰은 피고소·고발인 58명 전원을 '공소권 없음' 결정으로 불기소처분을 했다.

검찰의 불기소처분은 오히려 5.18 진상규명 요구에 불을 붙였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결국 1995년 12월 19일 국회는 여야합의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5.18민주화운동법)'과 '헌정질서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헌정범죄시효법)'을 제정했다. 그리고 1997년에는 5월 18일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됐다.

특별법에 의해 기소된 전두환과 노태우에게는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이 선고되었다. 이외에도 황영시, 허화평, 이학봉, 정호영, 이희성, 주영복, 허삼수, 최세창, 유학성, 차규헌, 장세동, 신윤희, 박종규 등에게도 유죄가 선고됐다. 하지만 전두환과 노태우 등은 바로 다음 정권인 김대중 정부에서 모두 사면받았다.
 
찬바닥에 드러누워버린 '오월어머니'들 오월어머니집 추혜성 이사 등 5·18 희생자 유족들이 1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자유한국당 김진태·이종명·김순례 의원의 '5·18 망언'에 항의하며 드러누워 농성을 벌이고 있다.
▲ 찬바닥에 드러누워버린 "오월어머니"들 오월어머니집 추혜성 이사 등 5·18 희생자 유족들이 1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자유한국당 김진태·이종명·김순례 의원의 "5·18 망언"에 항의하며 드러누워 농성을 벌이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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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될 수밖에 없는 5.18 민주화운동

비록 턱없이 부족했지만 5.18의 책임자 처벌은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5.18의 진상규명은 이뤄지지 않았다. 시민들의 학살의 직접적 책임자를 규명할 수 있는 최초 발포 명령자가 누군인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 들어서야 계엄군에 의한 성폭행, 시신암매장, 시민군에 대한 헬기사격, 공대지 무장한 전투기의 출격대기 등 5.18을 둘러싼 수많은 의혹들이 다시 제기될 수 있었다.

4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두 차례의 정권 교체까지 이뤄졌음에도 5.18의 진상은 여전히 왜곡과 은폐라는 두터운 장막 아래에서 질식해 가고 있다. 신군부가 창당한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이 5.18 진상규명을 "보복적 한풀이"라고 매도했듯, 민주자유당의 후신인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그리고 한국당이 지속적으로 5.18의 진상규명을 방해해 왔기 때문이다.

'5.18 진상규명법'은 "1980년 광주 5.18 민주화운동 당시 국가권력에 의한 반민주적 또는 반인권적 행위에 따른 인권유린과 폭력·학살·암매장 사건 등을 조사하여 왜곡되거나 은폐된 진실을 규명함으로써 국민통합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규정한다. 1980년 이후 40년 가까운 시간 동안 5.18의 진실이 묻힌 결과 전두환은 자화자찬의 회고록을 출판했고, 지만원은 국회에서 5.18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했다. 이렇듯 5.18은 여전히 왜곡과 은폐에 처참히 유린 당하고 있다.

반복하지만 5.18의 진상을 밝히는 것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발생한 사건이 어떠했는지를 파악하는 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5.18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를 심판하고 부정 당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렇기에 5.18 민주화운동은 5.18의 진상을 왜곡하려는 세력과의 투쟁이기도 하다. 신군부의 민주자유당의 DNA를 이어받은 한국당이 여전히 5.18의 진상규명을 방해하고 있는 지금, 5.18 민주화운동 역시 여전히 진행 중일 수밖에 없다.

한국당이 5.18의 진상규명을 그토록 방해하는 이유는 '5.18의 진상이 밝혀짐으로써 신군부 권력의 정당성을 부정 당하는 게 두려워서'라고 생각한다. 신군부의 정당성이 부정된다면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그리고 한국당으로 이어온 그들의 정당성도 부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당의 진상규명위원 추천 행위는 5.18 민주화운동과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이고, 역사 쿠데타라고 생각한다.

과거에도 그래왔듯, 또 다시 '5.18 진상규명법'이 좌절된다면 5.18 민주화운동은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계속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만큼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시 먼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광민 변호사는 부천시에서 시민사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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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이며 부천시청소년법률지원센터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헌법 쉽게 읽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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