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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당시 여성가족부는 남편의 동생들은 '도련님', '아가씨'로, 아내의 동생들은 '처제', '처남'으로 부르는 불평등한 가족 간 호칭을 대체하기 위한 방안을 세우기로 한 바 있다. 특히 남편의 가족에게만 극존칭을 쓰고 아내의 가족은 하대하는 것이 불평등을 야기한다는 문제의식에 기반한 것이다. 사실 이런 문제제기는 여성단체들과 페미니스트들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던 일이다. 정부가 방안을 세울 정도니 얼마나 큰 문제인지 짐작이 간다.

가족 내에서의 호칭만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당장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이 사람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고민하느라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또 반말로 '갑질'하는 사건이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를 탄다. 이렇듯 호칭은 한국사회를 휘감고 있는 사회적 문제 중 하나라고 보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서 심층적인 논의가 잘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호칭, 그것이 문제로다
 
<나는 이렇게 불리는 것이 불편합니다> 책 표지.
 <나는 이렇게 불리는 것이 불편합니다> 책 표지.
ⓒ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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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단체 활동가, 작가, 국문과 교수, 국립국어원 연구관 등이 모여 호칭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의 물꼬를 틀 결과물을 내놓았다. <나는 이렇게 불리는 것이 불편합니다>는 자칫하면 어려워질 수 있는 호칭 문제를 쉽게 풀어쓴 책이다. '자칫하면 어려워질 수 있다' 고 한 것은 정말로 한국사회에서 호칭문제는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이다. '호칭(呼稱)'은 말 그대로 '어떻게 부를 것이냐'의 문제지만, 현실은 그게 끝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호칭은 단순히 정체성 인정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서열 인정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 그래서 호칭을 둘러싼 갈등은 그 양상이 치열하고 졸렬하다. 한국 사회에서는 나날이 갑을관계가 추악하고 강고하게 발전하는 탓에 서열을 따지는 문화가 더욱 널리 퍼지고 있다. 그리고 호칭에는 그 사람이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신분이나 지위를 뜻하는 '지체'가 압축되어 있으므로, 호칭이야말로 서열 인정의 리트머스 시험지 노릇을 한다.

책에 나온 예시를 통해 '서열 인정의 성격'을 알아보자. 대표적으로 '여사'라는 표현이 있다. 국어사전에서는 '여사(女史)'를 결혼한 여자 혹은 사회적으로 이름있는 여자를 높여 이르는 말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대기업에 다니는 중년 여성 이사를 '여사'라고 부르지 않는 반면 청소, 매장 정리, 손님 응대 따위의 일을 하는 중년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대개 '여사님'이라는 호칭을 붙이고 있다. 사전적으로는 높여 부른다고 되어 있지만, 이건범 작가의 말을 빌리면 "존칭에 묻어 있는 평온과 품격을 무참히 짓밟"는 표현이다. 

호칭 문제가 복잡해진 것은 신분제가 사라지고 민주화 되면서 공적인 조직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참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신분제가 사라진 민주주의 사회가 되었는데도 '갑질'이 만연하다. 현실과 관념이 충돌하는 부분이다. 모두가 평등하다고 머릿속으로는 생각하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서열'이 있다는 것도 모두들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우리 사회의 호칭 민주화에서 관건은 '나이'와 '지위'와 '남녀'의 차이에 따른 호칭의 서열을 어떻게 녹여버릴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세 가지는 어쩔 수 없는 차이를 인격의 차이로 확대시켜 차별을 정당화하는 전통적인 서열 기준이다. (...중략...) 다만, 남녀차별 문제는 개선 정도와 무관하게 논의가 비교적 널리 일어나는 데 비해 나이와 지위의 높낮이에 따른 차별 문제는 별 의심 없이 받아들여진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나이와 지위의 차이를 뛰어넘는 데에는 더 많은 문화적 각성이 필요하다. 

정말로 그러하다. '페미니즘 리부트'라고 불리기도 하는 요즘 시기에 성차별의 문제는 지속적으로 공론화되고 있지만 나이와 지위에 따른 서열문화는 자연스러운 사회질서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이 작가는 '나이'를 기준으로 한 위계질서가 한 개인의 삶에서는 처음 세워지는 서열의 기준이라서 쉽게 변하기 힘듦을 지적한다.

김하수 전 국문과 교수는 모든 영역과 분야에서 누구에게나 편하게 쓸 수 있는 '보편적 호칭'이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광복 이후 일본식의 어휘를 거부하는 시도가 대체로 '언어의 형태' 문제에 집중되는 바람에 언어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던 것이다. '마나님', '나리마님', '아기씨'와 같은 전근대적인 호칭이 물러간 자리에 '사장님', '사모님', '여사님'들이 파고드니, 더 평등하고 대등한 관계를 구축하는 일은 더 요원해졌다. 

결국 호칭 문제는 개개인에게 심적인 부담과 스트레스, 더 나아가서는 불쾌감으로 다가온다.  이는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2017년 국립국어원이 시행한 '사회적 소통을 위한 언어 실태 조사' 사업(10~60대 국민 4000명 대상)에 나타난 각종 응답에서도 잘 드러난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친인척을 부를 때 호칭어 사용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응답한 비율이 각각 43.5%, 28.7%로 나타났다. 부모님뿐만 아니라 혈연관계 내에서의 다양한 호칭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응답한 비율은 30%가 넘게 나오고 있다.

특히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호칭에 대해서도 불쾌함을 표출하는 이들이 많다. 직장 상사와 동료가 여성 직원을 '아가씨'라고 부르는 경우(84.5%), 손님이 관공서 직원이나 서비스직 종사자들을 '아저씨/아주머니'로 부르는 경우(46.6%) 혹은 '여기요/저기요'로 부르는 경우(33.9%) 등. 신경 쓰지 않으면 관성적으로 사용하곤 하는 표현들이다.

명절 때만 공론화되는 문제가 되지 않으려면 
 
중요한 것은 우리 사이의 관계를 성찰하는 것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우리 사이의 관계를 성찰하는 것이 아닐까?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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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문제들은 논의가 평소에는 잘 안되다가, 언론에서도 명절 때만 되면 '이제는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번에도 성차별적인 호칭을 쓰지 말자면서 이제는 바꿀 필요가 있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많이 나왔다. 포털에 '호칭'이라고 검색만 해도 최근 며칠 간의 기사들이 많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책의 내용을 통해서 보았듯이, 이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특정한 관계에서 나타나는 특정한 호칭만을 콕 집어서 바꿔야 한다는 것은 사실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을 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 당장 평등해 보이는 호칭을 인위적으로 설정해서 쓰자고 합의하는 순간 현실에서는 다른 문제에 봉착할 수도 있다.
 
몇몇 기업은 창의적 분위기와 소통을 위해 '호칭 파괴' 차원에서 '님'을 도입해 쓰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님'을 도입했다가 포기한 기업들도 상당수 있는데, 이유는 동기부여 저하, 소통의 역설적 어려움 등으로 요약된다. 이름 다음에 '님', 혹은 성을 포함하는 이름 다음에 '님'을 붙이는 것은 축약의 묘는 전혀 살리지 못하고 부담만 늘리는 것이다. (중략) 그러니 그저 '부장님, 실장님, 국장님'이 차라리 낫다고 유턴하고 마는 것 아니겠는가. 곧 문자언어적 사고에 갇혀 정작 그것을 활용하는 시뮬레이션 환경, 즉 음성언어에 대한 고려가 미흡했던 탓으로 귀결된다.

결국에는 한국사회 전반에 퍼진 관계의 불평등이 지속적으로 개선되는 것이 시작이다. 바뀌어야 한다는 당위가 있는 것과 별개로, 지금 당장 정부가 나서서 바꾸라고 해도 쉬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사이의 관계의 문제를 성찰하는 것이 아닐까?
 
호칭 민주화는 불편함을 드러내 서로 인식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기존의 호칭이 우리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질서로 받아 들여졌더라도 누구나 조금씩은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일종의 특권 아닌 특권을 무의식적으로 누리던 사람들 가운데 깨달은 자들이 이 주제를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중략...) '영미~'처럼 이름만 부르는 문화가 우리에게도 올지, 그리고 그것이 좋을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날이 올 수도 있다. 답이 무엇이든 우리는 호칭의 안개를 헤쳐 나가야 한다. 거기에 필요한 힘은 사태를 드러내놓고 토론하는 용기이리라. 시간은 우리 편이다.

태그:##호칭, ##명절, ##서열문화, ##성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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