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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여행자들을 매혹하는 인도의 타지마할 사원.
 수많은 여행자들을 매혹하는 인도의 타지마할 사원.
ⓒ 류태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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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한국 관광객들에게 익숙한 유럽과 북아메리카와 달리 아직은 '미지의 땅'으로 인식되는 인도. 여전히 물질이 아닌 정신의 우월성을 믿고, 세상 모든 사물에 신(神)의 숨결이 스며 있다고 생각하는 인도 사람들.

운 좋게도 30일쯤 그 나라를 여행하며 인도의 속살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는 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라 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만큼 인도 여행은 기다리고 바랐던 것이었다.

짙푸른 남중국해 위를 날아 홍콩을 거쳐 도착한 인도의 '경제 수도' 뭄바이(Mumbai). 그런데 이게 뭐지? 국제선 비행기가 오가는 공항이 한국의 조그만 도시 시외버스터미널 수준으로 조그맣고 지저분했다.

놀라움과 탄식은 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길 내내 이어졌다. 새벽 2시가 넘은 시각.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도로 위에 누워 있는 수백 명의 사람들. 그 곁으로 씽씽 내달리는 차량. 대체 그들은 왜 집에 가지 않고 길에서 잠을 청하는 것인지...

적지 않은 돈을 주고 예약한 호텔도 마찬가지였다. 숙소의 문과 바닥은 10cm쯤 떠있었고, 그 사이로 손가락 크기의 도마뱀이 들락거렸다.

창문 밖이 환하게 밝아올 때까지 그걸 지켜봐야 한다니. 심장 약한 여행자라면 비명을 지를 게 분명했다. 나 역시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한숨도 자지 못하고 날이 밝자마자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콧수염을 멋있게 기른 종업원이 조식을 제공하는 식당에서 아침을 먹으라고 안내해서 따라갔는데, 콧속으로 스미는 낯선 향신료 냄새 탓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당연지사 어떤 음식도 먹지 못했다.

혼잣말이 나왔다. "TV에서 본 '인크레더블 인디아(Incredible India)'가 이제 현실로 다가왔구나."

인도 '사이클 릭샤' 위에 오르다
 
손님을 기다리는 인도의 사이클 릭샤 기사.
 손님을 기다리는 인도의 사이클 릭샤 기사.
ⓒ 류태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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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진 상태로 거리로 나섰다. 다음 날 인도 중남부로 출발하는 기차를 예약하기 위해서였다. 뭄바이역(驛)으로 가는 길. 도로는 그야말로 '난리 북새통'이었다. 버스와 택시, 오토바이는 물론 소가 끌고 가는 수레까지 뒤엉켜 있는 상황.

패닉에 빠져 있던 그때. 새까만 얼굴의 깡마른 사내 하나가 자전거를 개조해 만든 '사이클 릭샤(Cycle Ricksaw)'를 끌며 나타났다.

"어디로 가세요?"
"뭄바이역에 갈 겁니다."
"타세요. 택시 절반 가격으로 모셔다 드릴게요."
"그래요? 고맙습니다."


그 조악한 '사이클 릭샤'의 뒷자리에 타고 20분쯤을 달렸다. 달리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한국 중학생보다 조그만 사내의 등과 목덜미에 땀이 흐르는 걸, 종아리 근육이 아프게 꿈틀거리는 걸 바로 목전에서 봐야 했던 탓이었다.

뭄바이역이 가까워질 무렵.  시인 김현승의 '아버지의 마음'을 떠올렸다. '인간'과 '신'이 맺고 있는 관계를 더없이 따스한 시선으로 끈질기게 탐구한 작품이다. 때때로 '아버지'란 인간에게 신을 대위(代位)하는 존재이기도 하기에.
 
아버지의 마음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김현승 시인은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시를 썼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대학교와 숭전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했던 그는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서정적이며 감각적인 작품 여러 개를 독자들에게 선보였다.

언급한 시에 드러나는 '아버지의 휴머니즘'은 적지 않은 독자들의 가슴을 흔든다. 바깥에서 보여지는 아버지의 다양한 모습이 자식들 앞에선 단 하나의 모습으로 합일된다는 것. 그 '지향'은 바로 맹목적인 사랑.

언젠가는 사라질 인간이란 존재의 덧없음을 바라보며 변하지 않는 가치로 눈을 돌렸던 작가. 그에게 세상이 사람들에게 주는 서러움과 즐거움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신과 인간에 대한 회의와 신뢰를 번갈아 보여준 김현승 시의 가장 큰 미덕은 '맹목적 사랑을 지향하는 삶에 대한 낙관'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버지의 근육
 
인도의 사이클 릭샤. 힘겨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세상 모든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인도의 사이클 릭샤. 힘겨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세상 모든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 류태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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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을 바가지로 흘리며 목적지인 뭄바이역에 도착한 사이클 릭샤 기사가 "50루피만 주세요"라고 말했다. 한국 돈으로 1천 원이 되지 못하는 금액. 그 돈이면 묽은 카레에 찰기 하나 없는 밥 한 주걱을 사먹을 수 있을 터였다. 인도에서라면 많지도 적지도 않은 차비.

갑작스레 진원지 불분명한 슬픔에 휩싸여 100루피를 내밀었고 "잔돈은 필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조그만 돈에도 터무니없이 기뻐하는 사이클 릭샤 기사의 웃음에 괜스레 미안해졌다.

한국에서라면 커피 한 잔도 마시지 못할 100루피짜리 지폐를 받아든 그가 수차례 내게 고개를 조아리며 인사를 전한 뒤 다른 손님을 태운 채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땀에 젖은 낡은 셔츠와 새까맣고 야윈 다리. 아, 이상스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가난한 아버지'가 냉혹한 세상을 버티는 방식은 인도나 한국, 미국이나 프랑스가 다를 바 없을 터. 그들의 희생과 '뜨거운 포옹'이 아들과 딸을 키운 게 세상 어느 나라라고 다를까?

아직도 그날 본 릭샤왈라의 새까만 종아리에서 꿈틀거리던 '슬픈 근육'이 잊히지 않는다. 언제쯤이면 나도 그런 '슬프지만 아름다운 근육'을 가지게 될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에 게재된 것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태그:#인도, #릭샤왈라, #김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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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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