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28 07:47최종 업데이트 19.01.28 09:58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일본 국기를 가슴에 단 손기정이 월계관을 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을 때부터 독일은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무대 중 하나였다. 그후 윤이상, 임수경, 송두율, 그리고 최순실까지 말이다. 하지만 이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이야기도 켜켜이 쌓여 있다. '권은비의 베를린 오 베를린'에서는 그 평범하고도 비범한 시간들을 전한다. 이번 순서는 1980년 5.18과 전두환 신군부 집권을 해외 뉴스로 접한 독일 교민 사회의 반응을 기록했다.[편집자말]

당시 독일 공영방송 타게스샤우에 보도된 5.18 광주민주화운동 ⓒ tagesschau

 
1980년 5월 21일, 독일 대표 뉴스인 타게스샤우(Tagesschau)의 앵커는 노란 종이 위에 쓰여진 보도 내용을 아무런 감정없이 읽어내려 간다. 앵커의 왼편에는 한반도가 보이고 한국과 광주가 표시되어 있다.

베를린의 어느 병원에서 근무하던 한 파독 간호사는 이 뉴스를 보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뉴스 속에 보이는 영상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독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뉴스 앵커가 말하는 독일어를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큰 일이 고향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다큐영화 <5.18 힌츠페터 스토리>의 한 장면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슈피겔 국제면에 3주 동안 등장한 '광주'

그는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라서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광주에 있는 가족들이 떠올랐고, 그들의 생사를 알 수 없는 현실이 가혹하게 느껴졌다. 그후 베를린 길거리의 신문 가판대에서 모든 신문과 시사주간지를 닥치는 대로 사들고 와서 광주에 대한 기사를 읽고 또 읽었다. 독일어 한 글자 한 글자 사전을 찾아가며 수많은 독일어 문장 옆에 빼곡히 한글 뜻을 적어 넣었다.
 
"한국은 민주주의를 잃은 군사독재국가이다."

1980년 5월 26일자, 독일의 유명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한국을 이렇게 정의했다. 이날로부터 무려 3주 동안 당시 한국의 정세와 광주의 참혹한 실상을 세세하게 보도했다. 특정 국가의 기사를 3주 동안 국제면에 싣는 것은 이례적이었다.
 
"독재자, 복수의 화신 전두환"

이것이 <슈피겔>이 한국의 지도자를 지칭하는 대명사였다. 1980년 6월 2일자 보도에는 더 상세한 광주의 상황이 서술되어 있다. 언뜻 훑어보기만 해도 잔인한 단어와 표현들이 눈에 턱턱 걸렸다.
 
"대량학살,"
"무자비한"
"잔혹한"
"몽둥이"
"무분별"
"10살"
"총검"
"도살"
"나체"
"몰이사냥"
"때려눕히다"
"할머니"
"잘라내다"

기사 왼편에는 광주의 어느 한국 대학생이 쓴 선언문이 독일어로 번역돼 있었다. 당시 한국 언론사 어디에서도 실어주지 않은 글이었다. 독일어로 번역된 선언문 옆에는 전두환의 사진이 보인다. 사진 밑에는 "한국 독재자 전두환, 베트남 전쟁처럼 잔혹하다"라고 쓰여있다.
 

독일 주간지 슈피겔에 실린 광주의 대학생의 선언문 ⓒ Der Spigel

  
약 넉달 후인 1980년 9월, 독일 공영방송에는 60분 정도의 다큐멘터리 한 편이 방영된다. 바로 영화 <택시운전사>에 등장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촬영한 광주민주화운동 영상이었다.

비슷한 시기 독일 사민당 총재였던 빌리 브란트(전 독일 연방총리)는 그해 5월 구속된 한국의 상징적 야당 정치인 김대중(전 대통령)의 사형 선고 소식을 접하고 아래와 같은 서신을 쓴다. 협박에 가까운 이 편지의 수신인은 전두환이었다. 
 
"저는 오늘 군사재판에서 김대중씨가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자신의 나라를 위해 사회 진보와 인권 수호를 이뤄온 노력한 애국자에게 어떻게 이러한 판결 내릴 수 있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 없으며, 이것은 우리에게 큰 도전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나는 당신(전두환)에게 긴급하게 촉구합니다. 이 판결을 당신의 모든 권력을 다해 수정해주십시오. 이번 판결을 집행할 경우, 한국은 국제사회 안에서 막대한 손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1980년 9월, 빌리 브란트가 전두환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을 담은 사민당 보도자료 ⓒ Friedrich-Ebert-Stiftung

 
한국엔 '폭도'라고 알려질 때 교민들이 한 일
 

1980년 11월 3일 전두환 신군부는 김대중에 대한 사형을 확정한다. ⓒ 김대중도서관

 
베를린에서 참혹한 광주의 상황을 알게 된 교민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파독간호사들과 교민, 유학생들은 그해 5월 30일 피켓을 들고 거리에 나선다. 교민들은 황급히 베를린 경찰청에 집회신고를 했고, 글을 잘 쓰는 사람은 피켓을 썼다. 키가 큰 사람은 현수막을 달고, 몇몇은 단식을 결심하며 연대 집회를 이어갔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독일 언론의 최초 보도 후 9일 만이었다. 하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광주 시민들이 폭도로 알려지고 있었다. 한국 언론이 귀를 닫고 눈을 감은 채 군부독재정권의 지시만 앵무새처럼 읊조린 결과였다. 


1980년 5월, 광주 곳곳에서 수많은 생명들이 짓밟히고 흙에 덮여지고 가루가 되어 물에 뿌려졌다. 누군가의 생명은 육신마저, 이름마저 남김없이 금남로에서 사라져버린 동안, 비린내나는 권력을 추앙하던 이들은 커다란 비석 아래 잘도 묻혀 있다.

그로부터 몇 십년이 흐른 후에도 끝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광주와 관련한 독일의 모든 보도는 여전히 오직 한 명의 가해자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1979년 11월 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발표하는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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