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린 북> 포스터

영화 <그린 북> 포스터 ⓒ CGV아트하우스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그린북>은 다소 뻔한 '브로맨스'다. 이태리계 백인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는 생계로 어쩔 수 없이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의 운전기사로 일하게 된다. 토니는 셜리의 연주를 들으며 점차 그의 천재성에 눈뜨고, 그의 '소수자성'과 그로 인한 '고독'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린북>에는 다분히 백인인 토니의 시각이 지배적이다. 흑인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했던 백인 토니가 우여곡절 끝에 흑인과 친구가 된다는 '개과천선'기라고 나 할까?
 
'개과천선'은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부정의한 차별이 백인 한 명의 개과천선으로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그게 어디냐고 할 수도 있다. 반인권을 저지른 인종적 우위를 반드시 역지사지해야만 터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토니의 특권이다. 그래서 흑인 셜리가 백인 토니를 고용했다 하더라도, 갑(백인)과 을(흑인)의 전도는 토니의 특권으로 허물어진다.

인종을 넘어선 듯한 그들의 우정이 아름답긴 하지만, 그들이 우정을 형성하는 과정에 토니가 점한 백인으로서의 우위를 지우기는 어렵다. 이런 미진한 느낌을 어쩌지 못한 채, 나는 <그린북>의 돈 셜리에게만 집중해 보겠다.

상찬받는 일이 될 수 없는 토니의 개과천선
 
 영화 <그린 북> 스틸 사진.

영화 <그린 북> 스틸 사진. ⓒ CGV아트하우스


돈 셜리는 실재 인물이다. 그는 일찍이 천재성을 인정받아 레닌그라드 음악 학교에서 수학한 후, 19살에 런던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하지만 시대(1962년)는 흑인 클래식 피아니스트를 환영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셜리는 팝을 가미한 클래식을 개척해 명성을 얻는다. 셜리는 이제 자신의 음악을 가지고 남부로 갈 준비를 한다. 노예가 아닌 피아니스트로서.
 
남부인들은 흑인 뮤지션을 매우 위선적으로 맞이한다. 남부로 간 셜리는 호텔, 바, 양복점, 화장실에서 여전히 배제된다. 남부인들은 그의 음악을 들을 수는 있지만, 결코 먹고 자고 싸는 공간은 공유할 수 없다. 그래봐야 '너는 고작 흑인이다'를 줄기차게 인식시킨다. 셜리는 번번이 뿌리 깊은 차별에 신음한다.

말도 안 되는 차별을 아무렇지 않게 전통이라 우기는 백인들의 교만을 셜리는 줄곧 감내한다. 흑인인 셜리는 들어갈 수조차 없는 레스토랑에서 셜리가 고용한 토니가 백인이라는 이유로 버젓이 식사하는 장면은, 이 둘의 갑과 을의 고용관계가 인종보다 우선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토니의 개과천선은 그래서 상찬받는 일이 될 수 없다.
 
셜리의 백인 연주가 동료나 운전기사 토니는 그가 당하는 차별을 막을 수 없다. 혼신의 연주 후 몰아치는 피로감을 동료들과 어울려 달랠 수 있는 공간이 그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 겨우 그가 고안한 방법은 홀로 위스키를 마시는 것이다. 흑인이기에, 그는 외롭다.

계급성과 인종성, 이중구속에 빠진 셜리
   
 영화 <그린 북>의 한 장면

영화 <그린 북>의 한 장면 ⓒ CGV 아트하우스

 
1962년에 흑인 피아니스트가 남부 깊숙이 연주 여행을 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노예제가 폐지됐다고 해서 백인과 흑인이 갑자기 친구가 되지는 못한다. 여전한 감시와 의심과 혐오를 받아내야 한다. 여행 중 마주치는 흑인들의 곤궁한 삶에 그는 혼란스럽다.

들판에서 일하는 흑인 농부는 여전히 노예의 모습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고급 승용차를 타고 옷을 쭉 빼입은 셜리에게 흑인들은 경계의 눈빛을 보낸다. 흑인 같지 않은 '계급성'은 셜리에게 흑인이 아니라고 다그치고, 백인이 될 수 없는 '인종성'은 그에게 백인처럼 행세한다고 조롱한다. 그는 흑인이면서 흑인 아닌 '계급성'과 절대 백인은 될 수 없는 '인종성'의 '이중구속'에 빠져 있다.

그는 '흑인다움'을 요구받을 때(프라이드치킨을 가장 좋아해야 하고 재즈를 선호해야 한다는), 그럴 수 없어 부정 당한다. 가족마저도 오랜 연주 투어로 멀어져 실상 정서적으로 기댈 것이 없다. 그에게 허용된 공간은 오직 연주장뿐이다. 연주장 밖의 그 어떤 장소도 흑인인 그를 환대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연주장에서만 기능하는 인간이다.
 
경계인으로서의 그의 고독이 깊다 하더라도, 목화를 땄던 흑인들에게 그는 행운의 소유자임을 부정할 수 없다. 농기구가 아닌 피아노를 상대하며 자아를 탐색하는 작업은 들판의 흑인 농부들에게 분명 그러하다. 그가 위험을 감수하고 남부 깊숙이 들어간 이유는 흑인이라도 백인 앞에서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어서일 것이다. 이는 정치적 행위이다. 이 정치적 행위에 흑인들이 얼마나 위안 받고 고무되었을까.
 
<히든 피겨스> 흑인 여성들의 담대한 도전이, 훗날 인텔리 흑인 여성들을 도약하게 한 발판이 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들이 당시 수많은 하층계급 여성의 삶을 대변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셜리 또한 당시 억압받은 대부분의 흑인 하층민의 삶을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흑인도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다'는 현실을, 노예의 땅 남부에서 연주로 시위한 행위는 그가 매우 큰 용기를 가지고 감행한 도전이다. 백인은 뭐가 되든 증명할 이유가 없지만, 흑인(소수 인종)들은 끊임없이 '뭐가 될 수 있는 것'을 증명해야 했던 위선의 땅에서, 돈 셜리의 피아노 연주는 그로서의, 그의 위치에서의 치열한 투쟁이었다.

영화 말미, 주최측
  
 영화 <그린 북> 스틸 컷

영화 <그린 북> 스틸 컷 ⓒ CGV아트하우스

 
연주를 끝낸 후 청중을 향해 짓는 그윽한 미소는 그의 투쟁 방식을 응축한다. 나대도 안 되고 비굴해서도 안 된다. 그는 약자(흑인)의 최대한의 무기를 '품위'(Dignity)라고 정하고 그로써 싸웠다. 아무리 화가 나도 화내지 않는다. 백인의 저열한 도발에 언제나 예의 있게 물러선다. 이것은 분명 굉장한 인내를 발휘해야 하는 전략임에 틀림없지만, 백인을 안심시키려는 위장이기도 하다.

영화 말미에 식당 출입을 거부하는 주최 측의 음악회를 보이콧하는 장면은, 이제 '그만 참겠다'는 돈 셜리의 저항을 상징한다. 그의 '품위'는 실상 백인 스타일로 위장해 숨기고 싶었던 그의 '노예성'이었다. '품위'를 지키는 다른 방식으로 저항을 선택하자, 셜리는 물러서지 않을 수 있었다. 셜리는 비로소 노예에서 벗어난 것이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셜리의 눈빛은 그가 <문라이트>의 마약상 '후안'이었음을 떠올리게 한다. 달빛 아래선 흑인 백인 모두 푸르게 보이듯이, 피아노 앞에선 모두 연주자일 뿐이다. '흑인' 연주자 따위는 없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윤일희 시민기자님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그린북 인종주의 인종차별 마허샬라 알리 비고 모텐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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