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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1.11 10:37수정 2019.01.11 10:37
겨울치고는 며칠 포근한 날씨가 계속 되더니 급기야 오늘 저녁엔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면서 나는 가게의 간판을 켜고 낮에 끓여 놓은 스튜 냄비를 인덕션 렌지에 올려 약한 불로 데웠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출출하기도 했고 손님들이 오기 전에 뭔가 요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뭘 먹을까 냉장고를 뒤져보니 가게 근처의 작은 빵집에서 사 온 치아바타(이탈리아 빵의 한 종류)와 치즈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치아바타를 반으로 가르고 바질 페스토를 바른 후 파르미지아노(파르마 지방에서 생산되는 수제 치즈의 한 종류) 치즈와 약간 매콤한 페퍼잭(고추가 들어가 있는 미국산 치즈) 치즈, 그리고 풍부한 감칠 맛이 나는 하바티(네덜란드산 세미하드 치즈) 치즈를 조금씩 골고루 깔고 이탈리아의 생햄인 프로슈토와 캐나디안 베이컨, 파프리카와 가지, 그리고 잘 익은 토마토를 슬라이스해서 얹었다.

빵의 겉면에는 토스카나산 올리브유를 골고루 바르고 달궈진 파니니 그릴에 넣어 치즈들이 녹고 빵이 눌리면서 겉면이 바삭하게 구워질 때까지 구웠다. 이윽고 타이머가 울리고 처음보다 거의 절반 정도의 두께로 납작하게 구워진 빵을 꺼내 반으로 잘랐다. 표면의 그릴 자국과 함께 먹음직스럽게 잘 구워진 파니니(panini, 이탈리아식 그릴 샌드위치)였다.
 

이탈리아식 그릴 샌드위치인 파니니(panini). 파니니는 빵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파네(pane)에 작다는 뜻의 어미 ‘-ini’를 붙인 것으로 말 그대로 ‘작은 빵’이란 뜻이다. 보통 사각형의 치아바타를 반 가르고 안에 치즈와 채소, 소시지, 생햄 등을 넣고 그릴로 납작하게 구워 만든다 ⓒ 이건수

 
반으로 자른 파니니 한쪽을 입에 물고 씹으니 '바삭'하는 소리와 함께 햄과 치즈, 채소가 페스토 소스와 어우러져 혀 위에서 다채로운 맛을 뽐냈다. 원래는 커피와 함께 마시려고 했지만 한 입 먹는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파니니가 식을까봐 마음이 급해져 재빨리 와인 셀러를 열고 위아래 칸들을 훑어보니 딱 맞춤인 와인 한 병이 눈에 띄었다.

병 입구의 캡실을 잘라내고 코르크 마개를 돌려 딴 후, 와인잔에 한 잔을 따랐다. 밝은 적홍색의 와인이 부드럽게 와인잔의 벽을 타고 흘러 내리자 달콤하고 싱싱한 딸기향이 주변 공간에 퍼져 나갔다. 와인잔을 살짝 돌린 후 한 모금을 마셔 보았다. 입안을 꽉 채워주는 느낌이지만 지나치게 무겁거나 떫지 않은, 베리향이 풍부한 이 와인 특유의 향과 맛이 기분 좋게 혀 위에서 울렸다.

서서히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면서 조금씩 어둑해지는 창밖으로는 여전히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려만 놓고 마시지는 않은 채 식어가는 커피 냄새와 온갖 재료가 어우러진 파니니의 맛, 그리고 딸기향이 풍성한 미국 워싱턴주의 멋진 와인, '헤지스 레드마운틴(Hedges Red Mountain)의 아로마가 어우러지면서 아직 이 술집을 열기 전, 무역업에 종사할 당시 출장 다니던 시애틀(Seattle, 미국 서북부 워싱턴주의 주도)의 추억이 떠올랐다.
 

미국 워싱턴주 동부 야키마 밸리의 가족 농장인 헤지스 셀러스에서 만든 헤지스 레드마운틴(Hedges Red Mountain). 연중 비가 많이 내리고 습한 워싱턴 주의 서부와는 달리 워싱턴주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캐스캐이드 산맥의 영향으로 동부는 메마르고 거의 사막 같은 환경인데 이런 환경적 요건으로 인해 미국 내 그 어떤 곳보다도 멋들어진 와인들이 생산되고 있다. ⓒ Hedges Family Estate

 
현지의 사업 파트너이자 좋은 술친구였고, 내 덕분에 한식을 무척이나 좋아하게 됐다던 라이언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한 때는 지겨워서 안 가려고 핑계 대고 빠지기도 했던 해외 출장이었는데, 벌써 몇 년째 해외는커녕 시내 한 번 나가기도 쉽지 않은 자영업자로 살다 보니 이제는 외국 공항들 특유의 노릿한 냄새가 다 그리울 지경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젖어 파니니와 함께 와인을 홀짝거리며 창 밖을 내다 보고 있는데 누가 내 손을 툭툭 치기에 깜짝 놀라 바라보니 어느새 연암이 내 앞에서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우, 무슨 생각을 하길래 내가 앞에 왔는데도 넋을 잃고 창 밖만 바라보고 있나?"
"깜짝 놀랐어요. 하하, 옛날 생각 좀 하고 있었죠. 예전에 무역 쪽 일할 때 생각이요. 아직 식전이시죠? 이것 좀 드셔보세요. 이탈리아 사람들이 많이 먹는 파니니라는 건데, 이것저것 재료 끼워 넣고 그릴에 구운 빵이에요. 이 와인과 함께 드셔보세요."


나는 아직 손도 대지 않은 파니니 반쪽과 함께 헤지스 와인을 한 잔 따라 그에게 내밀었다. 그도 시장했든지 사양하지 않고 파니니를 한 입 덥석 물더니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더니 눈이 커지면서 와인병을 앞으로 당겨 유심히 쳐다봤다.

"오, 이거 맛있는데? 어디의 뭐라는 와인인가?"
"미국 수도인 워싱턴 D.C와 이름만 같은 서북부 워싱턴주의 동부에서 나오는 헤지스라는 와인이에요. 예전에 일 때문에 워싱턴주의 시애틀이라는 도시에 출장 자주 다녔는데 거기 사는 친구가 권해줘서 마셔보고 그 다음부터 무척이나 좋아하게 됐던 와인이죠."
"시애틀?"
"네. 왜 다니시다 보면 간판에 인어 그림 그려진 커피 체인점 아시죠? 그 체인점이 태어난 곳이 바로 시애틀이에요. 원래는 연중 비가 정말 많이 내리고, 여름 딱 한 철만 서늘한 초가을 날씨인 곳인데요. 그래도 도시 전체가 깔끔하고 여타 도시에 비해서는 조용해서 미국에서도 꽤 살기 좋은 도시로 꼽히죠. 우리나라에서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라는 영화 때문에 꽤 유명하구요."


나는 음원 사이트에서 영화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을 찾아 틀었다. 지미 두란테가 부르는 명곡 'As Time Goes By' 가 흘러나왔다. 
 

시애틀을 배경으로 한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Sleepless in Seattle)’의 한 장면. 노라 애프론이 감독하고, 미국의 대표적인 배우인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이 주연을 맡아 1993년도에 제작된 이 영화는 시애틀을 배경으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만나게 된 남녀의 이야기를 낭만적으로 그리고 있다. ⓒ 트라이스타 픽쳐스

 
"자네는 무역 관련된 일을 했었으니 정말 여러 나라를 다녔겠군. 부럽네그려. 나는 기껏해야 수행원 신분으로 열하 한 번 다녀온 게 전부인데…"
"무슨 말씀이세요. 그렇게 여러 나라 다녀본들 그거 기억하는 건 제 자신 밖에 없잖아요. 형님은 단 한 번 다녀오셨지만 그 한 번의 여행담(열하일기)이 이렇게 몇 세기를 두고 사람들에게 읽히고 또 명작으로 손꼽히고 있으니 그게 정말 큰 업적이죠."


자신은 가보지도 못한 나라와 도시의 경험담에 다소 풀 죽은 듯했던 그가 내 말을 듣고 다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지만 애써 헛기침으로 돌렸다. 건배를 하고 다시 와인을 한 모금 마시던 그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아까부터 맛이 묵직해졌는데? 전에 마셨던 와인들은 보통 시간이 좀 지나면 묵직했다가도 열리면서 더 달달한 향이 나지 않았었나? 근데 이 와인은…아까는 무척 신선한 딸기향이 났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더 묵직하고, 뭐랄까, 약간 나무 그을린 것 같은 냄새랑, 음…무슨 향신료 같은 냄새도 좀 나고, 혀에 깔리는 느낌이 더 단단해진 것 같아."

"예, 아마 그럴 거예요. 이 와인은 카베르네 소비뇽이라는 포도 품종에 메를로라는 포도 품종을 섞은 건데요, 이 두 가지 포도를 혼합하는 건 프랑스의 보르도 스타일이죠. 원래 꽤나 묵직한 맛을 내는 조합인데 이 포도원이 자리잡고 있는 야키마 밸리의 레드마운틴 지역은 모래가 많고 탄산이 높은 토양을 가지고 있어서 묵직한 맛과 함께 아주 매끄럽고 우아한 느낌을 주게 되죠. 그래서 처음 열어서 마실 때는 가벼운 딸기향이 나는 듯하다가 이내 묵직하고 중후한 맛이 나더라고요."
"그렇군. 그 시애틀이라는 도시 얘기를 좀 더 해주게나. 거긴 살기 좋은가?"


오늘따라 그의 능력으로 날 그 당시로 끌고 가지 않는 게 좀 의아하고 아쉽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이렇게 추억담으로 얘기하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일은 꽤나 버겁고 정신 없이 바빴던 시절이었으니까.

"맑은 날씨 좋아하는 사람들은 별로 안 좋아할지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연중 비 오거나 흐린 날이 맑은 날보다 훨씬 많으니까요. 거기에 바다도 접하고 있고, 북쪽이라 제법 쌀쌀해서 늘 뭔가 따뜻한 걸 찾게 되죠. 그래서 커피 문화가 더 발달한 이유도 있을 거예요.

그래도 도시 자체는 조용한 편이고, 우리나라의 노량진 시장 같이 제법 크고 오래된 재래시장도 있는 데다가 뭐랄까 전반적으로 현대적이면서도 전통적인 요소도 잘 보존돼 있는 점이 참 마음에 들더군요. 그 시장은 동네 이름을 따서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Pike Place Market)이라고 불리는데 싱싱한 연어와 바닷가재, 각종 해산물들과 농가에서 직접 내다 파는 농산물들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고, 거기서 구입한 해산물을 와인 한 병 사서 바닷가에 들고 가 마실 수도 있어서 더 좋죠.

 

시애틀의 재래 시장인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태평양 연안이라는 특성 때문에 싱싱한 해산물과 내륙의 농산물들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어 현지인들과 관광객들이 모두 즐겨 찾는 명소이다. 세계 최대의 커피 체인이 바로 이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앞에서 처음 사업을 시작하기도 했다. ⓒ Wikimedia


아까 말씀드린 그 커피 체인의 1호점이 바로 그 시장 앞에 있구요, 그 옆의 작은 시장통 골목 안에는 조갯살로 끓인 클램차우더라는 크림스프를 파는 곳이 유명해요. 딱딱하고 큰 빵의 속살을 파내고 그 안에 클램차우더를 채워 주는데 맛은 좋은데 양이 은근히 많아서 먹을 때마다 끝까지 다 먹은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요.

시장 앞 거리에서는 거리의 악사들이 기타를 치거나 노래를 부르는데 어지간한 가수 뺨치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너무 엉터리같이 못 불러서 사람들이 도리어 웃으면서 지나치기도 했어요. 거기서 조금만 걸어 나오면 이제는 옛날의 유물이 돼버린 모노레일 열차를 탈 수도 있어요. 1962년의 세계 박람회 때 만든 모노레일이라는데 나름 그 시대에는 첨단 교통수단이었겠지만 지금은 그냥 시내에서 박람회 당시 만들어진 공원인 시애틀센터까지 제일 빨리 가는 교통수단이랄까요? 그래도 연간 200만 명이 넘게 이용한다더군요.

시애틀센터에 내리면 스페이스 니들이라고 우주선 모양으로 생긴 전망탑이 있어요. 거기 꼭대기에 올라가면 시애틀의 야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데, 거기서도 이 파니니를 팔았었죠. 맛이야 제가 지금 만든 것보다 못했지만, 그래도 그 파니니에 병맥주 한 병 곁들여 야경을 보면서 먹던 맛은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요."


정신없이 추억을 따라가다 보니 난 어느새 연암의 능력 없이도 시애틀에 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연암이 빙그레 웃었다.

"이런이런…자네가 날 시애틀로 데리고 간 것 같구먼. 말하는 내내 자네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게 무척이나 좋아했던 곳인 게 느껴지네 그려."
"하하하, 사실 다녀본 곳들 중에 마음에 드는 세 곳 뽑으라고 하면 그중에 하나가 시애틀일 거에요. 그래도 마지막으로 다녀온 지가 벌써 6-7년도 넘은 것 같으니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하네요."
"6-7년 가지고 뭘 그러나? 난 열하 다녀온 지가 200하고도 몇십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때의 일들이 생생하다네."
"애고, 송구합니다. 감히 대스승 앞에서 제가 주접을…"
"하하, 개의치 말게. 자네한테 그 뭐라더라…아, 꼰대 소리 하려던 건 아니고, 아직 자네는 젊고 기운이 있으니 원하면 다시 얼마든지 다닐 수 있을 거라는 얘길 하려던 거네."
"감사합니다. 잘 새기겠습니다."


그 후, 우리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각자의 와인잔만 비우고 있었다. 밖에서는 비가 그치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듯 창에 김이 서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그가 다시 물었다.

"그 미국에서는 이탈리아나 프랑스보다 와인을 많이 만드나?"
"미국 와인은 그 나라만큼이나 꽤 흥미로운 역사를 가지고 있죠. 미국의 서부 지역은 따뜻하고 일조량이 높은 데다 여러가지로 와인용 포도 재배에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만 불과 40~50년 전만해도 유럽사람들에게 미국산 와인은 와인이 아니라 포도주스에 불과하다는 혹평을 들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그런데?"


(27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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