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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회, 고기, 술, 건배사... 연말 하면 떠오르는 것들입니다. 기름과 숙취에 찌들지 않고 한 해를 마무리할 순 없을까요? 좀 더 색다르고 재밌게 연말을 나는 법을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tvN 드라마 <미생> 중 한 장면.
 tvN 드라마 <미생> 중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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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은 직장인에게 어떤 의미일까? 어린이에게는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이, 학생들에게는 겨울 방학이라는 선물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에게는 회사 송년회라는 선물(?)이 기다리고 있다.

물론 직장 동료들과 한 해를 마무리하는 자리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 송년회를 빙자한 회식, 의미 없는 대화, 늘어가는 빈 술병, 상해가는 내 간 때문이 아닐까.

최근에는 회식문화가 점점 변하고 있지만, 여전히 집에 안 가는 술고래 상사의 손에 이끌려 한겨울 밤거리로 내몰리는 직장인들이 있다. 회식은 제발 1차만 하자. 그리고, 회식 자리에서 하고 싶은 말은 조금 아껴 두었다가 사랑하는 가족에게 들려주는 나눔의 정신을 발휘해 보는 연말연시가 됐으면 한다.

직장인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내지만, 직장인이 되기 전에 맺어온 인간관계 또한 존재한다. 그리고, 1년 내내 소홀했던 인간관계를 12월 단번에 만회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린다. 내년에는 평소에 자주 연락하고 만나야겠다는 부질없는 다짐을 하며 말이다.

그런데 이런 모임도 회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결혼 전엔 회사 상사 욕, 결혼하고 나서는 배우자를 향한 푸념 아니면 재테크 노하우, 중년 이후에는 은퇴 이후 걱정 또는 인생 역전한 남의 집 이야기. 100세 시대, 아직도 창창하게 남은 송년회 자리에 긴급 처방이 필요한 시점이다.

대화 기근에 시달리는 모임, 대책이 필요하다
 

나에게는 초·중·고를 함께 졸업한 4명의 고향 친구가 있다. 나를 포함해 독수리 5형제. 대도시가 아닌 지방 소도시였기에 학창시절 동안 인연을 지속해올 수 있었다. 대학생이 된 후, 성적 따라 전국으로 흩어졌던 우리는 무사히 군 복무를 마치고 직장인이 돼 서울에서 다시 만났다.

다시 만난 우리는 청소년 때 못지않은 수다를 쏟아냈다. 스포츠와 이성 친구 이야기로 밤이 새는 줄도 몰랐고, 다음 날 출근을 해도 피곤하지 않았다. 그런 시절은 요즘 가을처럼 너무도 빨리 져버렸다. 

마흔이 넘으면서 우리들의 대화도 체력과 비례해 줄어들었다. 어린 시절에는 한 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꼬리를 무는 대화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제는 소개팅도 아닌데 찰나의 침묵이 자주 이어졌다. 소재 고갈은 드라마 작가들만 겪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도 정치 이야기만은 피했다. 촛불의 시대를 관통한 우리는 극명하게 다른 정치색으로 대화가 더 줄게 됐다. 어떤 날은 만난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아 자리를 마무리한 적도 있었다. 씁쓸하고, 슬프고, 안타까웠다.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고 몇 년 전부터 생각만 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어쩌면 작은 아이디어 하나로 충분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음 주 월요일 송년회 때 각자 크리스마스 카드를 써서 오자." 친구들이 모인 메신저 단체채팅방에 한마디를 던졌다.
 "다음 주 월요일 송년회 때 각자 크리스마스 카드를 써서 오자." 친구들이 모인 메신저 단체채팅방에 한마디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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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월요일 송년회 때 각자 크리스마스 카드를 써서 오자."

친구들이 모인 메신저 단체 채팅방에 한마디를 던졌다. 태생적으로 조용하던 단톡방은 심연의 고요 속으로 빠진 듯했다. 반나절이 지난 후에야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닌데 굳이 낯 간지럽게..."
"나 빼고 하면 정말 괜찮은 아이디어인 듯^^"


나는 협박과 회유를 적절히 버무려 선전포고했다.

"친구들아, 과거를 돌아봐라. 우리는 고등학교 때까지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고받던 낭만적인 소년들이었다. '아재'가 되지 말자고 그리 다짐하지 않았더냐?"

만일 이번에 아무도 카드를 준비하지 않더라도 나만큼은 기필코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점심시간, 회사 인근 문구점에서 친구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카드를 사러 갔다. 카드 코너에 선 내 모습이 조금 낯설었지만, 마음만은 산타의 존재를 믿던 시절로 잠시 돌아간 것 같았다. 4명의 친구 취향에 맞춰 카드를 골랐다. 1단계 성공이다. 시작이 반이다.

주말을 이용해 카드를 쓰기로 했다. 막상 20년 만에 친구들에게 글로 마음을 전하려고 하니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항상 해피바이러스를 뿜어내는 동수에게는 발모의 기적을, 프랜차이즈 사업에 첫발을 들인 중재에게는 백종원의 신화를, 골프를 너무나 좋아하는 찬동이에게는 프로골퍼 테스트 통과의 기적을 빌어주었다. 마지막으로 조금은 힘든 상황에 놓여 있는 그 녀석에게는 은총이 함께하길 기원했다.

눈물바다가 되진 않았지만

송년회 날이 밝았다. 막 기쁘고 설레고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릴 적 친구들로부터 카드를 받을 생각을 하니 묘한 기대감이 생겼다. 약속 당일에 부랴부랴 카드를 사온 친구부터 예상 외로 정성을 들인 친구, 결국 연하장으로 대신 하겠다는 친구까지. 다양한 인간군상이 나타났다.

서로가 겸연쩍어하며 카드를 교환하고 기분 좋게 건배를 했다. 나의 강요로 카드를 준비는 했지만 함께하는 시간 동안 개봉만은 하지 말자는 의견이 대세를 이뤘다. 나도 흔쾌히 동의했다. 어린 시절 산타 할아버지가 두고 간 선물상자처럼 카드 내용이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중간중간 드물게(?) 신경이 쓰이긴 했다. 카드가 대화의 불씨가 된 덕에 우리는 아주 오랜만에 웃고 떠들었다. 우리가 사랑했던 소년 시절처럼. 
 
눈물을 흘릴 만큼 감동적인 내용은 없었지만, 송년회를 계기로 오래된 친구들에게 카드를 받았다는 자체가 큰 선물이었다.
 눈물을 흘릴 만큼 감동적인 내용은 없었지만, 송년회를 계기로 오래된 친구들에게 카드를 받았다는 자체가 큰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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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인 장소는 강남이지만 서울에 사는 사람이 단 한 명뿐이었다. 먼 귀갓길을 고려해 오후 11시께 각자의 베드타운으로 향했다. 작지만 아늑한, 은행이 잠시 빌려준 내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 카드를 꺼내 보았다. 친구들이 건네준 카드에는 올해 내가 이룬 작은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나는 올해 내 이름 석 자가 찍힌 책을 냈다. 책을 출간하고 얻은 수익은 (별로 많지 않은) 연봉에도 훨씬 못 미친다. 하지만, 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성취감을 느끼고 있다. 나의 행복감은 그대로 얼굴에 나타났고, 친구들은 같은 직장인으로서 대리만족을 느낀다고 했다. 친구들(모든 직장인) 역시 자기만의 강점을 가지고 있다. 새해에는 모두 작은 도전을 시작하는 한 해가 되기를, 친구들이 준 카드를 읽으며 마음속으로 빌었다. 

역시 카드 쓰기는 잘한 일인 것 같다. 눈물을 흘릴 만큼 감동적인 내용은 없었지만, 송년회를 계기로 오래된 친구들에게 카드를 받았다는 자체가 큰 선물이었다. 카드를 다 읽고 나니, 고요했던 단톡방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내일이면 다시 조용해지겠지만. 카드를 사고 글을 쓴 시간 자체가 이미 서로에게 선물이 아니었을까. 카드를 교환하면서 어린 시절 추억 소환을 시작으로 대화가 끊임 없이 이어졌으니 다행이다.

"작가라 다를 줄 알았더니, 카드 내용은 영... 그래도 아이디어 하나는 기가 막혔다^^"
"사실 정말 하기 싫었는데, 막상 하고 나니 잘했구나 싶다. 친구야! 내년에도 또 하자."


이어 사진 2장이 올라왔다. 헤어지기 전에 다 같이 모여 거리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40대 아저씨들의 '셀카'라니. 눈까지 내렸다면 정말 꼴불견이었을 텐데.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는 때론 흠뻑 취해서 즐기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가끔은 술이 아닌 무언가가 송년회를 장식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덧 : 나의 계획을 듣자마자 호탕하게 비웃던 아내가 은근슬쩍 몇 장의 카드를 준비한 것을 보았다. 며칠 후면 그녀는 20년 지기 회사 동기들과 송년회를 한다.

태그:#망년회, #회식, #크리스마스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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