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층인지 여부는 어디에 사는가로도 드러난다. 스마트폰보다 집 전화를 주로 사용하던 시절에는, 집에 전화가 걸려올 경우에 "여보세요" 대신 "○○동입니다"라고 응대할 수 있다면 부촌에 산다고 볼 수 있었다.
 
그 시절에는 동명(洞名)이 부촌을 판별하는 핵심 기준이었다. 세상이 다 아는 재벌이거나 갑부 또는 유명 기업의 총수라면 굳이 동명을 확인할 필요가 없지만,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부자인지 여부를 가늠할 때는 동명 확인이 중요했다.
 
아파트에 안 사는 부유층도 많지만, 요즘에는 동명 못지않게 아파트 브랜드도 부의 척도로 작용한다. 도로명 주소가 사용되기 얼마 전, 서울 강동구의 어느 주민센터에서 봤던 일이다. 동 직원이 중년 여성 민원인에게 "어디 사세요?"라고 묻자, 민원인이 지번 주소를 대지 않고 "○○ ○○아파트에 살아요"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동 직원이 지번 주소를 되묻자, 그제야 민원인은 주소를 '실토'했다. 그 여성은 자기가 그 아파트에 산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하고 바랐던 모양이다.
 
물론 아파트 브랜드만이 절대적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같은 브랜드의 아파트일지라도 어느 도시, 어느 동네에 있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동명과 아파트 브랜드가 중첩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아파트 브랜드의 권위가 동명의 권위를 추월하지 못한 듯하다. 이 점은 한국인들의 대화 습관에서 드러난다. 집 전화를 받으며 "○○동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워도, "○○ ○○입니다"라며 아파트 브랜드를 대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아파트 브랜드를 통한 재력 과시가 아직은 충분히 자연스럽지 않다는 증거다. 아파트 브랜드의 권위가 한국인들의 심리 속에 아직은 충분히 정착하지 못했음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SKY 캐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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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JTBC 드라마 < SKY 캐슬 >에 등장하는 자칭 '상위 0.1%'들은 동명이나 아파트 브랜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재력을 과시한다. 이들은 스카이 캐슬이란 사택 단지에 사는 것을 자랑한다. 이곳은 최고 명문 사립인 주남대학교가 서울 근교 숲속에 세운 석조 주택단지다. 등장인물들의 대화에서 드러난 주택 가격은 수십 억 정도다. 등장인물들의 말마따나. 이곳은 돈이 있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데가 아니다. 이 대학 정교수 중에서 대학 병원 및 로스쿨의 최정예 교수만 입주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들은 정년까지만 여기서 거주할 수 있다. 그래서 이곳에 대대손손 거주하는 방법은 아이들을 자기 대학 정교수로 앉히는 길뿐이다. 자녀가 정교수가 된다 해서 스카이 캐슬을 무조건 물려줄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자기 자리를 자녀한테 세습해줘야만 스카이 캐슬을 안정적으로 물려줄 수 있다.
 
그러자니 이들은 자녀를 서울대 의대 등에 보내기 위해 혈안이 될 수밖에 없다. 자녀가 서울대를 졸업해야 주남대 정교수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수억 원의 사교육비도 아까워하지 않는다. 대학 교수 봉급으로는 감당할 수 없으므로 부모님한테까지 손을 벌린다.
 
또 아들을 서울대 의대에 합격시킨 이웃집으로부터 포트폴리오라 불리는 수험생활 노하우를 배우고자 거액의 돈을 들여 축하 파티까지 열어준다. 고급 호텔 같은 곳에서 대형 룸을 빌리고 음악가 연주팀까지 초청한다. 연주팀한테서 "여기서 보고 들은 것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다"는 좀 지나친 확약서까지 받는다. 이런 파티까지 열 정도로 이곳 주민들은 자녀교육에 열정을 기울인다. 꼭 자녀를 위해서라기보다 자기 가정의 상류층 생활을 연장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축하 연회를 열어준 한서진(염정아 분).

축하 연회를 열어준 한서진(염정아 분). ⓒ JTBC

  
스카이 캐슬에 거주한다는 사실에 대한 '상위 0.1%'들의 자부심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등장인물 중 하나는 위 축하 파티 때 "재벌도 안 부럽다"며 만족해 했다. 재벌이 그 장면을 시청했다면, 콧속에서 바람이 나왔을 수도 있다. 부인은 자녀교욕에 거의 전념하다시피 하고 남편은 대학교수 봉급을 받는 스카이 캐슬 주민들이 자신들의 경제력을 재벌에 빗대고 있으니, 이들이 얼마나 자부심을 갖고 사는지를 느낄 수 있다.
 
이들은 외형상으로는 동명이나 아파트 브랜드명으로 재력을 과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 어디 산다' 하는 식으로 부를 과시하고 있으므로, 동명이나 아파트 브랜드명을 자랑하는 사람들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이런 양상이 비단 오늘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들도 기본적으로 그런 방식으로 부를 과시했다. 양반들은 성리학을 배운 유교 철학자들이므로 '상위 0.1%'들처럼 천박하게 재력을 과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양반들 역시 점잖은 방법으로나마 부를 과시했다. 그들도 '나 어디 산다' 하는 식으로 그렇게 했다.
 
사극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한양을 제외한 지방에서는 양반 가정이 단독으로 거주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양반들은 가문 단위로 집성촌을 이루었다. 특정 지역에서 집성촌을 이룬다는 것은 그 가문이 그 지역 토지 상당부분을 소유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이것은 그 지역에 거주하는 노비나 하층 양인 상당수가 그 집안의 소작농임을 뜻했다. 그렇기 때문에 집성촌에 거주하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부자 동네나 고급 브랜드 아파트에 사는 것 이상을 의미했다. 
 
 스카이 캐슬 주민들의 연회.

스카이 캐슬 주민들의 연회. ⓒ JTBC

  
양반(兩班)은 원래는 무반·문반 공직자를 통칭하는 개념이었지만, 나중에는 공직자를 배출한 특권층 가문을 뜻하는 개념으로 바뀌었다. 이런 가문들은 지역 사회에서 향회로 통칭되는 단체를 구성하고, 집성촌을 이룬 가문들만 신입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양반이란 것은 바로 이 향회에 가입한 가문들이었다. 한국사의 권위자인 미야지마 히로시 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가 도교대 교수 시절에 쓴 <양반>에서는 향회가 신입 회원들을 받아들이는 조건 중 하나를 이렇게 정리했다.
 
"여러 대에 걸쳐 동일한 집락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을 것. 이런 대대의 거주지를 세거지(世居地)라고 하는데, 세거지에서는 양반 가문이 동족 집락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오늘날에는 부유한 동네나 고급 브랜드 아파트에 거주하면 남한테 인정을 받을 수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특정 지역 거주'에 더해 '세거(世居)'라는 조건까지 필요했다. 자기 대(代)뿐 아니라 조상 때부터 대대로 집성촌에 거주했어야만 양반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조건이 오늘날보다 훨씬 까다로웠던 것이다. '나 어디 산다'로는 부족하고 '조상 때부터 대대로 어디 산다'고 말할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스카이 캐슬 주민들의 독서토론회.

스카이 캐슬 주민들의 독서토론회. ⓒ JTBC

  
그런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일평생 속을 태운 인물로 송순(1493~1583년)을 들 수 있다.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 때 태어나 연산군·중종·인종·명종·선조 시대를 살았던 그는 전라도 담양에서 출생한 뒤 과거시험에 급제하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하지만, 집권세력인 훈구파가 아니라 야당인 사림파에 속했다. 그런데도 관운은 괜찮았다. 훈구파 집권 시절에도 개성유수(개성시장)나 이조참판(행정안전부 차관), 대사헌(검찰총장) 같은 요직을 역임했다.
 
하지만 그는 오래도록 양반 대우를 받지 못했다. 고향인 담양 향회가 회원으로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외가가 담양에서 집성촌을 이룬 역사가 짧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까지도 데릴사위 제도가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외가에서 출생했다. 그래서 외가가 집성촌을 이룬 기간을 근거로 향회가 입회 자격을 심사했던 것이다.
 
송순은 결국에는 양반 자격을 인정받았다. 이때가 1569년 이후였다. 70대 중반을 넘긴 뒤에야 양반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담양 향회가 마음을 연 데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1567년에 선조가 즉위하면서 훈구파 정권이 붕괴하고 사림파 정권이 성립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송순이 사림파 정권 하에서 다시금 대사헌이 됐기 때문이다. 셋째는 송순이 대사헌이 된 뒤 고향에 돌아와 대규모 연회를 열어줬기 때문이다. 이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송순은 뒤늦게 양반 대우를 받게 됐다.
 
만약 외가가 집성촌을 이룬 역사가 좀더 오래됐다면, 생원이나 진사만 됐더라도 일찌감치 양반 대우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상 때부터 대대로 어디 살았다'는 그 말을 할 수 없어서, 그는 70대 중반까지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도 양반 대우를 받으려면, 어디에 사는가가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했다. 오늘날에는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거나 아니면 돈을 많이 벌어 부유촌에 들어가면 남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자기뿐 아니라 조상 때부터 특정 지역에 살았어야 지역 사회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오늘날보다 훨씬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해야 특권층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SKY캐슬 집성촌 송순 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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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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