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른베르크의 재판> 포스터

<뉘른베르크의 재판> 포스터 ⓒ Roxlom Films Inc.

 
2018년이 끝나가는 현재, 대한민국은 여전히 국정농단 세력과의 다툼을 끝내지 못하고 있다. 현재는 올바른 법 집행을 통해 공정한 재판을 이끌어야 될 사법부가 앞장서서 '사법농단'을 행했다는 의혹에 대한 검찰수사가 이어지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및 여러 전직 대법관들은 비자금 조성, 검찰 협박 문건, 재판 거래 등 다양한 혐의를 받고 있다.
 
삼권 분립 원칙에 따라 입법과 행정, 사법을 담당하는 각각의 기관들은 상호간 견제를 통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사법부의 판결이 행정부의 입김에 따라 움직인다면 재판의 공정성을 기대하기 힘들다. 영화 <뉘른베르크의 재판>(1961)은 이런 불공정한 재판을 통해 판결을 내린 판사들을 재판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다.
 
<뉘른베르크의 재판>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이 주체가 되어 패전국 독일이 저지른 반인도적 행위에 대해 개인적 책임을 추궁한 역사적 사건인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을 다룬다. 다만 이 작품 속 피고들은 헤르만 괴링이나 마르틴 보어만 같은 전범들이 아니다. 피고인 네 사람은 법관들이다.

그들은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정권에 유리한 판결을 내려왔다. 당시 독일의 이런 판결 중 대표적인 판결이 소피 숄 남매의 판결이라 할 수 있다. 뮌헨 대학 구내에서 히틀러의 만행을 고발하고 독일 국민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전단을 뿌리다 체포된 그들은 체포 후 고작 나흘 만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들의 재판을 위해 독일에 온 미국인 수석판사 댄 헤이우드는 두 가지 측면에서 판결의 고민을 겪는다. 첫 번째는 그들이 '법에 따라 판결을 내리는' 판사의 업무를 수행했을 뿐이라는 점이다. 언스트 야닝을 포함한 네 명의 법관은 사회에서 존경받는 지식인들이다. 그들은 독일의 국민으로써 국민들이 뽑은 대표들이 만든 법에 따라 재판을 진행했다. 이 점을 법관들의 변호사인 한스 롤프는 강조한다.
  
 <뉘른베르크의 재판> 스틸컷

<뉘른베르크의 재판> 스틸컷 ⓒ Roxlom Films Inc.

 
그는 언스트 야닝을 비롯한 법관들은 자국법에 따라 재판을 진행한 애국자들이라 말한다. 당시 독일 국민들은 나치를 원했고 지지했다. 그리고 나치가 만든 법에 따라 법관들은 재판을 진행했을 뿐이라 그는 주장한다. 두 번째는 그들이 처한 위협에 전 세계가 침묵했다는 점이다. 유능한 변호사 한스 롤프는 언스트 야닝이 내린 판결이 나치의 위협 때문이며 그에게 이런 위협이 당도하도록 방치한 건 미국 등 선진국들의 방치 때문이라 말한다.
 
히틀러가 침략전쟁의 야욕을 드러낸 폴란드 침공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지만 폴란드 국민들을 위한 군사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한스 롤프는 라디오를 통해 전 세계인이 알았을 히틀러의 연설을 통한 그의 야욕과 히틀러가 전쟁을 할 수 있게 불가침조약을 맺어준 소련, 2차 대전 중 유럽에 무기를 팔며 전쟁을 방조한 미국 등 전 세계가 잘못이 있다 주장한다.
 
히틀러의 야욕과 나치의 만행을 알고도 침묵한 연합국 때문에 언스트 야닝을 비롯한 법관들은 다가오는 위협에서 보호받지 못했다고 변호인은 주장한다. 그는 언스트 야닝의 죄는 전 세계가 짊어져야 될 죄이기 때문에 개인에게 책임을 물 수 없다 주장한다. 그들 개개인에게는 나치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한 생존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베를린의 상황을 두고 소련과 미국이 대립을 펼치며 헤이우드는 무죄 판결을 내리라는 압력을 받는다. 독일 국민들이 미국을 더 지지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존경받는 법관에게 유죄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정치권의 논리가 작용한 것이다.
 
그럼에도 헤이우드는 이들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그는 판결문에서 '어떤 모습으로 생존하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민주주의의 근간은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주인이 국민이라는 점 때문에 국가를 개인의 연장선에 있는 실체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헤이우드는 말한다. 그가 말하는 국가란 '무언가를 표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국가가 표방해야 될 가치는 '정의와 진실과 개인의 가치'이다.
  
 <뉘른베르크의 재판> 스틸컷

<뉘른베르크의 재판> 스틸컷 ⓒ Roxlom Films Inc.

 
언스트 야닝을 비롯한 법관들의 재판은 개인이 아닌 문명을 향한 재판이라 헤이우드는 말한다. 그는 문명이 지향해야 될 방향성을 제시한다. 다수의 국민들의 목소리에 힘을 얻은 '떼법'이 아닌 표방하는 가치를 지니고 나아가야 되는 것이 국가이고 그 가치에 따라 판결을 내려야 되는 곳이 법원이라 말한다. 자신의 죄를 양심 고백한 언스트 야닝과 헤이우드, 두 사람의 대화는 이런 가치의 중요함을 강조한다.
 
언스트 야닝은 "나는 내 판결로 인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리 될 줄 몰랐다. 그것만은 꼭 믿어 달라"고 호소한다. 이에 대해 헤이우드는 단호하게 답한다. "당신이 무고한 사람에게 판결을 내린 순간, 이미 그리 된 겁니다." 재판에는 문명과 사람을 향한 가치가 필요하다.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사법부는 독립을 인정받으며 법관은 사람이 사람을 심판한다는 신과 같은 권한을 부여받은 것이다.
 
헤이우드의 판결이 과연 옳은 것인지 생각해 볼 여지는 있다. 개인이 생존이라는 환경 앞에서 선택권이 줄어든다는 점도, 정의를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에 옮기기 힘들다는 점도 한 번쯤 생각해 볼 문제다. 다만 이 영화가 말하는 사법부가 지녀야 될 가치와 그들이 가져야 될 사명은 참으로 중요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아쉽게도 현 대한민국 사법부에게는 언스트 야닝 같은 양심도, 헤이우드 같은 단호함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준모 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 키노라이츠, 루나글로벌스타에도 실렸습니다.
뉘른베르크의재판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