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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9월 19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9월 평양공동선언 합의서에 서명하고 북한 동창리 엔진 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 영변 핵시설 영구 폐기 등 합의사항을 발표했다. 사진은 2008년 6월 27일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과시하기 위해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을 폭파하는 장면.
▲ 남북 첫 비핵화 방안합의, 영변 핵시설 영구 폐기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9월 19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9월 평양공동선언 합의서에 서명하고 북한 동창리 엔진 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 영변 핵시설 영구 폐기 등 합의사항을 발표했다. 사진은 2008년 6월 27일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과시하기 위해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을 폭파하는 장면.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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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영변 핵시설을 방문한 적이 있는 미국의 유명한 핵물리학자가 미국이 북한에 '완전한 핵신고'를 우선 요구하는 것은 비핵화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관계정상화 조치와 북한의 5메가와트 원자로 파괴로 신뢰구축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28일 미국 북한 전문 매체 <38노스>는 '북한의 선 핵신고를 주장하는 게 큰 실수인 이유'라는 제목의 지그프리드 헤커 스탠퍼드대 명예교수의 논평을 실었다. 그는 지난 2004년부터 2010년까지 북한 영변 핵 시설을 네 차례 방문했고 우라늄농축시설 내부를 살펴보기도 했던 미국의 저명한 핵물리학자다.

지그프리드 교수는 "김정은이 핵 프로그램의 완전한 신고를 선불로(up front) 해야 한다는 주장은 통하지 않을 것"이라며 "그렇게 하는 것은 2020년 미국 대선 이후에도 계속될 북한의 비핵화 과정에 필요한 신뢰를 구축하기 보다는 더 많은 의심만을 낳을 뿐"이라고 단언했다.

헤커 교수는 우선 지난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남북이 합의한 '미국의 상응조치 시 영변 핵시설 폐기'라는 약속에 대해 "영변 핵단지는 북한 핵 프로그램의 심장이다. 이 시설을 폐쇄하고 폐기하는 것은 플루토늄과 삼중수소(수소폭탄에 필요한) 생산을 중단시킬 것이고 고농축 우라늄 생산에 심대한 지장을 주기 때문에 아주 큰 제안"이라고 평가했다.

지난 6월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북한과 관계정상화에 원칙적인 합의를 했던 미국이 UN의 대북제재 및 독자제재를 더욱 강화하며 '최대 압박'을 지속하고 있는데 대해 헤커 교수는 "이런 식의 접근은 막다른 길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완전한 핵 신고는 막다른 길이다. 그건 항복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김정은은 항복하지도 않았고 항복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며 "미국 군사 계획 입안자들에게 목표물 리스트를 주는 것이고, 핵 프로그램의 필연적인 종료와 그의 정권까지도 봉인해버릴 수 있기 때문에 김정은이 보기엔 너무 위험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검증은 논쟁적이고 지리... 신뢰 없인 2008년 실패 되풀이"

핵신고 이후에는 이에 대한 검증작업이 따르게 되는데 헤커 교수는 "논쟁적이고 지리한 일이 될 것"이라 예상했다. 핵무기 프로그램은 ▲ 핵폭탄의 연료 ▲ 무기화 과정 ▲ 운반수단이라는 세 가지 상호연관 요소들로 이뤄지는데 각 요소별로도 이미 수십 개의 장소와 수백 채의 건물, 수천 명의 종사자가 있어 방대한 규모에 대한 검증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핵폭탄의 재료가 되는 연료 분야만 해도 검증 대상이 엄청나다. 1986년부터 가동한 영변 5메가와트 흑연감속 원자로, 1967년에 영번에 세운 IRT-2000 연구용 원자로 등 실제 가동 이력이 있는 원자로로부터 실험용 경수로, 50메가와트, 200메가와트 흑연감속로 등 실제 가동한 적이 없는 원자로에 대한 검증도 필요하다.

사용한 핵연료를 플루토늄 연료로 만드는 재처리시설의 가동기록과 방사성 물질 격납고 보관기록, 재처리 및 핵무기화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 관련 기록 등을 검증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영변의 다른 핵시설들이 폐쇄된 뒤에도 핵 폐기물의 안전한 이전을 위해 재처리시설은 가동 상태로 남아야 한다는 점 등도 검증이 매우 복잡해질 수 있는 요소라고 헤커 교수는 지적했다.

북한이 이미 폐기한 풍계리 핵실험장의 갱도도 다시 파서 조사를 해야 할 상황이다. 핵실험에 쓰인 핵물질의 유형과 양을 알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핵폭발 실패 시 플루토늄이나 고농축 우라늄이 갱도에 남아 있을 가능성도 검증해야 한다.

헤커 교수는 "내가 보기엔 북한이 가진 플루토늄의 양은 20~40킬로그램 사이인데, 플루토늄 보유량을 신고하고 검증하는 일은 엄청난 작업이 될 것"이라며 "현재의 적대적인 환경에서 이같은 일이 이뤄질 것이라고 보기 힘들고, 미국 정부가 제시해온 시간 안에 되지 않는다는 건 확실하다"고 단언했다. 플루토늄의 경우만 해도 이렇게 검증이 어려운데, 고농축 우라늄과 중수소, 삼중수소까지 범위를 넓히면 훨씬 더 큰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것은 자명하다는 것이다.

헤커 교수는 지난 2008년 부시 대통령 때 북한이 영변 원자로와 재처리시설의 가동기록으로 1만8000쪽이 넘는 기록을 제출했지만, 미국이 추가 신고를 요구했고 북한은 '워싱턴이 골대를 옮겼다'고 반발하면서 비핵화 과정이 끝나버린 일을 언급했다.

그는 "그게 10년 전이다. 그동안 신고와 검증을 더욱 골치 아프게 만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면서 "평양과 워싱턴 사이에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신고를 먼저 하는 데에 북한이 동의하게 할 수준의 신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상호 신뢰가 없는 상황에선 2008년의 실패를 되풀이 할 뿐이라는 얘기다.

헤커 교수는 대안으로 "'핵무기나 핵무기 프로그램이 없는 북한'이라는 최종 상태에 대한 합의로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면서 "민간 핵·우주 프로그램에 대해선 협상과 협력(을 통한 해결) 가능성을 남겨둬야 하지만 핵무기와 직접적으로 간련된 모든 시설과 활동들은 결국엔 끝장을 내야 한다"고 핵협상의 목표를 제시했다.

 
미국의 북한 전문 매체 <38노스>에 실린 핵물리학자 지그프리드 헤커 명예교수의 논평.
 미국의 북한 전문 매체 <38노스>에 실린 핵물리학자 지그프리드 헤커 명예교수의 논평.
ⓒ 38NO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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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계정상화 - 비핵화 교환' 뒤 원자로 파괴로 신뢰구축"

그는 이어 "북한이 먼저 완전한 핵신고를 하라고 주장하기보다는, (미국이) 상응조치를 취하면 그에 대한 답으로 북측이 핵위협을 줄이는 중대조치를 위한다는 데에 양측이 먼저 합의해야 한다"면서 "북측이 취할 다음 조치로 괜찮은 것은, 5메가와트 플루토늄 생산 원자로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제안했다.

헤커 교수는 "(북미) 싱가포르 공동성명에서 약속한 것처럼, 관계 정상화를 위한 미국의 조치와 이런 조치가 맞아떨어지면, 북측이 단계적인 신고 절차를 시작하는 데에 필요한 신뢰를 구축할 수 있고, 단계적인 신고는 영변에서의 핵무기 관련 작업을 포함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앞에서 언급한 전체 핵 프로그램과 관련된 분야로 확대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관계정상화 조치와 북한의 비핵화 조치의 교환 원칙'에 먼저 합의하고, 북한은 영변 5메가와트 원자로를 파괴하는 과감한 조치를 하면, 양측의 신뢰가 구축될 수 있다는 얘기다. 또 이같은 신뢰를 통해 단계적인 핵신고와 단계적 검증이 이뤄질 수 있고, 이런 방식으로 완전한 비핵화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제안이다.

헤커 교수는 다음과 같이 논평을 마무리하면서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미국과 한국의 노력 방향을 제시했다.

"싱가포르 정상회담과 북-남 정상회담에 의해 전략적인 국면이 시작됐지만 불행하게도 협상과정이 순조롭게 시작하도록 하는 그런 전술적인 단계가 뒤따르진 못했다. 북과 남은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경로를 만들어 갈 준비가 돼 있는데 워싱턴의 환경은 최악인 상황이다. 트럼프 팀은 진전이 있다고 하면서도 '최대 압박' 유지를 주장하고 있다. 북한 외무성은 '관계 개선과 제재는 서로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북한 관찰자 대부분은 평양과는 협상할 수 없다거나 트럼프 대통령의 북한에 대한 주장들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야 말겠다는 낡은 생각에 빠져 있다.

한반도의 핵 긴장이 드라마틱하게 줄어든 상황에서 김정은의 경제발전 드라이브가 결국 비핵화로 이어질지 알아볼 때가 왔다. 김정은은 핵무기가 제공할 걸로 보이는 이익보다 더 큰 경제발전에 핵무기가 중대한 장애가 된다고 결정할 수 있다. 워싱턴과 서울은 이런 잠재적인 변혁을 저해하기 보단 북돋우는 작업을 함께 해야할 것이다."

태그:#헤커, #38노스, #비핵화, #원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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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상근기자. 평화를 만들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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