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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풍경
 교실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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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이들 앞에서는 한국사 선생님이지만, 학교에서는 정보 관련 부서에 소속된 개인정보보호 담당자다. 후자는 학년 초 사무 분장을 통해 배정된 1년 동안의 고유 업무다. 교사에겐 수업시간 아이들 가르치는 일 외에, 흔히 '잡무'라고 불리는 행정적인 업무가 주어져 있다.

사무 분장을 할 때 교사별 담당 교과나 재능 등을 반영하긴 하지만, 업무량에 차이가 커서 로테이션 방식으로 업무가 배정되는 게 보통이다. 교무부장이나 학생부장 등 모두가 기피하는 업무인 경우엔 근무평정에서 혜택을 받는다. 승진하려면 반드시 거쳐 가는 필수코스로 여겨지는 이유다.

교사 수가 적은 시골의 작은 학교라면, 한 명이 두세 개의 부장을 겸직하기도 한다. 서로 관련이 없는 여러 업무를 동시에 처리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이야기다. 말하자면, 학비 지원 업무 담당자가 겸해서 학적 업무를 맡고, 평가 담당자가 생활지도 업무도 처리해야 하는 셈이다.

업무량으로는 그들과 비교할 순 없겠지만, 개인정보보호 담당자 일도 부담스럽긴 마찬가지다. 정보 교과 교사라면 식은 죽 먹기일지 모르나, 컴퓨터를 다루는 것조차 서툰 한국사 교사에겐 공문 내용을 읽는 것조차 버겁다. 참고로, 대학입시에 목맨 인문계고등학교에서 정보 교과가 개설된 학교는 거의 없다.

개인정보보호 업무 외에도 해야 할 일은 더 있다. 학교 정보공시, 정보 보안, 정보화 역기능 관련 업무도 처리해야 한다. 대개 학교에선 '정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죄다 동일한 업무로 취급되기 일쑤다. 나아가 '정보'는 컴퓨터와 관련되어 있다는 인식 때문인지 홈페이지 관련 업무 역시 세트메뉴처럼 한 덩어리로 묶인다.

난항 겪는 지자체 학교지원센터 조직 개편

행정안전부나 교육부 등 상급기관을 가리지 않고 내려오는 공문을 보면, 이게 교사가 해야 할 일이 맞나 싶을 때가 적지 않다. 문서에 적힌 지시 사항 자체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예컨대, 얼마 전 홈페이지의 웹 취약점을 점검 후 조치하고 보고하라는 공문은 '외계인의 언어'로 가득했다.

'보안 취약점 종류는 인젝션과 크로스사이트 스크립팅, 점검 항목은 Bufferoverflow 취약점과 파라미터 변조, SQL 삽입, XPATh 삽입, 스크립트 삽입 등'

점검 항목과 필수 조치 항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첨부파일을 보는 순간 담당자로서 아연실색했다. 이걸 일선 학교로 내려보낸 교육청 담당자는 과연 내용을 이해하고 있는지 전화를 걸어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학교 내엔 아는 사람이 없어 외부 업체의 도움으로 간신히 해결할 수 있었다.

이처럼 '잡무' 중엔 교사로서 도저히 할 능력이 안 되는 일도 있고, 할 수는 있으나 너무 많은 시간이 드는 과중한 업무도 있다. 문제는 이로 인해 교사들이 수업 연구와 생활지도라는 본연의 임무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점이다. 그래선지 '잡무의 경감'은 선거 때마다 모든 교육감 후보들이 내놓는 거의 한결같은 공약이기도 하다.

듣자니까, 현재 전남 교육청이 일선 교사들의 행정 업무 경감을 위해 지자체마다 학교지원센터를 설치하는 조직 개편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 지방선거 때 장석웅 교육감이 내건 공약 중의 하나로, 당시엔 귀가 솔깃했다. 관련 조례의 개정을 앞두고 전남 도의회 교육위원들도 조직 개편의 방향과 취지에 대체로 공감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하지만 교육청 소속 일반직 공무원들의 반발이 거세 난항을 겪고 있다고 한다. 교육청에서 근무하다 도내 각 지자체 학교지원센터로 상당수가 파견을 나가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교육청 공무원 노조 측에서는 조직 개편을 추진하면서 노조와 사전 협의가 없었던데다 한쪽의 희생만 일방적으로 강요한다는 이유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건 없다

7년 전쯤으로 기억한다. 어느 교육지원청에 출장을 갔다가 장학사와 연구사 등으로 불리는 교육청 소속 공무원들과 언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간판만 '교육지원청'으로 바꿔 달았을 뿐 이전의 '교육청' 시절과 업무상 달라진 게 없다며 문제를 제기했다가 그들로부터 되레 면박만 당했다. 그들의 권위적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당시 우리의 주장은 단순했다. 교육청으로부터 쏟아지는 '잡무' 탓에 수업에 지장을 받고 있으니, '잡무'를 줄여주든지 교사 수를 늘려주든지 해야 한다는 요구였다. 업무 부담으로 치면, 교육청 소속 공무원들이 일선 학교의 교사 수에 견줘 너무 많다는 '위험한' 발언까지 나왔다. 심지어 '교육지원청의 인원을 일선 학교에 배치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규정상 고등학교는 시교육청 직속 기관이고, 중학교 이하는 교육지원청이 담당하도록 돼 있다. 교육과정과 초중고 학교 운영 방식에 따라 특화된 것도 아니고 업무상 둘은 별반 차이가 없다. 시교육청이 공문을 하달하면 고등학교는 바로 오고, 중학교는 교육지원청을 거쳐 하루 이틀 뒤에 도착한다는 정도가 다를 뿐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들의 답변은 늘 두루뭉술하다. 일선 교사들의 잡무 경감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 공문 하달을 최소화하고, 품의 과정을 단순화하여 부담을 덜어주겠다는 방안을 내놓았지만, 정작 그때뿐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인터넷이나 사무자동화 등 기술의 발달로 인해 다소 편리해진 걸 빼면, 여전히 그들의 역할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많은 교사들은 교육지원청이 필요한 이유를 교육청 소속 공무원들이 옮겨 다닐 '자리' 때문이라 여긴다. 어떤 조직이건 없는 자리를 만들긴 쉬워도, 있는 자리를 없애긴 어려운 법이니까. 더욱이 일선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교육청으로 '영전한' 장학사나 연구사라면, 자리가 사라지거나 줄어든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교육청에서 나가 교사들에게 맡겨진 행정 업무를 분담하라는 건 '좌천'을 넘어 '치욕'으로 생각할 게 뻔하다.

교직 사회는 수평적 조직이어야

물론, 생활 터전까지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는 상황이니, 그들의 반발을 막무가내 몽니로만 볼 순 없다. 하나 분명한 건, 누구든 일정 부분 불이익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켜켜이 쌓인 적폐를 청산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학교와 교사 중심으로 조직이 개편되어야 한다는 대의에 공감한다면, 기꺼이 '하방'도 감내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한다'며 조직 개편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 서로 짐을 나눠 지자고 요구하는 게 맞다.

그러자면, 학교 안에서부터 '조직 개편'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교장, 교감 등의 직위를 승진으로 여기는 그릇된 인식부터 교정이 필요하다. 수업시간에 아이들을 만나야 하는 교사가 교육의 중심일진대, 교직 사회는 수평적 조직이어야 한다. 교장과 교감은 '상관'이 아니라 '지원자'로서 교사의 수업능력 향상을 위해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교장과 교감, 행정실 직원들이 '잡무'를 도맡고, 교사들이 수업과 생활지도를 담당하는 곳이야말로 '건강한' 학교다. '언 발에 오줌 누기'일지언정, 학교마다 한두 명씩 교무업무보조를 위한 실무사를 둔 이유도 교사들이 온전히 수업과 생활지도에 힘쓰도록 돕기 위해서다. 여전히 교사들이 '잡무'에 시달리는 현실에서, 교육청이든 학교든 '조직 개편'은 당위다.

한때 '장학사는 머리이고, 교사는 수족'이라는 말이 있었다. 장학사가 학교를 방문하는 날이면, 수업을 하다 말고 대청소를 해야 했던 시절의 이야기지만, 지금도 우리네 인식 속에서는 별반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장학사와 교사의 관계는, 곧 교육청과 학교의 관계다. '교육청은 명령하고, 학교는 복종한다'는 낡은 고정관념이야말로 이번 갈등의 본질이다.

결국 기득권의 문제다. 지금껏 일선 교사가 처리했던 '잡무'를 대신 떠맡는 것에 대한 교육청 소속 공무원 노조의 반발에, 교육 관련 시민단체도 전교조도 입장을 밝히기 난처한 상황이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하다. 당사자들끼리 한 걸음씩 양보하라지만, 학교와 교사는 양보할 게 없다. 조직 개편의 취지에 모두 공감한다면, 문제는 다시 교육청이다.

태그:#전남 교육청, #학교지원센터, #장석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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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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