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를 타고 떠나는 메리(루시 보인턴 분)를, 빗 속에 선 채로 우두커니 바라보는 프레디(라미 말렉 분)의 뒷모습.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호시탐탐 눈물을 흘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영혼의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난 후, 자꾸만 기세를 확장하려는 드는 우울에 두 손 들고 싶은 요즘이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기세에 밀려 왔던 우울이 멈칫한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포스터.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포스터.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과도한 감정이입만 남았다면 <보헤미안 랩소디>는 그냥 그런 음악 영화였을 것이다. 눈물의 시작은 프레디의 등 뒤에 서린 '외로움' 때문이었다. 갈구하나 채워질 수 없는 그 갈망이 절절했다. 빗속에서도 느껴지는 그 목마름이 안타까웠다. 완전한 해갈은 존재할 수 없음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초라함이, 그 서러움이 기가 막혔다.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어간다. 이렇게 삶은 시작되자마자 이율배반을 동반한다. 나 외에 다른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대상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끝도 없는 고행이 시작된다. '네'가 있기에 '나'는 외롭고, '나'는 외롭기에 '네'가 있어야 한다.

극중 프레디는 메리에게 "이 반지는 절대로 빼면 안 된다"고 당부한다. 이는 불안하고 외로운 프레디의 고행이 자신을 온전히 받아줄 대상을 찾는 '기행'으로 이어진 장면이었다. 이 기행의 끝은 이미 절망이 자리하고 있다. 그 누구도 자신을 온전히 받아줄 수 없다.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의 대표주자 격인 부모조차도 자식에게 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자신조차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 쉽지 않다.

반지에 담긴 약속을 프레디가 깼듯, 타인을 향한 절대적인 수용은 그것을 갈구하는 본인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갈망은 추구하는 주체조차도 불가능한 이율배반을 미리 내포하고 있다. 삶과 죽음이 동시에 존재할 수 없듯,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 어떤 것에서도 완전한 일치를 느끼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일시적으로 느껴지는 행복한 감정에 만족·충만·기쁨·합일 등의 이름을 붙이며 잠시 안도할 뿐이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한 장면.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한 장면.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채워질 수 없는 것을 갈구하는 이 삶의 허무를 프레디는 빗속에서 처절하게 깨달은 것이리라. 자신이 느끼던 잠깐의 안도가 착각이고 허구였음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란 가능하지 않은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찰나의 각성. 때로 체념은 삶의 또다른 동기가 된다.

이제 프레디는 불가능한 것을 향한 몸부림을 멈추고, '그나마' 가능한 것들을, 자신을 위해 나은 것들을 추스리기 시작한다. 자신을 온전히 받아줄 대상을 찾는 행위들이 실은 자신을 괴롭히고 소모하는 일이었다. 메리가 속삭이는 '컴 홈(Come home)'은 복제품을 찾는 고행을 멈추고, 프레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라는 당부이다.

고독을 달래줄 것은 고독뿐이라는, 고독을 수용할 때 고독이 잦아드는 지독한 삶의 모순. 고독한 '나'는 고독한 '너'를 보며 고독한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한다. 고독을 인식한 서로는 응시만으로도 시름을 나눈다. 어딘가에도 존재를 온전히 받아내며 존재와 온전히 합치하는, 그런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삶은 태생부터 주어지는 이율배반을 받아들이며 살아내는 것이며 살아지는 것이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한 장면.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한 장면.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존재의 이 숙연함에 눈물이 난다. 허무를 끌어안고 이 삶을 헤쳐나가는 우리들은 눈물겹다. 어찌할 수 없어 슬프고 아픈 것처럼, 슬프고 아픈 것도 어찌할 수가 없다. 그렇게 눈물을 흘렸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양선영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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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대한민국 한 귀퉁이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그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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