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22 10:38최종 업데이트 18.11.22 10:42
서촌의 시작 영추문 인근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을 지나 서쪽 담을 끼고 돌아가면 서문인 '영추문(迎秋門)'을 만나게 된다. 영추문은 광화문이나 건춘문(建春門)과 달리 아직 일반인에게 개방되지 않아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은 아니나, 고궁의 정취를 느끼기에는 분위기가 좋은 곳이다.

그래서인지 경복궁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이곳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또한 영추문 근처에는 여러 문화적인 시설들이 있어, 복잡한 현대 사회에 사는 시민들이 쉴 수 있는 문화적 공기의 저장소 같은 곳이다.
       

현재의 영추문 ⓒ 황정수

 
영추문 정면에는 근대기에 숱한 문인들이 드나들었다는 보안여관이 옛날 모습 그대로 있고, 그 옆 우체국 건물 자리엔 주로 현대미술 전시를 하는 제법 멋진 화랑이 자리하고 있다. 화랑 바로 왼쪽은 박정희 시해 사건의 주인공인 김재규의 집터가 있는데, 지금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들의 쉼터 역할을 한다.

그 옆집에 서 있는 몇 백 년 된 은행나무는 어느 보호수 못지않은 자태를 자랑한다. 한 골목 안쪽으로는 추사 김정희가 살던 집터와 백송이 있고, 그 근처에는 젊은 학생들이 많이 찾는 대림미술관이 있어 늘 젊은이들로 시끌법석하다. 또한 근래에는 역사와 관련된 서적을 주로 파는 책방도 들어와 도심이지만 문기가 가득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경복궁의 서문 영추문
 

위에서 왼쪽부터 광화문, 건춘문, 영추문, 신무문 ⓒ 황정수

 
경복궁에는 네 개의 큰 문이 있다. 남문인 '광화문'은 정문인 만큼 웅대하고 건축 또한 화려하여 남대문과 함께 서울의 양대 경관이라 할 만하다.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은 평상시에는 통행하지 아니하고 오직 임금이 과거장에 참석하거나 특별한 경우에만 출입을 허락하는 곳이다.

동쪽 '건춘문'은 종실, 외척, 부마, 여자 관리 등에 한하여 출입하던 문이었다. 이에 비해 '영추문'은 서문으로 일반 관리들이 출입하던 문이었다. 그러니 경복궁의 네 문중에서 동·남·북 세 곳의 문은 모두 왕이나 왕실과 관계된 사람만이 드나드는 곳으로 일반인들은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만일 일반인이 궁에 들어가야 한다면 서문인 영추문을 통해 들어가야 했다. 결국 일반 백성들이 드나들 수 있었던 곳은 오로지 '영추문'뿐이었다. 서촌에 많은 사람이 살고 특히 중인들이 많았던 것도 이곳 영추문으로 관리들이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이곳으로 경제권이 움직이니 실리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주로 살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벌열한 양반들은 건춘문 밖 북촌에 주로 살았는데, 이 건춘문으로 종친이나 외척이 주로 드나들었던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일제강점이 이루어지자 일본인이 밀려 들어와 서촌에 터를 잡기 시작하였다. 그에 따라 오래전부터 살던 한국 사람들은 다른 지역으로 밀려나는 상황이 되었다. 이 또한 조선시대의 서촌의 영향력이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밀려나는 모습은 마치 100년 전에 있었던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을 생각나게 한다. 여하튼 경복궁 사대문 중에 일반인과 가장 친근한 대문은 영추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관파천과 영추문

임금은 통행하지 않고 일반 관리들이 주로 다녔던 영추문도 한 번은 임금 일행이 사람의 눈을 피해 몰래 통행한 적이 있었다. 때는 1896년 2월 11일 새벽, 여명이 밝아 오기 전이었다. 고종과 왕세자였던 순종은 경복궁에서 궁녀로 변장을 하고 몰래 궁궐을 빠져나갈 준비를 한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대기하고 있던 가마에 오른다. 두 대의 가마가 있었는데, 또 하나의 가마에는 영친왕의 생모인 엄귀비가 타고 있었다. 두 대의 가마에 나누어 탄 이들 일행은 경복궁 영추문을 바람같이 빠져 나와 미리 연락하여 준비하고 있던 러시아 공사관으로의 탈출에 성공한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이었다.

이들은 어떻게 서릿발 같은 일제 감시망을 피해 탈출할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머리가 총명하기로 유명했던 엄귀비의 노력이 있었다. 엄귀비는 이번 일을 위해 미리 두 채의 가마를 준비하여 평상시 궁을 드나들게 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일제 관계자들의 살벌한 감시를 누그러뜨려 놓으려 했던 것이다.

일본의 볼모처럼 잡혀 있던 고종과 왕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해버리자 일본은 당황해 한다. 이 사건은 한국을 두고 강대국들이 벌이던 치열한 쟁탈전에서 러시아와 미국이 힘을 갖는 계기가 된다. 결국 고종의 아관파천은 러일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렇듯 역사적 소용돌이가 된 아관파천의 시작은 영추문으로의 탈출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일제강점기 영추문의 붕괴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빠져 나갈 때 대문을 열었던 영추문은 마지막 황제 순종의 죽음과 함께 붕괴되며 그 운명을 다한다. 참으로 특이한 일이었다. 1926년 4월, 황제였으나 비운의 삶을 살았던 조선의 마지막 군주 순종은 창덕궁 대조전에서 숨을 거둔다. 비보를 접한 장안이 온통 애도의 물결로 넘치고 있을 무렵, 경복궁의 서쪽 문인 영추문이 돌연 무너져 내린다. 순종이 승하한 지 이틀만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비운의 황제가 죽자 하늘이 슬퍼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러한 여론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원망이 영추문 붕괴에 빗대어 형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영추문 붕괴의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담장이 무너진 것은 천재지변이 아닌 인재였다. 바로 일제가 건설하여 많은 이들이 타고 다니던 '전차(電車)'의 충격 때문이었다. 
      

옛 궁궐모습 담은 유리건판 사진 첫 공개 일제에 의해 훼손되기 전의 조선시대 궁궐 모습이 담긴 미공개 유리건판 사진들이 처음으로 선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소장 유리건판 사진 중 조선 궁궐 관련 사진 500여점을 선보이는 '궁(宮)-국립중앙박물관소장 유리건판 궁궐사진' 기획전을 28일부터 내년 2월10일까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한다. 사진은 김홍남 관장이 1926년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迎秋門) 붕괴사고 장면을 보는 모습. ⓒ 연합뉴스


1917년부터 광화문에 전차가 다니게 된다. 광화문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전차가 운행되었다. 그런데 1923년 경복궁에서 '조선부업공진회(아래 공진회)'가 열리게 되자, 대규모 관람객이 몰려들 것이라 예측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전차를 증설하기로 한다. 그 중에 한 노선이 광화문까지 오던 전차를 영추문까지 연장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선로의 건설이었다. 궁궐 담장은 이미 담장 옆길을 넓히느라 궁 안쪽으로 들어와 있었다. 일제는 넓힌 길은 그대로 두고, 전차의 선로를 담장과 매우 가깝게 나란히 준설하였다. 담장이 전차의 운행으로 많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전차는 많은 인기가 있었고, 많은 관람객들이 이 전차 타는 것을 좋아하였다.

한 번은 전차 역 종점 근처에 있던 진명여학교 학생들이 무리하게 많이 타 전복되는 사건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렇게 공진회의 행사와 함께 많은 관람객을 실은 전차가 시도 때도 없이 지나다니자 지반이 견고하지 못했던 궁궐의 담장은 많은 충격이 쌓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전차의 충격에 견디지 못한 영추문의 왼쪽 담이 갑자기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런데 마침 순종이 승하한 지 이틀 뒤이라 민심이 동요하여 두 사건을 연결하는 소문이 돈 것이다. 일제는 이를 핑계 삼아 결국 영추문을 허물어 버리게 된다. 그렇게 영추문은 '서십자각'에 이어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만다.

경복궁의 현판들의 글씨와 영추문의 현판 글씨

조선시대 경복궁의 현판들은 일정한 규칙에 의해 준비되었다.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을 통해 종합해 보면 궁중 안쪽에 있는 건물의 현판은 문신들이 쓰고, 궁궐 밖 대문을 장식하는 현판은 무신들이 썼다.

이는 글씨의 수준 이전에 현판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질서가 있는 듯하다. 고종 실록에 보면 1865년 경복궁 중건 때 영건도감(營建都監)에서 현판을 쓸 서사관의 이름을 적어 올린 것이 있다. 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근정전과 강녕전의 현판. ⓒ 황정수

 
궁궐 내부에 있는 건물인 교태전(交泰殿)은 조석원(曺錫元), 강녕전(康寧殿)은 이재면(李載冕), 연생전(延生殿)은 이재원(李載元), 경성전(慶成殿)은 조성하(趙成夏), 함원전(含元殿)은 조영하(趙寧夏), 인지당(麟趾堂)은 이주철(李周喆), 천추전(千秋殿)은 정범조(鄭範朝), 만춘전(萬春殿)은 송희정(宋熙正)이 뽑혀 현판을 쓴다. 또한 근정전(勤政殿)의 현판은 신석희(申錫禧)가 썼으며, 근정문(勤政門)은 이흥민(李興敏)이 썼다고 한다. 이상의 글씨를 쓴 이들은 모두 문신들이다.

이에 비해 궁궐을 둘러싸고 있는 사대문의 바깥 현판은 광화문(光化門)은 훈련대장임태영(任泰瑛), 건춘문(建春門)은 이경하(李景夏), 영추문(迎秋門)은 허계(許棨), 신무문(神武門)은 이현직(李顯稷)을 지명하여 쓰게 한다. 이 네 사람은 모두 무신들이다.

이 대립적인 입장의 서사관 취택은 음양의 이치이든 역할 분담이든 모두 나름대로의 의식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광화문 앞 해태가 궁궐에 불이 나는 것을 막기 위한 소망을 드러냈듯이, 외부 현판을 무신들이 쓴 것은 그들이 궁중을 지켜 줄 것이라는 믿음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일제강점이 고착화 되고 공진회, 박람회 등이 열리며 경복궁의 많은 건물을 없애고, 길을 시축하여 궁궐의 담도 줄어들며, 각 대문들도 수난을 겪는다. 광화문, 건춘문, 영추문 등의 대문은 사라지거나 옮겨지고, 서십자각은 도로 정비로 없어지고, 동십자각은 삼청동 길의 확장으로 길 가운데로 쫓겨난다. 이런 환란을 겪으며 건물의 소실과 함께 현판 글씨도 사라지게 되는 비운의 운명을 맞이한다.
 

건춘문과 영추문 현판의 김충현 글씨 ⓒ 황정수


이렇게 사라져 버린 건물들은 1975년이 되어서야 다시 복원되며, 현판의 글씨도 새로 갖추어져 선을 보이게 된다. 새로운 시대는 문신과 무신의 역할에 따라 글씨를 쓸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현판은 당대 최고의 서예가들이 쓴다.

그 중에 광화문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의 한글 글씨로 하였고, 건춘문과 영추문은 당대의 대표적인 서예가인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1921-2006)이 썼다. 김충현은 조선조 명문가인 안동 김씨의 후예로 대대로 글씨를 잘 쓰는 집안이었다. 김충현은 명필 집안답게 품격 있는 글씨를 잘 썼다. 그는 이미 젊은 시절부터 명필이라 칭찬을 들었던 인물이었다.

김충현이 쓴 건춘문과 영추문의 글씨는 조선시대의 서예가 못지않게 두 대문의 모습과 잘 어울렸다. 두 글씨 모두 필체도 유려하고 가볍지 않아 넉넉함이 있고, 오래 보아도 실증나지 않는 미덕이 있는 좋은 글씨이다.

그동안 대통령이 쓴 광화문의 글씨가 많은 문제를 안고 구설수에 자주 올랐던 것에 비해 이 두 대문의 글씨에 대해서는 별다른 논란이 없었다. 이는 김충현의 글씨가 충분히 대문의 현판 구실을 잘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영추문의 완전 복원과 현판 복원   

근래에 다시 영추문에 대한 복원 문제가 대두되었다. 1975년에 영추문이 복원되었지만 사실 이 건물은 본래 있었던 자리에서 북쪽으로 50여 미터 쯤 위에 건설된 것이다. 그래서 건춘문과 영추문은 동서쪽에 나란히 있었는데, 이제는 50여 미터 차이가 나 불균형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에다 한 가지 변수가 더 추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영추문을 없애며 함께 없어진 것으로 알았던 무신 허계가 쓴 영추문의 현판 글씨가 근래에 발견되어 영추문의 복원 문제가 또 한 번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현재 허계가 쓴 영추문의 현판은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있다. 이를 확인한 사람은 더불어민주당 안민석 의원인데, 그는 이 현판을 바탕으로 새로 모각을 하여 현판을 바꾸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러한 주장이 일견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지만, 복원 문제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복원이라는 것은 새로이 만들어진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확고한 해석이 이루어지고,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졌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현재 영추문에 있는 글씨는 당대 최고의 서예가인 김충현의 글씨이고, 수준도 빼어나 비교적 좋은 현판 글씨로 평판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별 이유 없이 단지 옛것이 발견되었다고 새로이 교체한다는 것은 이 또한 예술 작품에 대한 또 다른 폭력이다.

영추문은 언젠가는 원래의 자리를 찾는 복원 작업을 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는 문화재이다. 이런 까닭에 문화재 복원 사업이란 말이 대두되면 늘 영추문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영추문의 복원은 그리 서두를 일이 아니다.

먼저 경복궁 전체에 대한 완전한 복원계획이 만들어지고, 그와 균형을 맞추는 일이 선행된 후에 복원이 되어야 한다. 그런 치밀한 계획에 따라 현판 글씨도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무조건 예전의 모습대로 다시 회복한다고 해서 진정한 복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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