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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내는 두브로브니크의 중심가인 스트라둔(Stradun) 대로를 지나 역사적 이야기가 잔뜩 모여 있는 렉터 궁전(Rector's Palace)을 찾아갔다. '렉터(Rector)'는 중세 시대 라구사(Ragusa) 공화국을 통치하던 최고 통치자로서 집정관을 말한다. 이 렉터가 기거하면서 집무를 보던 곳이 이제는 두브로브니크의 역사를 알려주는 박물관이 되어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두브로브니크의 집정관이 살면서 통치를 하던 역사적인 건물이다.
▲ 렉터 궁전. 두브로브니크의 집정관이 살면서 통치를 하던 역사적인 건물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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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터 궁전은 스트라둔 대로의 오노프리오(Onofrio) 분수를 만든 이탈리아 출신 건축가 오노프리오 데 라 카바(Onofrio de la Cava)에 의해 1435년에 후기 고딕과 초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졌다. 그러나 15세기에 건물 내부의 화약폭발로 인해 건물 일부가 파괴되었고, 1667년에는 두브로브니크를 강타한 대지진으로 인하여 건물이 무너졌다. 현재의 아름다운 건축물은 17세기에 들어서 바로크 양식으로 보수한 건물이다.

무기고로도 사용되었던 건물 1층은 두브로브니크 박물관(Dubrovnik Museum)으로 사용되고 있다. 1층 전시실에는 중세의 종교화를 비롯하여 렉터가 집무할 때에 사용되었던 다양한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자연채광을 하고 있는 실내는 약간 어두운 듯 하면서도 아늑하고 아름답다. 박물관 1층의 내부 홀로 들어선 아내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유리병 모양의 창문을 통과한 햇빛이 전시실 안에서 부서지고 있다.
▲ 전시관 내부. 유리병 모양의 창문을 통과한 햇빛이 전시실 안에서 부서지고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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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의 유리 장식이 너무 예뻐. 마치 유리병의 바닥을 이어 붙인 듯한 창문으로 햇빛이 통과하고, 햇빛이 실내에 들어와 산란하며 반짝이네."

아내는 햇빛 쏟아지는 유리 창문을 요리조리 살펴보며 감탄했다.
 
옷장만큼 작은 감옥에 죄수를 가두었다는 사실이 무척 비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 감옥. 옷장만큼 작은 감옥에 죄수를 가두었다는 사실이 무척 비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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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에 전시된 유물들도 개성이 아주 강한 유물들이다. 정말 특이한 것은 큰 진열장처럼 생긴 감옥이다. 유물 설명서를 보기 전에는 누구도 이 철제유물이 감옥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모습으로 생겼다. 일제가 우리 독립지사들을 가두었던 서대문 형무소의 벽관이 연상되는 모습이다. 저 안에 갇히면 몸을 전혀 움직일 수가 없기 때문에 고통이 상당했을 것이다.

전시물들을 둘러보던 우리들은 뚜껑이 열린 한 상자 앞에서 멈춰 섰다. 현란한 곡선으로 이어지는 장식들은 날카롭기도 하다. 뚜껑 안쪽이 예술작품처럼 세밀하게 장식된 상자의 용도를 알 수가 없어 옆에 있던 박물관 관리인에게 물어보았다.
 
중세시대 죄인을 고문하던 도구들이 마치 공구상자처럼 전시 중이다.
▲ 고문도구 상자. 중세시대 죄인을 고문하던 도구들이 마치 공구상자처럼 전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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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상자는 무슨 상자인가요? 무슨 용도가 있는 상자인가요?"
"지하감옥에서 죄수들을 고문할 때에 사용하였던 고문기구들입니다. 고문기구들을 넣어 두는 상자가 마치 현대의 가정에서 사용하는 공구상자처럼 생겼지요?"


고문기구들은 놀랍게도 예쁘게 모여있었다. 얼마나 고문 기술이 발달하였으면 저렇게 다양한 고문기구들이 생겼을까? 강대국들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작은 나라, 라구사 공화국을 지휘하던 렉터들은 법의 집행에 엄격했던 것이다. 최고집정관이 사는 궁전 지하에 감옥을 만들고 죄인들을 직접 관리했을 정도로 그들은 죄인들의 처벌에 철저했다.
 
온통 새하얀 석재로 둘러싸인 백색의 공간이다.
▲ 궁전 가운데 마당. 온통 새하얀 석재로 둘러싸인 백색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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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의 가운데 마당은 사면과 바닥이 모두 흰색 석재로 둘러싸여 온통 백색의 나라이다. 안마당과 2층을 잇는 계단은 직각으로 꺾이면서 아름다운 아치형 벽면으로 지탱되고 있었다. 2층의 아치 기둥에 쏟아지는 햇빛이 자연스레 우리를 2층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계단의 난간을 장식한 손잡이가 마치 안전하게 길을 인도하는 것 같다.
▲ 2층 계단 손잡이. 계단의 난간을 장식한 손잡이가 마치 안전하게 길을 인도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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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으로 올라가면서 보면 묘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많은 관람객들의 시선이 계단 난간의 특이하게 생긴 손잡이에 쏠린다. 계단을 오르면서 잡는 난간 손잡이가 마치 몽둥이를 잡고 있는 듯한 손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마치 이 손이 계단을 잘 붙들고 있을 테니 안심하고 올라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신선한 아이디어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2층 아치 한 부분을 메워 금색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벽시계도 이상해 보인다. 얼핏 보면 이 벽시계는 다른 시계와 차이점을 잘 알 수 없지만 유심히 보면 시계가 분명 움직이지 않는다. 시침과 분침이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1667년 대지진이 발생했던 때의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 벽시계를 당시 시간에 고정해 두고 고치지 않은 것이다. 참혹했던 대지진을 잊지 말자는 두브로브니크 사람들의 독특한 기억법이다.

박물관 2층에는 렉터의 집무실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렉터가 사용했던 접시와 은으로 만든 식기들이 금방이라도 사용할 것처럼 전시되어 있다. 렉터의 그릇들에는 당시 중세 유럽에서 유행하던 동양풍의 색채 속에 동양인이 그림이 그려진 것들도 많다. 당시 아드리아해의 무역권을 장악했던 라구사 공화국의 시대를 알려주는 이 유물들은 너무 고풍스럽고 아름답다.
 
종탑에서 움직이며 종을 치던 그린맨들의 진품이 전시되어 있다.
▲ 두브로브니크 그린맨. 종탑에서 움직이며 종을 치던 그린맨들의 진품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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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터 궁전 전시실에서 가장 큰 전시물은 길다란 망치를 들고 서 있는 2명의 청동조각상이다. 이 조각상은 렉터 궁전 옆 종탑 꼭대기에 서 있었던 '두브로브니크 그린맨'이다. 이 전시실에서 전시하고 있는 그린맨이 진품 동상이고, 현재 종탑 안에 서 있는 그린맨 동상들은 복제품이라고 한다.

마치 쌍둥이처럼 생긴 청동 그린맨은 마치 무슨 동작을 하려는 듯이 엉거주춤하게 서 있다. 이들은 1500년대부터 두브로브니크에 정확한 시간을 알리는 종지기들인 것이다.
 
지금도 종탑의 그린맨들은 매시 정각과 30분에 시간을 알리고 있다.
▲ 종탑. 지금도 종탑의 그린맨들은 매시 정각과 30분에 시간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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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렉터 궁전을 나와 그린맨이 실제로 활동하는 종탑을 찾아갔다. 종탑은 루자 광장(Trg Luža)에서 옛 항구와 통하는 문 위쪽에 높게 솟아 있었다. 구시가의 중심인 루자 광장은 성 블라이세 성당(Church of Saint Blaise), 스폰자 궁전(Sponza Palace) 등 역사적인 건축물로 둘러싸여 있는데, 가장 높게 솟은 종탑이 주변 건축물들을 아우르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자 광장의 종탑은 1440년에 처음 세워졌고 이후 대지진 때 파괴된 것을 1929년에 다시 세웠다. 종탑 옆문에 새겨진 '루자(Luža)'라는 글자가 뚜렷이 보인다. 종탑 안을 유심히 살펴 보니 그린맨 동상 2개가 서 있다. 이 그린맨들은 매 시각 정시와 30분에 종을 울린다.

조금 기다려보니 그린맨들이 마치 로보트처럼 몸을 옆으로 움직이면서 종을 치기 시작한다. 단순한 듯한 동작이지만 15세기부터 중단과 재개를 거듭하면서 이어진 종지기들의 소중한 동작들이다. 그들이 울리는 종소리의 경건한 느낌은 두브로브니크를 중세시대로 다시 돌려놓는 것 같다.
 
돌고래가 장식된 작은 분수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물을 받아 간다.
▲ 오노프리오 작은 분수. 돌고래가 장식된 작은 분수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물을 받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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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탑 아래에는 많은 사람들이 시원한 물을 받으려고 몰려 있는 분수가 있다. 목마른 자를 위한 것이니 '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은 분수이다. 이 분수는 중심가인 스트라둔 대로의 양쪽 끝에 세워진 분수인데, 두브로브니크의 수도 사업을 맡은 이탈리아 건축가 오노프리오가 설계한 분수이다. 그는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에서 사람들이 충분히 목을 축일 수 있도록 대로 양쪽에 분수를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루자 광장 부근에 있는 분수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더 작지만 분수 위의 장식 조각은 훨씬 더 정감이 간다. 이 장식 조각은 밀라노의 조각가인 페타르 마르티노브(Petar Martinov)의 작품인데, 그 장식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의 현란한 익살을 느낄 수 있다.

볼이 불어터지는 것 같은 사람 입에 이어진 수도꼭지에서 물이 졸졸 흘러내리고, 그 아래에는 벌거벗은 사람들이 무릎을 꿇은 채 눈을 멀뚱거리고 있다. 분수 맨 상단에는 늘씬한 돌고래가 뛰놀고 있다. 거꾸로 매달린 돌고래들이 인상을 쓰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한, 만화 같은 모습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이런 현대적인 작품이 5백년도 넘는 세월 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이 도시에는 이곳저곳에 사람들이 끊임없이 모여들고, 그 사람들을 따라가 뭐가 있는지 두리번거리게 된다. 분수 앞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으려니 렉터 궁전 앞의 한 동상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알고 보니, 크로아티아 최고의 극작가이자 교육자인 두브로브니크 출신 마린 드르지치(Marin Držić)의 동상이다. 이 동상은 사람들이 너무 만져서 노랗게 변해버린 코만 보인다.
 
행운을 비는 사람들의 손길로 인해 동상의 코와 손이 노랗게 빛난다.
▲ 마린 드르지치 동상. 행운을 비는 사람들의 손길로 인해 동상의 코와 손이 노랗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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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8년 두브로브니크의 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난 마린 드르지치는 이탈리아 시에나(siena)에서 교육을 받고 사제서품을 받은 가톨릭 사제였다. 하지만 반항적 성격을 가졌던 그는 가톨릭 사제로서의 업적보다는 오히려 크로아티아의 16세기 극작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그는 최초로 크로아티아어로 크로아티아 희곡을 썼다. 그의 희곡은 크로아티아의 오래된 방언으로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크로아티아 학생들이 일생 중에 꼭 한번은 읽어봐야 하는 작품들로 꼽히고 있다. 훗날 크로아티아 문화 부흥에 바탕이 되는 작품들을 남긴 그는 두브로브니크의 가장 소중한 문화 아이콘으로 꼽히고 있다.

유명 문인의 솜씨를 닮고자 하는 사람들의 바람은 그의 동상에 투영되었다. 여행자들이 그의 손을 하도 만져서 그의 두 손은 반들반들 윤이 나고 있다. 그런데 행운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마린 드르지치의 코도 함께 사람들의 엄청난 손길을 만나고 있다. 그의 코는 유난히 노랗게 변색되어 번들거리는데 아마도 그의 코가 유난히 높고 크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행운이 온다는 그의 손을 만지며 나에게도 그와 같은 문재(文才)를 달라고 기도해 보았다. 그렇게 닮고 싶은 코는 아니지만 그의 코도 한번 만져 보았다. 코를 만지면서 내가 정한 다른 소원을 또 빌어보았다. 그의 코를 만지면 행운이 오는지는 그 소원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보면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 뒤에 서 있던 사람들도 마린 드르지치의 윤기 나는 코를 연신 만졌다. 사람들이 자꾸 만지며 소원을 빌기 때문에 언젠가는 분명히 그의 코도 행운의 코로 소문이 날 것이다.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좋은 곳은 소문으로 퍼지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린 드르지치는 그의 코가 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줄 생전에 알았을까? 분명 전혀 몰랐을 것이다. 사람의 일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기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체코, 슬로바키아 여행기를 게재하고자 합니다.


태그:#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여행, #두브로브니크, #두브로브니크여행, #렉터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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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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