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11월 9일, 미국의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가 예고했던 대로 사업가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됐다.

해외 매체들은 민주당 후보 힐러리 클린턴의 압승을 예고했다. 실제로 미 대선 날 어느 주에서는 힐러리 대통령을 축하하는 축배가 미리 터지기도 했으나, 결국 당선된 대통령의 얼굴을 비추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는 트럼프의 얼굴이 뚜렷이 떠올랐다. 미국에 사는 어떤 이들에게 2016년 11월 9일은 그야말로 악몽 같은 날이 됐다.
 
 영화 <화씨 11/9>의 한 장면.

영화 <화씨 11/9>의 한 장면. ⓒ 영화사 진진, 누리픽쳐스

 
많은 이들이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대체 어쩌다가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걸까.' 비속어를 남발하고 사회적 소수자들을 향해 헤이트 스피치를 날리는 트럼프 같은 사람이 대체, 어쩌다가 대통령이 된 걸까. <식코> <화씨 9/11>로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다큐멘터리 감독이 된 마이클 무어는 대통령 선거, 즉 사건의 발생일인 11월 9일 전으로 돌아가 대체, 어쩌다가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파헤쳐 본다. (관련 기사: '화씨 11/9', 우리가 몰랐던 미국의 이면, 충격적 스토리)

플린트시의 납중독 사태가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에 미친 영향

마이클 무어는 자신의 고향인 미시간주의 플린트시으로 돌아간다. 마이클 무어는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와 인터뷰에서 "의도적으로 작정하고 고향을 찾아나선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서 나서 자라오면서 트럼프의 시대가 다가올 것임을 예고편으로 경험했죠"라고 말한다.
 
 영화 <화씨 11/9>의 한 장면.

영화 <화씨 11/9>의 한 장면. ⓒ 영화사진진, 누리픽쳐스

 
<화씨 11/9>의 부제는 '트럼프의 시대'지만 그는 트럼프의 시대 몇 년 전인 오마바 행정부 당시의 플린트시의 납중독 사태를 다룬다. 2014년 미시간주 주지사인 릭 스나이더는 플린트시에 새로운 수로를 건설하면서 오염된 물을 그대로 가정으로 흘러들어가게 한다. 오염된 물에는 납 성분이 섞여있었다. 아이에게는 더 치명적이고 어른 역시 피할 수 없는 플린트시의 납중독 사태의 시작이었다.

성난 민심은 오바마 대통령을 플린트시로 방문하게 만들었다. 플린트시의 주민들은 대통령 오바마에게 기대를 걸었으나 그 기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실망으로 바뀌었다. 플린트에 방문한 오바마 대통령은 연설 도중 (오염된) 물을 한 잔 달라고 한 뒤, 물을 마시는 척하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컵을 그저 입에 갖다 댔다. 오바마가 직접 나서서 분노한 주민들에게 물이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다'는 시그널을 보낸 것이다.
 
 영화 <화씨 11/9>의 한 장면.

영화 <화씨 11/9>의 한 장면. ⓒ 영화사진진, 누리픽쳐스

 
플린트시 주민들은 오바마의 방문이 그저 하나의 쇼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 크게 실망하게 된다. 한 주민은 오바마를 두고 "(플린트시에) 올 땐 제 대통령이었지만, 갈 땐 제 대통령이 아니었어요"라고 일갈한다. 마이클 무어는 트럼프 대통령 당선이라는 '결과' 이전에 미국의 국민들이 분노한 '과정'이 있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결과가 있기까지는 트럼프의 자극적인 행태를 반긴 미국의 대형 언론사와 민주당 지도부라는 원인이 있음을 고발한다.

올해 극장에서 봐야 할 마지막 공포 영화

"참, 이번 < Time Out >에서 올 가을 개봉할 공포 영화 섹션에 제 영화를 소개해주셨더군요. 전 그게 참 좋았습니다. 이 영화는 혼자 보는 것보다 대부분 일면식이 없는 낯선 100명, 200명의 사람들과 함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와의 인터뷰 중에서

마이클 무어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영화 <화씨 11/9>가 '공포 영화'로 소개됐다면서 반가워했다. 실제로 한국의 영화관에서도 <화씨 11/9>가 상영되는 동안 몇몇 장면들에서 관객들은 비명을 지르거나 안타까운 신음 소리를 내기도 했다. 또 신랄한 유머가 나오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거침없이 웃기도 했다.
 
 영화 <화씨 11/9>의 한 장면.

영화 <화씨 11/9>의 한 장면. ⓒ 영화사진진, 누리픽쳐스

 
마이클 무어는 한국인에게는 다소 먼 미국의 어느 주 어느 시에서 일어난 일에 집중하지만 그의 외침은 우리에게도 전혀 낯설지 않다. 수질이 나빠지면서 벌어진 플린트주 납중독 사태에서는 얼핏 이명박 정부 당시 4대강 사업까지 겹쳐 보인다.

한편, 마이클 무어의 카메라는 날카로운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향한다. 플로리다주 파크랜드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을 두고 10대 청소년들이 시위를 나가자 마이클 무어는 이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청소년인 그들의 뜻에 동참하며 거리로 직접 나서고 이들의 아지트를 찾아 인터뷰한다. 1954년생으로 '기성 세대'로 분류되는 나이의 마이클 무어가 10대인 청소년들과 함께 영화를 촬영하면서 그들에게 희망이 있다고 역설하는 듯한 장면은 이제는 기성 세대가 돼버린 관객들에게 새로운 각성을 선사한다.

제 57회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장 쿠엔틴 타란티노는 <화씨 9/11>에 황금종려상을 안기며 "평생 투표를 안 하던 나를 무어 감독이 변화시켰다.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선거권 등록을 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마이클 무어의 이번 영화 <화씨 11/9>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영화가 끝나고도 관객들을 정치에 참여하고 행동하고 싶게끔 만들 것이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영화에는 여전히 그런 힘이 있다.

한 줄 평: 마이클 무어는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말한다
별점: ★★★★(4/5)

 
영화 <화씨 11/9: 트럼프의 시대> 관련 정보
수입/제공/공동배급: (주)누리픽쳐스
공동제공/배급: (주)영화사진진
감독: 마이클 무어
주연: 도널드 트럼프, 마이클 무어 등
장르: 다큐멘터리, 블랙코미디, 폭로무비
상영시간: 128분
개봉일: 2018년 11월 22일
관람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화씨11/9 마이클무어 화씨9/11 트럼프 플린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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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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