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06 08:46최종 업데이트 18.11.06 10:35
맛은 신기루 같다. 눈에 보이는 듯한데 다가가면 사라진다. 형체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 맛을 기억하는 체계는 지식도 아니고 지혜도 아니고 마치 단련된 운동 신경 같다.

맛은 입으로 들어와 미각 세포로 감지되고 미각 신경으로 전달되어 뇌에서 판독된다고 한다. 이때 판독된 정보가 맛있거나 맛없거나, 달거나 쓰거나 짜거나 매울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너무 추상적이어서 맛의 실체를 판별할 수 없다. 맛의 기억은 구체적인 물질로 연상하거나, 비유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증발되고 만다.

맛을 기억하는 방법 하나는 감각에 상처를 내는 것이다. 이것은 과식이나 과음이 불러올 수도 있고, 몸의 알레르기 반응에 의해서도 올 수 있다. 그 맛에 거부 반응을 보일수록 더 예민해진다. 그래서 인간은 싫어하는 맛을 더 잘 구분해낸다고 한다. 하지만 충격을 통해서 맛을 기억하는 것은 비효율적이고 유쾌하지 않으며, 더욱이 섬세하고 여린 맛을 습득하긴 어렵다.
 

맛을 구분하는 첫 번째는 눈으로 살피고 두 번째는 향기를 맡는 것이다. ⓒ 박규민



맛을 기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맛을 즐기면서 비교하는 것이다. 맛을 반복해서 느끼면서, 뇌 속에 맛의 정보를 저장해놓고, 이를 반추하면서 다른 맛을 연상할 때 감별 능력이 향상된다. 가수가 많은 음계를 기억하고, 화가가 많은 색을 기억하듯이, 많은 맛을 기억하려고 노력하면 맛의 분별력은 향상된다.

전통주 소믈리에 대회 "술 이름을 맞혀라"

해마다 연말이면 전통주 소믈리에 대회가 열린다. 올해는 제9회 대회가 11월 24일 대한민국 우리술 축제 기간에 열리게 된다. 이 대회에서 출전 선수들은 막걸리 15종류 중에서 뽑힌 한 종류의 술을 맛보고 그 이름을 맞혀야 한다. 막걸리 15종의 목록이다.
 

막걸리 15종 세트. ⓒ 신수빈



전국에 900개가 넘는 막걸리 제조 면허가 있는데, 그곳에서 만든 술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막걸리 이름만 듣고도 막걸리의 맛을 떠올리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막걸리의 달인이다. 물론 한 번도 맛보지 않고 상품명과 재료만으로 그 맛을 구분할 수는 없다.

막걸리에 물이 90%라고 하지만, 쌀과 누룩이 미치는 맛 때문에 물맛만으로 지역 막걸리를 구분할 수는 없다. 고로 재료의 고유한 맛을 이해하고, 그 맛에 익숙하거나 학습되어야 술을 구분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맛은 어떻게 학습되고 어떻게 단련되는 것일까?
 

다양해진 막걸리들로 인해 막걸리를 비교 시음하는 재미가 생겼다. ⓒ 허시명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하기 위해 유리병에 술을 담다. ⓒ 한종진



이를 위해서 막걸리학교에 15명이 모여 위의 막걸리 15종류를 맛보았다. 처음엔 상표를 보고 맛을 본 뒤에, 상표 없는 유리병에 새로 담아 맛을 보고서 그 이름을 맞히기로 했다.


맛본 술을 다시 찾아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15명 중에 15개를 다 맞힌 사람은 1명이었고, 평균 10개 정도를 맞혔고 적게는 7개를 맞혔다. 그리고 개인별로 가장 쉽게 맞힐 수 있었던 술들의 특징을 이야기해 보았다.

첫 번째, 부재료가 들어간 술을 가장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그중 산양산삼이 들어간 술은 모두가 맞힐 수 있었다. 호담산양산삼 막걸리는 2017년에 대한민국 우리술 품평회에서 막걸리부문 대상을 받고, 전체에서 대통령상까지 받았다. 산양삼의 향과 맛이 좋고, 맛의 균형감이 있다고 평가되었던 것 같다. 부재료가 들어간 또 다른 술은 가평잣 막걸리와 백련 막걸리였다.

가평잣 막걸리에서는 견과류의 구수한 향과 맛을 뚜렷하게 구분한 사람과 어렴풋이 느낀 사람과 전혀 느끼지 못한 사람이, 비슷한 비율로 나뉘었다. 그래도 감지한 사람이 절반은 넘었기에, 감지하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의 감별력을 의심하는 상황이 되었다.

백련 막걸리에는 말린 연잎이 들어가는데, 이 연잎 맛은 느끼기란 쉽지 않았다. 이를 분명하게 느낀 이는 연잎밥을 직접 쪄본 요리사였는데, 연잎밥을 찔 때 훈김과 함께 올라오는 여린 연잎의 향이 술 속에서 느껴진다고 했다. 몇몇 이들은 녹차나 나물 등의 식물 잎에서 우러난 탄닌의 질감 정도로 이 술의 특징을 가까스로 파악했다.

두 번째 천연 밀누룩이 들어간 막걸리에서 누룩향이 도드라졌다. 송명섭 막걸리, 금정산성 막걸리. 이화백주 순탁주, 복순도가 막걸리, 이상헌 탁주들은 통밀을 빻아 단단하게 디뎌서 자연균을 받아들여 한 달 넘게 걸려 만든 누룩으로 빚었다.

현재 유통되는 대부분의 막걸리들은 백국이라는 조제종국을 뿌려서 44시간 만에 만든 흩임누룩 즉 입국(粒麴)을 사용한다. 천연 밀누룩을 사용하면 맛이 풍부하지만 잡다할 수 있고, 백국을 파종한 흩임누룩을 사용하면 맛이 단일하지만 균일한 맛을 낼 수 있다.

송명섭 막걸리의 첫맛은 슴슴한데 끝맛은 쓴맛이 지배하고, 목넘긴 뒷맛은 천연 밀누룩에서 올라온 지푸라기 향이 강한데, 청국장의 향까지도 느껴졌다. 금정산성 막걸리에서는 누룩향이 소나기 지나간 여름날 풍기는 흙내를 닮았고, 상큼한 맛은 무르익은 과즙을 짜 넣은 듯 강렬하게 스쳤다. 금정산성 누룩과 비슷한 누룩 문화권에서 만들어낸 울산 복순도가와 양산 이화백주에서도 상큼한 신맛이 올라왔지만, 흙내는 올라오지 않았다.

울산 복순도가는 샴페인 막걸리의 새로운 지평을 연 회사고, 이화백주는 복순도가에서 술을 빚던 이들이 나와 창업한 회사다. 그래서 두 제품이 닮아 있다. 복순도가가 이화백주보다는 탄산감이 좋고 달고 신맛이 더 강렬하고 뒷맛도 오래 남았다. 이상헌 탁주는 누룩향의 구수함이 묵직하게 깔려있고, 알코올 도수 19%에서 올라온 독하고 격한 기운 때문에 쉽게 차별화되었다.

세 번째 살균한 막걸리에서는 특별한 향이 나서 구분할 수 있었다. 막걸리의 살균은 일반적으로 순간 고온 살균기를 사용하여 75℃에서 15초 정도 이뤄진다. 막걸리에는 앙금이 있기에 열을 받는 과정에서 고구마향이나 견과류의 향이 스미고, 옅은 간장향이 돌기도 한다. 이를 살균취라고 하지만 학습되지 않으면 가늠하기 어렵다.

세종쌀 막걸리, 월매, 부자 10도는 살균 탁주라서 유통 기간이 1년씩 되어, 일반 막걸리의 유통기간 10일에서 3개월에 견주면 오래 유통하고 수출하기 좋은 제품이다. 세 종류 모두 살균 막걸리 특유의 향기가 따라오는데, 세종쌀 막걸리는 달콤한 뒷맛이 강하게 오래 남고, 월매는 엷은 듯 달달한 맛이 파문처럼 퍼져갔고, 부자 10도는 진하고 달콤한 맛이 짧게 끊어졌다. 악보처럼 맛의 길이와 높낮이가 서로 달랐다.

네 번째 생쌀 발효를 한 느린마을 막걸리도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었다. 보통은 주원료인 쌀로 고두밥을 찌는데, 느린마을 막걸리는 생쌀을 가루내서 사용하는 특별한 제조법을 지니고 있다. 느린마을 막걸리에서 쌀음료 '아침햇살' 맛이 돌고, 사과향이나 배향이 은은하게 돌았다. 부자 10도도 생쌀 발효이지만 알코올 도수가 높고 살균취가 있어 쌀음료의 풋내를 느끼기는 어려웠다.

다섯 번째 무감미료 막걸리들을 따로 구분할 수 있었다. 송명섭 막걸리, 해창 막걸리, 느린마을 막걸리, 이상헌 탁주가 감미료를 넣지 않았다. 송명섭 막걸리는 덤덤하고 쓴맛이 계속 따라오지만, 해창 막걸리, 느린마을 막걸리, 이상헌 탁주에서는 곡물의 단맛이 느껴졌다. 전분에서 온 단맛은 둥글고 뭉툭하게 느껴지는데 목넘기고 나면 깔끔하게 사라진다.

아스파탐에서 온 단맛은 실크처럼 얇지만 날카로운 단맛이 목 넘긴 뒤까지 입안에 거미줄처럼 남는다. 송명섭 막걸리와 함께 무감미료 막걸리의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해창 막걸리는 앙금의 입자가 굵고 걸쭉하여 잔을 흔들어 보는 것만으로도 차이가 났는데, 풀죽 같은 곡물 향과 선 굵은 단맛이 돌았다.

마지막, 가장 구분하기 어려웠던 것은 도수가 낮고, 여린 맛을 지닌 술들이었다. 여린 잣향과 백련향을 감지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가평잣 막걸리, 백련 막걸리, 은자골 탁배기, 지평 막걸리 들이 서로 닮아있어 구분하기 어려웠다. 재료도 쌀과 입국과 아스파탐을 바탕으로 하고, 탄산감도 비슷하여 서로 잔상이 닮아 있었다.

이렇게 막걸리 15개를 집중해서 맛보면서, 기억할 수 있는 징후를 찾아 뇌리에 새겨보았다. 이때 막걸리를 분류하는 기호들이 많을수록 기억하기 좋다.

막걸리 상표에서 살균 막걸리와 생 막걸리만을 구분하고 있지만, 특별한 누룩을 사용하는 누룩 막걸리, 탄산감이 좋은 샴페인 막걸리, 과일이 들어간 과일 막걸리, 도수가 2배 높은 두 배 막걸리, 감미료가 들어가지 않은 무감미료막걸리, 물을 적게 넣은 농담금 막걸리, 기능성을 살린 약재 막걸리 등과 같은 약속들이 생기면 막걸리 맛을 구분하기가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맛을 감별하는 능력은 생명을 얻으면서 모두가 갖게 되지만, 이를 극대화시키는 것은 학습하고 단련해야 가능한 일이다.
 

막걸리 15종을 놓고 맛을 평가하다. ⓒ 허시명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