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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한 요양원에 입원한 한상기 박사의 부인.
 경기도의 한 요양원에 입원한 한상기 박사의 부인.
ⓒ 한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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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 나 보고 싶었어요?"
"보…고…싶…었…어…요. 또, 언제…와요?"
"내일 또 올게요!"

 
한상기(85) 박사와 아내 김정자(89)씨의 최근 대화다. 서로를 그리워하는 노부부의 병중 대화가 애틋하다. 한 박사는 치매 걸린 아내를 10년간 간병했다. 최근엔 폐렴으로 두 차례나 응급실에 실려 갔다. 아내를 집에서 간병하는 일이 위험해지면서 요양원에 입원시켜야 했다. 한 박사는 하루걸러 아내를 보러 간다. 또 하루는 큰딸이 면회 간다. 미국에서 사는 자녀들도 다녀갔다.
 
"사명감에 치우쳐 아내를 돌보지 못했습니다"
 
1980년경, 젊은 시절의 한상기 박사 부부.
 1980년경, 젊은 시절의 한상기 박사 부부.
ⓒ 한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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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박사는 지난 9월 17일 아내를 경기도의 한 요양원에 입원시켰다. 하루 전이 아내 생일이었다. 70년 세월을 동고동락한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지 못하고 잡은 손 놓은 채 돌아서야 했던 그는 '비 내리는 고모령'이란 옛 노래를 울먹이며 불렀다. 홀로 귀가해서는 외로움을 달래려고 붓을 들었다. 붓이 찍은 것은 먹물이 아니라 눈물이었다. '부덕고'(不德孤), 아내를 끝까지 돌보지 못한 부덕함이 고독함과 외로움으로 파고들면서 가슴을 저미게 했다.
 
"아프리카 사람들을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치우쳐 아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습니다. 아내의 아프리카 생활은 외롭고 힘들었습니다. 깨진 플라스틱 양동이를 기워 사용하고 슬리퍼가 낡고 헤지도록 신었습니다. 연구를 위해 아프리카와 아시아, 남미 등으로 떠날 때마다 아내는 내 봇짐을 수백 번 싸주어야 했고 잘 다녀오라고 수천 번 손을 흔들며 혼자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렇게 저를 위해 희생했는데 병든 아내를 요양원에 두고 돌아설 때 부엉새도 울고 나도 울었습니다."
 

한 박사는 아내를 연구소 사택에 두고 카메룬, 가나, 토고, 베냉공화국 등 아프리카 대륙을 누볐다. 길 없는 길을 달리던 자동차가 강바닥에 처박혀 옴짝달싹 못 하기도 했고 열대우가 쏟아지면서 빗길에 미끄러진 자동차와 함께 강물에 휩쓸릴 뻔했다. 비행기를 타고 가다 사고로 죽을 뻔했던 적이 몇 번이고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뻔했던 적은 또한 얼마나 많았던가. 
 
한상기 박사의 서예 '부덕고'
 한상기 박사의 서예 "부덕고"
ⓒ 한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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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박사는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 경비행기 조종사와 이 비행기를 타고 가던 연구소 동료 3명은 태풍에 휩쓸리면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졌다. 물도 설고 말도 통하지 않는 아프리카에서 한 박사의 아내는 힘들고 외로웠다. 남편이 출장을 갈 때마다 가슴을 졸이며 무사귀환을 빌고 또 빌었다. 아프리카 23년 생활의 외로움과 가슴 졸임이 끝내 병이 된 것일까. 한 박사는 아내의 병이 자신 때문인 것만 같아 괴롭다.
 
'일왕불퇴'(一往不退, '한번 갔으면 뒤돌리지 말라'는 서산대사의 말)와 '일진불퇴'(一進不退, '한번 나갔으면 다시 돌아오지 말라'는 조주 스님의 말)를 가슴에 품고 아프리카로 떠난 그는 23년간 하루도 결근하지 않고 일했다. 1994년 61세로 은퇴해 미국 클리블랜드에서 21년간 살았다. 나이지리아 이바단 연구소도 클리블랜드도 외로웠다. 고향 떠난 나그네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베네딕토 수도원 신부들이 운영하는 성당 새벽미사에 참례했다.
 
한상기 박사는 2015년, 44년간의 타국 생활을 정리하고 병든 아내와 함께 귀국했다. 태어난 땅에 묻히기 위해서다.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외롭고 쓸쓸하다. 기근으로 죽어가는 아프리카 사람들은 살렸지만 자신을 위해 희생한 병든 아내는 살리기는커녕 돌보기조차 못하니 슬프다. 외로움과 쓸쓸함과 슬픔을 기도와 시와 서예로 달랜다. 그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생로병사, 귀천을 준비하는 노학자는 자신이 펴낸 명상시집 <아프리카, 광야에서>(따뜻한손)에서 세월을 이렇게 노래했다.
 
강 이쪽에서
나이를 먹는데
강 건너 저쪽에서
늙어가네.
 
(한상기 박사의 시 '강 건너 저쪽에' 일부)

 
조용한 혁명을 일으킨 '한국에서 온 성자'
 
지난 8월, 소년희망공장에서 만난 한상기 박사.
 지난 8월, 소년희망공장에서 만난 한상기 박사.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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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박사는 세계적인 식물유전 육종학자다. 그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주식인 카사바를 병충해에 강한 품종 개량에 성공하면서 기근으로 죽어가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살렸다. 이에 대해 세계은행은 '조용한 혁명'이 성공했다면서 그를 혁명의 기수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가 개량한 카사바 품종은 아프리카 41개국에 보급됐고 고구마 품종 66개와 얌 품종 21개, 식용 바나나 품종은 아프리카 8개국에서 재배되고 있다.
 
슈바이처 박사를 '밀림의 성자'라고 칭한 아프리카 사람들은 한 박사를 '한국에서 온 성자'라고 부르며 존경을 표시했다. 병든 아프리카 사람들을 치료해준 슈바이처 박사의 인류애도 훌륭하지만 품종 개량으로 수십억의 아프리카 생명을 구하며 농업 발전에 크게 기여한 한 박사의 공로가 결코 작지 않기에 붙인 호칭이다. 슈바이처 박사와 한상기 박사가 아프리카를 선택한 동기는 신앙이다. 하느님이 아프리카로 인도했지만 길은 달랐다. 슈바이처 박사와 다른 길을 선택한 한 박사가 이렇게 말했다.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 사람들의 병을 고쳐준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고 고기를 주는 선교활동 방식은 잘못한 것입니다. 아프리카 사람들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의사와 간호사 등 의료진을 양성했어야 했는데 슈바이처 박사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결과적으로 자기 명성만 높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슈바이처를 존경하지 않습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과 함께하고 있는 한상기 박사.
 아프리카 원주민들과 함께하고 있는 한상기 박사.
ⓒ 한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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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기 박사는 제자 양성에 중점을 두었다. 아프리카 스스로 자력갱생해야 한다는 방침은 식민지의 아픔을 겪은 동병상련 때문이었다. 한 박사는 여러 국제기구에서 연구비와 지원금을 끌어와 콩고를 비롯해 카메룬, 르완다, 우간다, 말라위, 가나 출신 등의 농학 석․박사 50여 명과 농촌지도자 700여 명을 교육시키는 등 1만여 명의 농업 지도자를 배출시켰다. 자기 조국으로 돌아간 그의 제자들은 희망의 기수들이 됐다.
 
나이지리아 대표 부족인 요루바족이 한 박사를 추장(농민의 왕)으로 추대한 것은 단순한 학자가 아니라 민중과 함께한 학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내전과 굶주림에 죽어가는 아프리카 민중들을 살려달라고 드린 기도가 몇날 며칠이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춘 날 또한 얼마이던가. 그런 기도와 간절함으로 품종 개량을 연구했기에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1982년 나이지리아 이키렙부족 추장(농민의 왕)에 추대된 한상기 박사.
 1982년 나이지리아 이키렙부족 추장(농민의 왕)에 추대된 한상기 박사.
ⓒ 한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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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박사는 학문적 탐구 또한 소홀히 하지 않았다. 세계 과학지에 16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한 그는 스웨덴 국제과학재단 자문위원, 미국 코넬대 명예교수, 미국 조지아대 명예교수, 국제구근작물학과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영국 기네스 과학공로상, 영국 생물학회 펠로우상, 미국 작물학회 펠로우상, 벨기에 보드윈 왕상, 서울대 개교 50주년기념 자랑스런 서울대인 상을 받았다.
 
"찌꺼기 길로 가지 말고 죽은 학문을 하지 말라"
 
세계은행은 발간한 책에서 한상기 박사가 '조용한 혁명'에 성공했다며 높이 평가했다. 한상기 박사 옆에 놓인 것이 아프리카 사람들의 주식인 '카사바'다
 세계은행은 발간한 책에서 한상기 박사가 "조용한 혁명"에 성공했다며 높이 평가했다. 한상기 박사 옆에 놓인 것이 아프리카 사람들의 주식인 "카사바"다
ⓒ 한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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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임브리지로 가야 하나? 아프리카로 가야 하나?"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이 한상기 박사를 연구원으로 초청했다. 포드재단이 아프리카 식량난 해소를 위해 나이지리아에 창설한 국제열대농학연구소에서도 그를 초청했다. 학자로서 명성을 높일 수 있는 케임브리지를 선택할 것인가. 기아로 허덕이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살리는 가시밭길을 선택할 것인가.
 
"케임브리지로 가서 유전학을 더 연구할 것인가? 아무도 도전하지 않은 길, 기근과 기아로 죽어가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살리는 식물 개량을 연구할 것인가? 두 개의 비행기 표를 손에 들고 망설이다 아프리카 비행기를 탔습니다."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 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모교 교수로 재직하던 한 박사는 1971년 아프리카 비행기를 탔다. 큰딸은 한국에 두고 아내와 세 자녀를 데리고 나이지리아로 향했다. 당시 나이지리아는 내전과 아사로 200만 명이 희생된 비아프라 전쟁 종료 직후였다. 명성을 쌓을 수 있는 길을 두고 누구도 가지 않으려는 길, 두렵고 외로운 길, 위험한 할 길은 선택한 한상기 박사가 조국의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나. 나도 20~30대에는 불안했습니다. 뚜렷한 길이 보이지 않아 헤맸습니다. 아프리카를 택한 것은 편한 길은 내 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다져 놓은 길은 찌꺼기 길입니다. 새롭지도 않고 개척할 필요도 없으니 도전할 필요도 없고 용기를 낼 필요도 없습니다. 그 길을 지나간 이들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며 비판 없이 가는 길은 편하긴 하지만 내 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많이 간 길, 편하고 쉬운 길보다 힘들고 위험하지만 자기의 길을 선택하길 바랍니다."
  
웅진출판사가 한상기 박사의 아프리카 이야기를 펴낸 <까만 나라 노란추장>이 청소년들에게 꿈을 키워주었다.
 웅진출판사가 한상기 박사의 아프리카 이야기를 펴낸 <까만 나라 노란추장>이 청소년들에게 꿈을 키워주었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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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학자가 청소년과 청년에게 한 당부가 절절하다. 조국에 돌아와 보니 그리던 조국이 아니다. 청소년과 청년들이 꿈과 희망을 잃어버린 것 같아 안타깝다. 한 박사는 "가난을 모르고, 음식을 마구 버리고,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고 말했다. 후학들에게는 서릿발 같은 메시지를 던졌다.
 
"왜 박사가 돼야 하는지 자신에게 물어보고 공부하길 바랍니다. 박사 학위 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배운 것을 사회를 위해 제대로 써먹지 않고 간판이나 따려고 공부한다면 당장 중단하길 바랍니다. 그것은 죽은 학문입니다. 공부를 하려면 생명을 살리는 공부를 하십시오."
 
노학자는 그러면서 은사인 류달영 박사의 좌우명을 소개했다.
 
"그대
아끼게나 청춘을
오늘도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젊은 하루를 뉘우침 없이 살게나."

태그:#한상기 박사, #아프리카, #서울대 교수, #식물유전 육종학자, #치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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