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드모와젤> 포스터

영화 <마드모와젤> 포스터 ⓒ 부산국제영화제

 
나는 유쾌한 영화가 좋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꽤나 심각한 얘기도 펼쳤지만 그도 말했듯 '가벼움'과 '무거움'의 경계는 애매모호하다. 아니 변증법적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단계 변화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어떻게 하여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아이가 되는가를." 니체가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한 말이다.
 
어린 아이의 영혼은 가볍고 유쾌하다. 아침 햇살이 그러하듯이. 빛은 그림자를 남긴다고 하지만 그건 그림자의 일이고 빛은 빛일 따름이다. 등에 져야 할 무거운 짐도 숨겨야 할 뒤도 없는 빛은 세상 어느 곳도 빠짐없이 비춘다.
 
사랑, 배신, 복수의 이야기 속에 숨겨진 의미
 
 영화 <마드모와젤> 스틸 컷. 아르시스 후작과 마담 라 뽐므레이.

영화 <마드모와젤> 스틸 컷. 아르시스 후작과 마담 라 뽐므레이. ⓒ 부산국제영화제

 
엠마뉘엘 무레 (Emmanuel Mouret) 감독의 <마드모아젤 (원제: Mademoiselle de Joncquières)>은 유쾌한, '빛'의 영화로 다가온다. 밝고 아름다운 화면이 빛의 마술사인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빼 놓은 것 같아서도 그렇지만 그보다 더 주목해야 할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영화의 화폭 저 배경에 18세기 프랑스의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의 발랄한 계몽 정신이 영화 내내 빛을 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디드로의 사상을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풀어놓고 싶었다." 감독의 말이다.
 
영화의 표층구조는 간단하다. 사랑과 배신, 그리고 복수다. 파리 사교계에서 난봉꾼으로 이름난 아르시스 후작이 아름답고 지성적인 젊은 미망인 라 뽐므레이의 몸과 마음을 마침내 얻어낸 것은 사랑의 기적이고, 그 사랑을 성취하자 시나브로 열정이 식어간 아르시스 후작의 얄궂은 마음은 라 뽐므레이의 사랑과 믿음에 대한 배신이다. 그리고 자존심 강한 라 뽐므레이가 애꿎은 마담 종키에르와 그의 16세 딸 ('마드모아젤')을 끌어들여 아르시스 후작에게 일련의 망신과 패배를 안겨주려고 펼친 모종의 작전은 배신에 대한 복수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심층에서 움직여 나가는 것은 18세기 유럽을 풍미한 계몽사상의 가치로서 이성, 관용, 연민, 자유, 정의, 인습 타파 같은 것들이다. 우선 아르시스 후작의 열정이 식었음을 확인한 라 뽐므레이가 쓰라린 실연의 아픔과 배신감에 몸을 떨면서도 둘의 관계를 연정에서 우정으로 안착시킨 것은 그녀의 이성이다. 아르시스 후작이 구애를 해 올 때 낭만적 사랑의 비극적 종말을 생각하며 구애하는 그의 내면을 흔들리는 자신의 내면과 함께 면밀히 탐구하게 했던 바로 그 이성 말이다.

18세기 유럽을 풍미한 계몽사상

아르시스 후작은 어떤가. 그의 사랑의 정념이 라 뽐므레이에서 마드모아젤 드 종키에르에게로 옮아갔다고 해서 우리는 그를 위선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도덕률은 절대적인 게 아니다. 또한 그는 그런 마음의 현실을 감추지 않는 솔직함을 지녔다. 라 뽐므레이에게 한창 빠졌을 때나 마드모아젤 드 종키에르에게 거의 미칠 지경으로 연모의 정을 품게 되었을 때도 그에겐 하나의 진실만 있을 따름이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기! 그러니까 그는 위선자가 아니라 자유의 존재인 것이다. 사랑이라는 정념의 불꽃은 때가 되면 식게 마련이고 이는 디드로도 말했듯이 '인간보다 더 현명한 자연'의 섭리고 진실이다.
  
볼테르(Voltaire)와는 또 다른 디드로 특유의 계몽철학은 그의 <라모의 조카>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 소설은 자신을 '미치광이, 후레자식, 무식꾼, 게으름뱅이, 먹보, 어릿광대, 바보 라모'라고 희화화시키는 자유인으로서의 라모와 윤리적 태도를 견지할 수밖에 없는 계몽 철학자(디드로)의 대화다. 여기에선 냉철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거리의 자유인(자연인)인 디오게네스가 충돌하며 뒤섞인다. 다시 말해 이성과 윤리와 합리성의 세계에 시적(詩的)인 것이 물결치고 있다. 자연, 사랑,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카오스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기에 디드로의 또 다른 소설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장면도 나온다.

어느 날 칼과 칼집이 싸움을 했답니다. 칼이 칼집에게 말하기를 "이 방탕한 여자야! 넌 매일 새 칼을 받아들이는구나." 그러자 칼집이 칼에게 대답했죠. "당신은 바람둥이야. 날마다 칼집을 바꾸니." "칼집, 당신이 약속한 건 이게 아니잖아." "칼, 당신이 먼저 날 배신했어요." 싸움이 식탁에까지 번지자 칼과 칼집 사이에 앉아 있던 자가 말했어요. "칼, 자넨 여러 칼집으로 들어가도록 하느님이 만들었다는 걸 모르오? 그리고 칼집, 자넨 하나 이상의 칼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졌다는 걸 모르오?"

<라모의 조카>의 라모와도 같은 자크가 디드로와 같은 주인에게 해주는 '우화'로서 자연을 거스르는 사회적 인습과 고정관념에 대한 신랄한 풍자인 것이다.
 
라 뽐므레이가, 숱한 여성들을 유혹하여 고통에 빠뜨리는 대표적 남성으로서 아르시스 후작을 복수(응징)키로 한 것은, 그녀가 자기 멘토 친구에게 선언했듯, 약자인 여성의 입장을 대변해 모종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매우 계몽적 태도로서 우리는 여기에 박수를 보낼 수 있다.
 
그런데 영화는 라 뽐므레이의 복수 작전이 결국엔 성공하지 못하는 것으로 끝난다. 애초 그녀의 의도는 아르시스 후작이 '라파엘로의 성모'라고까지 칭송하며 어렵사리 결혼까지 하게 된 '성처녀' 마드모아젤 드 종키에르가 실은 매춘부였다는 것을 그가 뒤늦게 알게 함으로써 그를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그렇게만 돌아가지는 않는다.
 
아르시스 후작이 충격으로 잠시 흔들리는 동안 '마드모아젤'은 그녀와 어머니를 자신의 복수전의 제물로 끌어들인 라 뽐므레이에게 항의를 할 뿐 아니라 자신을 진실로 사랑하는 게 분명한 아르시스 후작에 대한 죄책감을 견디지 못해 강물로 뛰어 드는 자살을 감행한다. 다행히 구조가 되지만 그녀는 아르시스 후작의 어떤 요구나 명령도 다 받아들이겠다고, 평생을 숨어 사는 것으로 속죄를 하겠다고 말한다.

성공하지 못한 복수의 뒤안길에는 계몽 철학이?
 
 영화 <마드모와젤>의 스틸 컷. '마드모와젤'에 빠진 아르시스 후작.

영화 <마드모와젤>의 스틸 컷. '마드모와젤'에 빠진 아르시스 후작. ⓒ 부산국제영화제

 
반전의 주인공은 아르시스 후작이다. 그는 파리 사교계와 세간의 온갖 조롱과 구설에도 불구하고 '마드모아젤'에게서 위선과 거짓의 매춘부가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성스러움을 다시 발견하고 명실상부한 '후작 부인'으로서의 '마드모아젤'과 함께 자신의 영지로 떠나는 것이다. 그 빛으로 가득한 인상파 그림처럼 아름다운 장면이야말로 디드로의 계몽철학의 승리를 보여준다고 하면 과장일까?
 
우리말 '계몽'은 프랑스어 '빛의 세기'(Siècle des lumières)에서 왔다. '계몽'이라 번역되는 영어의 enlightenment에도 '빛'(light)이 들어있다. 그 빛은 성서에서 말하듯 '어둠이 이기지 못하는 빛'으로서 태양의 빛이면서 진리와 진실의 빛이다. 영화관을 나서자 21세기의 부박한 자본의 세상이 내 앞을 다시 가로막는 느낌이 들었다. 참으로 계몽의 빛이 요구된다 할 우리네 세상이 말이다.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임마뉘엘 무레 계몽사상가 드니 디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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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오랫동안 고교 교사로 일했다. <교사를 위한 변명-전교조 스무해의 비망록>, <윤지형의 교사탐구 시리즈>, <선생님과 함께 읽는 이상>, <인간의 교사로 살다> 등 몇 권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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