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의 낭군님>.

<백일의 낭군님>. ⓒ tvN

   
동북공정 문제가 시끄러웠던 2004년 이후로, 우리나라 사극들은 드라마 내용이 민족적 자긍심을 해치지 않도록 주의한다. 정도가 과도한 경우도 없지 않지만, 중국과의 관계에서 한민족 왕조의 격을 떨어뜨리지 않고자 노력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종래의 습관에 기인하는 문제점들이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사극 속의 조선시대 사람들이 자기네 군주를 '조선국왕'으로 부르는 장면이 그중 하나다. '왕'보다는 '국왕'이 좀더 격식을 갖춘 표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사극 제작진이 그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이것은 중국이 조선 군주를 폄하하고자 사용한 호칭이었다.
 
지금 방영 중인 tvN 사극 <백일의 낭군님>에서도 국왕이란 용어가 아무 생각 없이 쓰이고 있다. 지난주 화요일인 16일 제12회에서는 임금 이호(조한철)가 세자 책봉식을 거행하는 장면이 나왔다. 행방불명된 세자 이율(도경수 분)을 대신해 동생인 서원대군(지민혁 분)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하는 의식이었다.
 
행사가 절정에 달했을 때였다. 누군가 식장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들어왔다. 좌의정 김차언(조성하 분)이었다. 서원대군 책봉에 불만을 가진 이였다. 세자 이율의 생존 사실을 알려 책봉식을 저지하고자 그런 무례를 범했던 것이다. 이때 좌의정과 임금 사이에 오고간 대화의 핵심은 아래와 같다.
 
좌의정: 전하! 서원대군의 책봉식을 멈추어주십시오!
임금: 국왕인 내가 결정한 일이다. 감히 일개 신하인 좌상이 거역하겠단 것인가?
 
국왕(國王)이란 말 자체는 틀린 게 아니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 표현을 가급적 삼갔다. 중국 황제가 외국 군주를 책봉할 때 사용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웃나라 군주를 조선국왕·일본국왕·유구국왕 하는 식으로 불렀다. 유구는 오키나와였다.
 
일본 경우에는, 이른바 천황이 아닌 막부 쇼군 즉 무신정권 수장이 일본국왕으로 불렸다. 천황이 힘이 없어 쇼군이 외교 업무를 주관했기 때문에, 중국인들의 눈에는 쇼군이 일본국왕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국왕 표현은 중국의 신하국 군주라는 뉘앙스를 풍겼다. 그래서 조선인들이 가급적 기피한 것이다.
 
중국이 조선에 보낸 공식 서한에는 "조선국왕 아무개"란 표현이 많았다. 원문은 "朝鮮國王某"다. 임금의 실명을 거론하는 게 실례였기 때문에 이름 대신 '아무개'란 표현을 쓰긴 했지만, 조선 정부 입장에서는 자기네 임금을 '아무개'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아무개' 표현 앞에 '조선국왕'이 따라다녔으니, '국왕' 표현에 대한 감정이 더 안 좋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구왕국도 조선 임금을 '조선국왕 전하'라고 불렀다. 유구 역시 중국과 사대관계를 체결했기 때문에, 중국의 태도를 답습해 조선국왕이라 부른 것이다. 하지만 '조선국왕' 뒤에 '전하'를 붙였다. 그런 식으로 예의를 표현한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 정부 입장에서는 '전하'가 붙는다 해도 '국왕'이란 표현이 달가울 리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런데 <백일의 낭군님>에서는 조선 임금이 공식석상에서 스스로를 국왕으로 낮추어 부른다. 위에 소개한 대화 분위기에서 느낄 수 있듯이, 임금 이호는 화가 난 상태에서 자신을 높이고 상대방을 낮추려 했다. 자신을 높이고 싶어 하는 감정상태에 처한 조선 임금이 자기비하적인 '국왕' 표현을 쓰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실제로 그랬다면, 식후에 신하들이 "화가 나셨는데도 꽤 겸손하셔"라고 수근댔을 것이다. 
 
 <백일의 낭군님>의 임금 이호(조한철 분).

<백일의 낭군님>의 임금 이호(조한철 분). ⓒ tvN

  
물론 조선에서 국왕이란 표현이 전혀 사용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조선 임금 스스로 조선국왕을 자칭했다. 중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무역거래를 계속 하자면 부득이한 일이었다.
 
조선 자체적으로 '왕'이란 표현을 사용한 일도 많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대(大)자를 붙여 대왕이라 불렀다. 세종한테만 대왕 칭호를 부여한 게 아니었다. 왕이란 칭호를 사용해야 할 경우에는 다른 임금들한테도 '대'자를 붙여줬다.
 
'대'는 태(太)와 혼용됐다. 대왕이란 표현은 고구려 때 사용한 태왕과 같은 의미였다. 고구려에서는 태왕 밑에 제후급의 왕을 두었다. 따라서 고구려 태왕은 황제와 상응했다. 조선왕조는 부득이하게 왕이란 칭호를 사용해야 할 경우에는, 태왕에 상응하는 대왕이란 표현을 씀으로써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대왕은 공식 칭호가 아니었다. 이 칭호는 주로 시호에 사용됐다. 현직 군주의 공식 칭호는 주상(主上)이었다. 사극에 흔히 나오는 '주상 전하 납시오!'의 그 '주상'이 공식 표현이었다. 이에 상응하는 중국식 표현이 황상(皇上)이다. '주상'은 '황'만 안 붙었다 뿐이지, 위상 면에서는 황상과 별 차이 없는 표현이었다.
 
의미만 놓고 보면, 주상은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주(主)님과 맞먹는 혹은 높은 용어였다. 어찌 보면 인간이 사용하기에 과도한 표현이었지만, 임금이 하늘의 대리인으로 간주되던 시대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용어였다.
 
공식 칭호인 '주상'은 동학혁명이 벌어진 해인 1894년 연말에 '대군주'로 개칭됐다. 이때부터는 주상 전하라고 부르지 않고 대군주 폐하라 불렀다. 그러다가 1897년에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황제 폐하로 격상된 것이다. 518년 조선왕조 역사에서 502년 동안 '주상' 표현이 사용됐으니, 조선의 대표적인 군주 칭호는 주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초대 조선 주상인 이성계 어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초대 조선 주상인 이성계 어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이렇게 조선은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국왕이란 표현을 감내했지만, 자체적으로는 황상과 다를 바 없는 주상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군주 칭호에 이렇게 민감했기 때문에, 일본이나 대마도는 조선을 대할 때 각별히 신경을 써야 했다. 일본은 조선 임금을 조선황제 혹은 조선국황(朝鮮國皇)으로 불렀다. 이런 표현 뒤에 '폐하'라는 경칭을 붙여줬다. 1869년까지 독립정권을 유지한 대마도도 일본과 똑같은 태도를 유지했다.
 
조선시대의 유구는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데 비해, 일본의 경우에는 중국과의 관계가 덜 긴밀했다. 1551년부터 1872년까지는 일본과 중국의 국교가 단절돼 있었다. 1551년 이전에도 양국의 교섭은 그다지 긴밀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일본이 중국 눈치를 보지 않고 조선 임금을 황제로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과의 관계가 긴밀했던 유구가 중국을 본받아 조선국왕 표현을 사용한 것과 대조되는 일이다.
 
이처럼 일본이나 대마도도 조선의 비위를 맞추고자 조선국왕이란 표현을 삼가고 조선황제나 조선국황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일본·대마도도 그랬는데, 우리나라 사극들이 조선국왕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인들의 중화주의적 세계관이 반영된 표현을 한국인 스스로 사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백일의 낭군님>에서는 낭군님이라는 듣기 좋은 표현으로 남편을 부른다. 조선시대 임금들한테도 그런 마음을 써주었으면 좋겠다.
백일의낭군님 국왕 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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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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