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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도시농부 정혁기씨.
 글 쓰는 도시농부 정혁기씨.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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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뿌리고 심고 가꿔 수확하는 농사일이 알고 보면 때를 아는 것이다. 땅과 하늘과 햇빛과 바람의 철을 느끼는 것이다. 봄에는 아지랑이로, 여름에는 가뭄과 녹음으로, 가을에는 여물고 물들며, 겨울에는 한천, 삭풍으로 왔다가는 철을 아는 것이다."

'향림도시농업체험원'(아래, 향림원) 운영 위원이자 도시농업 전문가인 정혁기(64)씨는 농사를 "철을 알고 때를 아는 것"이라고 했다. 도시에도 동지와 추분과 하지와 춘분이 찾아오지만 절기를 모른 채 살아간다. 더우면 에어컨을 틀고 추우면 보일러 온도를 올릴 뿐이다. 씨 뿌리고 심고 가꿀 필요도 없다. 돈 주고 사먹을 뿐이다. 도시의 삶이 피폐한 것은 땅과 하늘과 햇빛과 바람의 철을 모른 채 살아가기 때문이다.

글 쓰는 도시농부이기도 한 정씨는 2012년부터 6년여 간 직업전문학교, 평생교육원, 지역자활센터, 도시농업지원센터 등에서 도시농업 교육을 하면서 쌓인 교안과 체험을 정리해 <철 따라 마중하는 도시농업>(부크크)이란 제목의 도시농업 안내서를 2017년 편저로 펴냈다. 텃밭재배, 주말농장, 스쿨팜 등 도시에서 영농활동을 하거나 귀촌과 귀향을 하려는 사람들의 필요에 맞춘 책이다.

글 쓰는 농부의 시골일기
 
정혁기씨가 펴낸 <글 쓰는 농부의 시골일기>와 <철 따라 마중하는 도시농업>
 정혁기씨가 펴낸 <글 쓰는 농부의 시골일기>와 <철 따라 마중하는 도시농업>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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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화순 산골에서 태어난 정씨는 초등학교 때 도회지로 나왔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농과대학에서 농업생물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금융, 교육, 언론, 출판 등 농업과 관련 없는 분야에서 일하다 일손을 놨다. 쉰 중반이었다. 

그는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고민하다 "농사일이 내게 남아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들어 농사에 뛰어들었다. 그는 먼 길을 돌고 돌아 농사라는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표현했다.

"사단법인 농어촌사회연구소와 관계를 맺어 농업이 생소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머리로 농사를 지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근육․뼈․신경을 농사체질로 개혁하고 농사기구․기계에 익숙해지고, 봄․여름․가을․겨울을 따라 철 맞춰 일머리를 배우는 것이 내가 세운 목적이었다."

'농어촌사회연구소' 부소장으로 6년간 재직한 그는 쉰여섯이던 2010년 충북 괴산 '흙살림' 농장에서 농사일을 시작했다. 서울에서 36년 동안 살다 농사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농민은 일하며 하늘의 부림을 받을 뿐이란 말에 순응한 그는 꾀부리지 않고 농사를 지으면서 일머리를 익혔다.

40kg 거름 포대를 지게로 지고 밭에 날랐다. 처음엔 비틀거렸지만 요령이 붙었다. 천 평 논에 20kg 퇴비 75부대를 손으로 옮겨 뿌리기도 했다. 트랙터를 몰고, 논을 갈아엎고 물을 댄 논을 왔다 갔다 하다 보면 옷이 진흙투성이가 됐다. 배추 심기 위한 밭 작업을 할 때는 멱을 감듯 땀을 흘렀다. 땀을 쭉 뺏더니 비로소 몸이 가뿐해졌다. 농사의 기쁨은 이런 것이다.

밤이면 혼자 소주를 마시고 퉁소를 불고 담배를 피웠다. 담배가 떨어져 밤길을 걸어 점방에 도착했다. 점방 주인은 일찍 문을 닫았다. 주인을 깨우기 미안해 점방 문을 두드리지 못했다. 빈손으로 돌아오는데 달이 따라왔다. 새벽에 깨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북두칠성이 땅에 꽂히듯 거꾸로 걸려 있었고 밤새 천둥이 울고 번개가 번쩍이던 다음 날 아침에는 소쩍새가 울지 않았다.

2년여의 시간이 지나갔다. 2010년 3월 농사일을 시작한 그는 이듬해 10월에 농사일을 마감했다. 괴산을 떠나는 날 아침에 마당 한편에 열린 산수유 열매를 땄다. 이웃마을 사는 동료가 아침 먹으러 오라고 했다. 정성껏 차려준 아침을 먹었더니 배가 든든했다. 동료는 서울 가더라도 놀러 오라고 했다. 저녁엔 동네 아주머니가 밥상을 차려주었다. 앞집 할머니께도 인사드렸다. 사과와 복숭아 등 과일을 주신 할머니를 비롯해 정든 이웃과 작별인사를 하고 상경했다.

그는 2012년 <글 쓰는 농부의 시골일기>(이담)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다. 농사일 하는 틈틈이 '삼방재일월기'(三訪齋日月記)라는 제목으로 쓴 글을 지인들에게 보내고 <미디어오늘>과 <흙살림연구소>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책으로 냈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일상의 삶과 글쓰기의 결합이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지 그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면서 "한국 농업과 농민 문제에 대해 간결하고 정리된 언어로 쉽게 풀어 설명하고 있다"는 후기를 남겼다.

일하고 땀 흘린 뒤에 먹어라
 
정혁기씨가 도시농부들에게 농법을 가르치고 있다.
 정혁기씨가 도시농부들에게 농법을 가르치고 있다.
ⓒ 송화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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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혁기씨는 과묵하다. 강의 때는 친절하지만 보통 때는 말이 적다. 짬이 나면 전통악기 퉁소와 대금을 연주한다. 그는 향림원에서 '향림퉁소전통문화반'이란 모임을 만들어 주민들에게 퉁소를 가르치기도 한다. 그의 이야기를 쓰면서 문득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란 노래의 가사 일부가 스쳐 지나갔다.

"야망에 찬 도시의 그 불빛
어디에도 나는 없다
이 큰 도시의 복판에
이렇듯 철저히
혼자 버려진들
무슨 상관이랴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호란 사나이도 있었는데"


그는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란 작품을 좋아한다. 농사일을 끝낸 농부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밥으로 감자를 먹는 그림이다. 그가 고흐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농촌과 농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지난 10일 향림원에서 그를 만났다. 귀농․귀촌 생활을 잘하는 방법을 물었더니 두 가지를 알려주었다. 하나는 농사에 필요한 체력을 기르는 일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시골사람들과 어울릴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도시에선 돈 있으면 다 해결되지만 시골에선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귀농과 귀촌의 실패 원인은 시골의 텃세보다 아는 척하고 잘난 체 하는 도시의 습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어디에서 살든 땀 흘리며 살라고 말하면서 도시농업을 권했다.

"사람은 일해야 한다. 일하고 땀 흘리면서 허기짐을 느껴야 한다. 그렇게 허기질 때 밥을 먹어야하는데 일도 하지 않고 배고프기도 전에 음식을 마구 먹으니 몸이 무겁다. 헬스 등의 방식으로 땀을 흘리는데 그렇게 해서는 노동의 기쁨을 맛볼 수 없다. 반면 도시농업은 일하며 땀 흘려서 거둔 작물을 먹고 나누는 기쁨을 준다. 도시농업이 최고라고 말할 순 없지만 생명을 다루면서 자연과 친숙해지는 도시농부로 살면 욕심은 줄어들고 마음에 평화가 깃든다."
 

퉁소 부는 도시농부의 신명
 
논두렁 축제에서 퉁소를 부는 정혁기씨.
 논두렁 축제에서 퉁소를 부는 정혁기씨.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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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속이기 위해 산 것은 아닌데 이 도시에서 거주하면서 삶에 속았고 삶을 속였다. 씨 뿌리지 않고도 거두었고 땀 흘리지 않고도 먹었다. 땀 흘린 이들은 가난하고 삶을 속인 자들은 부를 쌓았다. 보수와 진보 구분할 것 없이 욕망으로 뒤엉킨 세상, 이런 세상을 보자고 불의와 싸웠는가.

그는 농사짓고 땀 흘리면서 삶의 진실을 되찾았다고 했다. 삶이 별것이겠는가. 철을 알고 심은 대로 거두고 거둔 것을 이웃과 나누며 사는 게 삶이 아니겠는가. 그는 지난봄, 도시농부들과 함께 향림원 논에 모내기를 하면서 농부가를 불렀다. 논에 한 모 한 모, 모를 꽂으면서 풍물 장단에 맞춰 흥타령을 했다.

지난 18일 향림원에서 논두렁 축제가 열렸다. 지난봄에 심은 것들을 거두는 날이다. 친환경으로 재배한 벼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수확하는 행사에서 그는 '향림퉁소전통문화반' 회원들과 함께 풍년가를 연주하며 노래했다. 막걸리 한 잔을 들이키자 가슴 속 신명이 살아났다. 목청은 뜨거워졌고 어깨춤이 저절로 나왔다. 괴산의 이웃처럼 이 도시의 이웃들도 정직하게 땀 흘리고 거두며 밥과 정을 나누며 산다면 지화자 얼씨구나 좋겠다.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네
금수강산에 풍년이 왔네
지화자 좋다 얼씨구나 좋구 좋다

 
막걸리 한 잔에 흥이 난 정혁기씨와 도시농부들.
 막걸리 한 잔에 흥이 난 정혁기씨와 도시농부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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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향림도시농업체험원, #도시농부, #정혁기, #글 쓰는 도시농부, #논두렁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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