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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설국열차>에서 메이슨 총리(틸다 스윈튼)는 주기적으로 빈민들이 모여 사는 꼬리 칸에서 몸집이 작은 아이를 데려간다. 눈앞에서 자식을 빼앗긴 부모들은 울부짖지만 메이슨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메이슨에게 어린아이들이 필요했던 것은 열차의 수리를 위해서였다. 아무리 최첨단 열차라도 인간의 손으로 정비해 주어야 할 곳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곳은 너무나 좁아 몸집이 작은 어린아이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메이슨에게 잡혀간 어린아이들은 열차 기계실의 좁은 공간에서 열차가 계속 굴러가도록 노동을 해야 했다. 그러다 몸집이 커져 더 이상 좁은 공간에 들어갈 수 없게 되면 다시 더 어린 아이가 필요했다. 메이슨이 주기적으로 꼬리 칸의 어린아이들을 데려간 이유였다. 봉준호 감독이 19세기 영국 굴뚝청소부들의 사연을 알았는지 모르지만 이는 <설국열차>의 그것과 너무나도 닮은 점이 많다.

19세기, 산업혁명을 맞이한 영국의 발전은 눈부셨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눈부심 뒤에는 그늘이 있었다. 특히 이 그늘의 많은 부분은 여성과 아동의 희생이 채우고 있었다. 굴뚝은 산업화를 상징했다. 하지만 산업화의 상징인 굴뚝이 시커먼 연기를 마음껏 내뿜을 수 있던 데 많은 아동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당시 영국에서는 말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어린아이들이 굴뚝을 오르내려야 했다. 대여섯 살의 어린아이들이 부대를 들고 굴뚝을 오르내리며 털어낸 검댕을 쓸어 담았다.

값싸고 다루기 쉬운 아동노동

굴뚝청소부로 어린아이들이 선호된 이유는 간단했다. 좁은 굴뚝을 비교적 자유롭게 오르내리기 위해서는 몸집이 작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아이들은 유순했고 성인 노동자보다 통제하기 쉬웠다. 임금부담 역시 가벼웠다. 심지어 아이들에게는 끔찍한 체벌이 가해지기도 했다. 아이들은 하루 15시간 노동에 시달렸고 식사시간은 고작 10분 남짓이었다.

그럼에도 굴뚝청소는 언제나 고되고 위험했다. 공기가 통하지 않아 질식하기도 하고, 옷가지가 엉켜 목이 조이기도 했다. 연통이 뜨거운 상태일 때도 있었고, 굴뚝이 약해 무너지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에 발간된 한 팸플릿에는 굴뚝청소를 하다 사고를 당해 사망한 아이의 상황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굴뚝을 통과해서 연통의 두 번째 모퉁이로 내려가던 아이는 연통이 검댕으로 완전히 막힌 것을 알게 된다. 연통 윗부분의 벽에 붙은 검댕을 떨어낸 것이 쌓였기 때문이다. 아이는 연통을 통과하려고 기를 쓴 끝에 어깨부분까지 빠져나가는 데에 성공한다. 하지만 몸부림을 치는 과정에서 검댕이 자신의 온 몸을 꽉 짓누르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더 이상 아래로 내려갈 수 없다. 이제 앞으로 나아가려고 해 본다. 하지만 이런 시도도 가능하지 않다. 연통의 수직 부분을 돌이 덮고 있는데, 돌의 뾰족한 부분이 아이의 어깨를 세게 누르기 때문이다. 아이는 뒤통수 때문에 ··· 어느 방향으로도 조금도 나아갈 수 없게 된다. 아이의 얼굴은 굴뚝청소용 덮개에 이미 덮여 있는데, 아래의 검댕이 심하게 눌러 숨을 쉴 수 없다. 이 절박한 상황에서 아이는 거칠게 몸을 빼려 시도하지만 힘이 부족해 어쩔 수 없다. 아이는 울부짖고 신음을 한다. 몇 분이 지나자 아이는 질식했다. 뒤늦게 벽돌공을 불러와 연통에 구멍을 뚫고 아이를 끄집어냈지만 이미 아이는 사망한 후였다. 얼마 후 사망원인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검시배심원단(Coronor's Jury)은 '사고사'라고 평결을 내렸다.

이러한 상황은 탄광노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작은 아이들이 비좁은 갱도를 기어 다니며 탄을 캤다. 당시 영국에서 탄광의 고용 연령은 4살부터였다. 다른 업종도 상황은 비슷했다. 모직공장에서는 6살, 면직은 8살부터 아이들이 하루 12~18시간을 일했다. 아동 노동이 전체 노동자 수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컸다. 면직은 35%, 모직과 레이스, 아마는 40%, 견직은 46%에 이르렀다. 탄광은 22%로 낮았지만 굴뚝 청소는 대형 공장을 제외하고는 아이들이 맡았다. 이런 통계마저 아동 노동이 다소 시정됐다는 1833~1834년의 자료다.

자본에게 아동노동을 너무나도 매력적인 존재였다. 1830년대 랭카셔 지방에서 11세 이하 아동의 주급은 약 2실링 3데니였다. 20~40대 노동자의 평균 주급 21실링에 비하면 10분의 1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반항하거나 조직을 결성하지 않았다. 자본은 점점 더 아동노동을 선호했다. 하지만 전체 노동력에서 적게는 20%에서 많게는 50%가까이 차지하는 아동을 원활히 수급하기는 쉽지 않았다.

당시 아동은 가정과 시설 두 곳에서 공급되었다. 산업혁명이 진전될수록 임금이 하락했다. 가장만 일해서는 먹고 살 수가 없었다. 아내와 아이들 모두 일터에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주요 아동의 공급처는 가정 보다는 고아원과 구빈원 같은 아동보호시설이었다.

산업재해가 빈번했던 당시 부모들은 산업현장에서 수도 없이 죽어나갔다. 부모가 살아있어도 먹고살기 어려워 아이를 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자본은 가정 보다 구빈원의 아이를 선호했다. 안정적으로 아이들을 공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못 먹어 몸집이 작았다. 좁은 굴뚝이나 갱도에서 일하기 딱 좋았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아동노동은 연이은 사고로 이어졌다. 1836년 발행된 익명의 팸플릿에는 굴뚝청소 장인이 아이를 죽음으로 내몬 사례가 등장한다.
 
글로스터(Gloucester)에서 10세 남자 아이가 굴뚝청소 장인으로부터 건물 굴뚝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연통에 들어간 아이가 아래쪽으로 내려오지 않자, 장인은 다른 도제를 굴뚝으로 올려 보내 아이의 한쪽 다리에 줄을 묶어 꿀어내리게 했다. 이것이 실패하자, 장인은 위에서 아래로 물을 한 양동이 부으라고 시켰다. 그 다음으로 긴 막대기로 아이를 아래로 눌렀는데, 이 때문에 아이는 목에 상처를 입었다. 열두 시간이 지난 후 석공이 뚫은 구멍으로 아이를 끄집어냈다.

사망에 이르지 않더라도 굴뚝청소 아동은 늘 크고 작은 사고를 접하고 지냈다. 외과의사 라이트(Richard Wright)는 1817년 의회 특별위원회 증언을 통해 굴뚝청소 아동이 겪는 다양한 사고와 질병을 나열했다. 굴뚝을 오르내리고 무거운 검댕가방을 지고 다니느라 발생한 기형, 발육부진, 화상, 영양부족으로 인한 쇠약증, 괴혈병, 사고로 인한 팔다리 절단 등 수많은 산업재해에 대해 그는 상세한 증언을 남겼다.

가혹한 처우도 굴뚝청소 아동이 사고나 질병을 얻는 원인이었다. 성인노동자의 인권 개념도 희미한 시기였으니 아동에 대한 인권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1817년 의회에 보고된 가혹행위 사례를 보면, 피셔(John Fisher)라는 굴뚝청소 장인은 아이들이 굴뚝에 오르도록 발바닥을 뾰족한 물체로 찌르거나 짚단을 깔고 불을 붙였다.

가장 흔한 가혹행위는 아이들의 무릎과 팔꿈치에 소금물을 뿌리고 비벼 굳은살이 생기도록 하는 것이었다. 1863년 의회의 아동고용위원회(Children's Employment Commission)에 보고된 굴뚝청소 장인 러프(George Ruff)의 증언에는 이러한 가혹행위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 아무도 소년이 배우기 위해 거쳐야 하는 가혹행위를 알지 못한다. 살갗이 단단해져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살갗을 문지르는데, 주로 돼지고기집에서 파는 아주 진한 소금물을 뜨거운 불가에 두었다가 팔굼치와 무릎을 문지른다. 당신은 아이들 곁에 작대기를 들고 지켜보거나, 몇 차례 더 문지르는 것을 참으면 반 페니를 주겠다고 꾀어야 한다. 처음에 아이들이 일을 하고 돌아오면 팔과 무릎에서 피가 흐르고, 마치 무릎에서 슬개골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보인다. 이 때 그들을 다시 소금물로 문지르고서 즉시 다른 굴뚝으로 보내야 한다. 어떤 아이들의 경우 여러 해 동안 피부에 딱지가지지 않은 것을 보기도 했다.

가혹한 아동노동에서 촉발된 최초의 노동법

공장의 열악한 노동 조건과 아동 노동 실태는 곧 영국의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결국 1802년 최초의 노동법이라 불리는 '도제의 건강 및 풍기에 관한 법률'이 만들어졌다. 이 법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교구 도제(徒弟)를 대상으로 한 법이다. 고아원 등의 아동을 교구(敎區)별로 작업장에 알선하는 교구 도제를 대상으로 하루 12시간 이내 노동과 교육 기회를 제공하도록 했다.

1819년에는 보다 강력한 공장법이 나왔다. 면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17명의 소녀가 숨진 앳킨슨(Atkinson) 사건으로 비난 여론이 비등하자 제정된 이 법은 9세 이하 고용 금지와 16세 미만 12시간 노동, 위반 공장주에 대한 벌금 10~20파운드 부과 등을 내용으로 삼았다. 이어 1825년, 1829년, 1831년에도 조금씩 진전된 내용의 공장법이 제정됐다.

그러나 연이어 공장법이 만들어졌지만 제대로 이행되지는 않았다. 이 시기 마련된 공장법은 '산업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사회문제를 국가가 규제를 통해 해결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사회 입법'이었으나 효과는 크지 않았다. 법을 지키지 않는 공장주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33년는 왕립위원회가 직접 아동노동 실태를 조사, 발표했다. 보고서의 골자는 '아동은 성인과 비슷한 노동을 하고 있다. 과도한 노동으로 건강위험에 노출된 데다 교육의 기회마저 박탈당한 상태다. 자유의지에 의한 노동이 아니라 부모에 의해 계약된 노동이다. 아동의 부도덕한 태도는 오직 교육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그리고 기존의 공장법은 준수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왕립위원회'까지 나설 정도로 논란의 대상이던 아동 노동에 대한 실태 조사는 '1833년 공장법' 입법으로 이어졌다. 최초의 실효성 있는 공장법으로 평가되는 이 법의 골자는 '9세 이하 아동 노동 전면 금지(견직 공장은 예외), 아동 고용 시 고용주의 나이 확인 의무, 9~13세 아동 노동 하루 9시간 이내로 제한, 13~18세 아동 노동 하루 12시간 이내로 제한, 아동의 야간 노동 금지, 아동에 대한 1일 2시간 이상 의무 교육 실시, 공장법 준수 여부를 감독할 감독관 4명 임명' 등이었다.

1802년 처음 공장법이 만들어지고서도 30년 이상이 지나서야 아동노동이 실제로 규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847년에는 노동계의 숙원이던 하루 10시간 노동을 규정한 공장법이 제정됐다. 

노동법을 만들어낸 의외의 구성

그런데 이 법의 제정을 주도한 세력의 구성은 매우 흥미롭다. 첫 번째는 노동자 집단이었다. '10시간 노동'을 쟁취하려던 방적공 중심의 지속적 노동운동의 결과였다. 두 번째는 토리당 개혁파였다. 토리당에는 전통 지주 출신이 많았는데, 산업자본가들과 대립관계였던 지주들은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편을 들었다. 세 번째는 대기업 소유주다. 기계 개량으로 아동 노동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든 대공장주들은 아동과 여성 노동력에 대한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큰 중소규모 공장과 경쟁을 의식해 공장법 개정에 앞장섰다.

네 번째 집단은 관료 계층이다. 공장법을 반(反) 자본주의 운동의 연장선에서 전개한 토리당 개혁파나 노동자들과 달리 행정 공무원들은 노동과 자본의 자유로운 계약을 규제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행정 효율성 확보를 중시했던 이들은 아동에 대한 실효성 있는 보호장치 마련에 신경을 쏟았다.

이렇듯 최초의 노동법은 노동시장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아동노동의 열악한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노동자들을 위해서만 만들어진 법은 아니었다. 중소규모 공장을 견제하려던 대공장 소유주, 산업자본과 경쟁한 대지주, 행정의 효율성을 추구했던 관료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했다. 이렇게 노동법은 자본가, 지주, 관료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중심에는 노동자가 있었다. 노동자 세력이 없었다면 지주들이 산업자본을 견제하려 해도 노동자들을 지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제기가 없었다면 대공장 소유주들의 아동노동에 대한 비판도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10시간 노동을 쟁취하고자 끊임없이 투쟁했던 노동자들이 없었다면 이마져도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은 분명하다.

노동법은 노동자가 주도해야 한다.

대중들이 노동법에 대해 가장 많이 하는 착각 중 하나는 그것을 노동자를 위한 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법 탄생의 과정에서 알 수 있듯 노동법은 사회의 다양한 세력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위해 작동한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최저임금을 둘러싼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입장차,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대한 중소기업들의 반발, 농업 종사 근로자에 대한 근로시간·휴게·휴일 적용 제외, 노동청에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행정처리 등은 노동법을 둘러싼 사회의 다양한 세력들의 이해관계가 오늘 날 역시 여전함을 보여준다. 노동법은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법이지만 노동자만을 위한 법은 아니다. 하지만 그 주체는 반드시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

1802년 1831년까지 수많은 공장법이 만들어졌지만 아동노동의 열악한 환경은 전혀 개선되지 않은 것처럼 노동자가 노동법의 주체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유명무실할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환경 개선에 대한 노동자 집단의 지속적인 저항이 쌓인 후에야 비로소 공장법(노동법) 다운 공장법이 만들어졌음을 상기해야 한다.

참고문헌

서울경제. 2017. 8. 29. "음울한 자본주의···1833년 공장법"
송병건. 2014. 굴뚝청소 아동의 재해와 사회적 대응, 영국 1750-1875. 영국 연구, 32(0) : 99-131
양동휴. 2007. '경제사 산책' 일조각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광민 변호사는 부천시청소년법률지원센터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그:#노동법, #공장법, #굴뚝청소부, #아동노동, #산업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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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사무소 사람사이 대표 변호사다. 민변 부천지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경기도 의회 의원(부천5, 교육행정위원회)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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