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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가치'를 '기치'로 잘못 쓰신 것 아니에요?"

수업시간 퀴즈를 풀던 중에 한 아이가 따져 묻듯 던진 말이다. 사소한 오타라고 해도 공신력에 흠집이 난다며 짐짓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놀랍게도 아이들 모두 그의 지적에 맞장구를 쳤다. 30명이 넘는 교실의 아이들 중에 '기치'라는 단어에 대해 아는 이가 없었던 거다.

"'기치'라는 말은 군대의 깃발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한자어로, 영어로 치면 '슬로건(Slogan)'이나 '모토(Motto)'쯤 될 것 같다."
"그럼 쉽게 '슬로건'이나 '모토'라고 하시지, 왜 아무도 모르는 어려운 단어를 쓰셨어요? 낯선 '기치'보다 '슬로건'이나 '모토'가 훨씬 더 자연스럽잖아요."


쉬운 외래어를 두고 어려운 한자어를 썼다며, 아이들로부터 되레 핀잔을 들었다. 우리 한글의 70%가량이 한자어라지만, 영어보다 한자어가 더 어렵다고 토로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모르는 영어 단어는 사전을 찾아보기라도 하지만, 한자어를 모른다고 국어사전을 꺼내는 경우는 거의 보질 못했다.

'글로벌 세대'에게 영어는 한자어의 대체재?
 
우리 한글의 70%가량이 한자어라지만, 영어보다 한자어가 더 어렵다고 토로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우리 한글의 70%가량이 한자어라지만, 영어보다 한자어가 더 어렵다고 토로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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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색이 고등학생들인데, 지필고사 때마다 교실을 돌아다니며 문항에 쓰인 단어의 뜻을 일일이 설명해주어야 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다. 문항 말미에 나오는 '추론하라', '타당한 것은', '부합하는 것은' 따위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는 탓이다. 솔직히 처음엔 아이들이 시험 감독 교사에게 농을 거는 줄 알았다.

교과서의 서술을 읽어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음'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고등학생이 있으랴마는 문제는 그 '뜻'을 간파하지 못하는 것이다. 단어의 뜻을 모르니 문장이 이해가 안 되고, 내용 이해가 어렵다 보니 교과서를 읽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셈이다. 십중팔구 한자어가 여럿 들어간 문장들이다.

"업무를 '통할한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해안 '측량권'은 무슨 권리를 말하는 거죠?"
"정치적, 경제적 '예속'을 경계했다는 문장에서, '예속'은 '침략'과 동의어인가요?"


그렇게 어렵거나 생소한 단어도 아닌데, 진도를 나가다 말고 낱말 뜻을 풀이해주느라 수업시간을 허비하기 일쑤다. 그렇다고 아이들의 질문을 대놓고 무질러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낱말 뜻도 모르는 상황에서 수업에 집중이 될 리 없지 않겠는가.

그때마다 칠판에 한자를 적고 용례를 들어가며 뜻을 하나하나 풀어주곤 한다. 여의치 않으면 쉬는 시간에 국어사전을 꺼내 찾아보도록 개별 과제를 내주기도 하지만, 수업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책을 덮고 만다. 이따금 국어수업인지 한국사수업인지 헛갈릴 때도 있지만, 우리 글이 있고 난 다음에 역사도 있다는 생각으로, 기꺼이 아이들의 질문과 마주한다. 아무튼 쉬이 믿기지 않겠지만, 고등학교 수업에 이런 풍경도 있다.

"한국사 교과서에 왜 이렇게 한자어가 많아요? 심심풀이로 짝꿍이랑 교과서의 한 페이지에 한자어가 아닌 낱말을 찾아봤는데, 토씨를 제외하면 '비롯한'과 '다름없는', '받아들였다'와 '이루었다', '내세웠다' 이렇게 다섯 개가 전부였어요. 저희 같은 '글로벌 세대'가 교과서 읽기가 쉽지 않은 이유예요."

순간 '글로벌 세대'라는 한 아이의 말이 귀에 거슬렸다. 모르긴 해도, 한자어투성이인 우리글보다 차라리 영어에 더 익숙한 세대라는 뜻일 게다. 아닌 게 아니라, 아이들은 '한자어'를 '한자'와 동일시했고, 한자 공부를 하느니 수학의 미적분 문제를 풀겠다며 이구동성 말했다. 그만큼 어려워 한다는 이야기다.

재미있는 건, 한자어가 많아 한국사 교과서 읽기가 힘들다는 그가 요즘 즐겨 읽고 있는 책이 <해리포터> 시리즈라는 점이다. 영어로 된 문고판으로, 두 번째 반복해서 읽고 있단다. 영화 <해리포터>를 여러 번 본 탓인지, 책을 읽을 때 영화 속 장면들이 떠올라 영어로 된 문장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고 했다.

그는 영어 참고서와 문제집을 푸는 것보다 영문 소설 등을 자주 접하는 게 영어 실력 향상에 더 도움이 된다며 또래 친구들에게 조언하기도 했다. '고루하고 배우기 힘든' 한자보다 '세련되고 익히기도 쉬운' 영어를 한글과 함께 공용어로 지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의견도 피력했다. 그런 그의 영어 성적이 국어나 한국사의 그것보다 더 높은 건 당연지사다.

어디서 배운 건진 몰라도, 그는 역사적으로 중국과 같은 '한자 문화권'이었기 때문에 세계화가 더뎠던 거라는 주장도 펼쳤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한글도, 따지고 보면 한자를 뿌리 삼은 것이라는 억측까지 서슴없이 내놓기도 했다. 근거라고 해봐야 우리 글 대부분이 한자어로 되어 있다는 게 고작이었지만 말이다.

영어가 '미래 신분 기준'이 될 거라는 아이들

요즘 들어 어릴 적 몇 년 동안 외국에서 살다 온 아이들이 부쩍 늘었고, 드물긴 하지만 부러 한 해 정도 휴학하며 어학연수를 다녀온 경우도 있다. '외국물'을 먹었다고 영어를 다 잘하는 건 아니지만, 영어가 학교 성적은 물론, 사회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심지어 영어 실력이 앞으로 신분을 구분하는 기준이 될 거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기도 한다.

좋은 우리 말글 대신 영어를 사용하는 아이들도 덩달아 많아졌다. 아이들은 '자세히 말해 보라'는 말보다 '디테일(detail)하게 말해 보라'는 걸 더 자연스러워하고, '충격이 크다'거나 '손해가 많다'는 것도 요즘 아이들은 '데미지(damage)가 크다'는 표현을 즐겨 쓴다. '셀프 디스(self-dis)'는 우리 말로 번역하기 힘든 말이지만, 아이들에겐 이미 버젓하다.

그는 '셀프 디스(self-dis)'처럼, 분명 영어지만 영어사전에는 없고 외려 국어사전에 등재되는 단어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는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고도 했다. '국적 불명'의 표현이 늘어나는 것을 두고, 우리만의 현상은 아닐 거라면서 엉뚱하게 영어의 경쟁력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해석했다. 그런 그에게 교과서 읽기가 힘든 건 한글에 한자어가 많아서라기보다는 어릴 적 책 읽는 습관이 잡혀있지 않은 탓이라는 이야기를 차마 건네진 못했다.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영어 예찬론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엄마 품에 안겨 영어로 구연동화를 들었고, 취학 전 영어 유치원에 다녔으며, 외국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영어를 익혀온 터라 영어가 한자어가 많은 우리글보다 익숙해진 것일 뿐이다. 한자어를 한글의 일부로 여겨온 기성세대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그는 한자어 대신 영어를 쓰는 게 무어 그리 대수냐는 식으로 말했다.

어김없이 다시 찾아온 한글날이다. 올해는 아이들로부터, 언어가 의사소통의 수단일진대, 한자어가 수두룩한 한글 문장보다 차라리 영어를 섞어 쓰는 편이 더 낫다는 질책 아닌 질책을 들어야만 했다. 이른바 '글로벌 세대'에게 이미 영어는 한자어의 대체재로 기능하고 있고, 한글과 영어의 거리는 상당히 좁혀진 느낌이다.

사족 하나. 얼마 전 유은혜 신임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유치원 방과 후 영어교육 허용 방침에 이어, 초등학교 1~2학년의 방과 후 영어 과정 허용도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세종특별자치시의 한 유치원과 초등학교 학부모 간담회 자리에서다. 초등학교 1~2학년 영어교육을 허용해달라는 학부모들의 건의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은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취임한 터라 학부모들 앞에서 몸을 사린 듯하지만, 언뜻 조기 영어 교육을 외치는 목소리에 투항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교사로서 지금껏 만나본 학부모 중에는 아이들의 학업 스트레스와 교육비 부담에 유치원은커녕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영어교육을 금지하자는 이들이 훨씬 많았다. 간담회에 참석한 학부모들의 의견이 다수의 여론이라며 눙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 영어교육 허용이 올바른 독서습관 형성과 국어교육을 방해한다고 확언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건 영어 실력에 대한 맹목적인 선망을 부추길 우려가 크다는 점이다. 영어가 미래 '신분증'이 될 거라는 아이들의 말을 결코 흘려들어서는 안 된다. 사교육비 증가는 어쩌면 사소한 문제일 수도 있다.

태그:#조기 영어 교육, #한자어, #한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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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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