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여수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애기섬 인근 바다에서 총살된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는 해상위령제에 참석한 김양기씨. 간첩혐의로 1986년 광주505 보안대 에 연행돼 43일 동안 고문을 받았다. 고문을 못이겨 억울한 간첩이 됐던 그는 무죄선고를 받았다
 여수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애기섬 인근 바다에서 총살된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는 해상위령제에 참석한 김양기씨. 간첩혐의로 1986년 광주505 보안대 에 연행돼 43일 동안 고문을 받았다. 고문을 못이겨 억울한 간첩이 됐던 그는 무죄선고를 받았다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18일 오전 11시, 애기섬에서는 '애기섬 국민보도연맹피학살자(여수국민보도연맹사건)' 해상위령제 및 추모식이 열렸다. 행사에는 전남동부지역인 여수, 순천, 광양, 구례, 보성, 고흥지역 시민, 사회, 노동, 환경단체 150여 명이 참석했다.

해상위령제 및 추모식은 68년 만에 최초로 치러지는 행사이다. 행사는 '여순사건여수유족회' 주관으로 무고한 희생자를 위로하는 위령제를 지내고 추모시 낭독과 망자의 원한을 풀어주는 지전춤 공연, 그리고 헌화 순으로 진행됐다.
  
1950년 7월 여수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망자를 위로하는 해상위령제가 여객선에서 열리고 있다. 애기섬 인근 해상이다.
 1950년 7월 여수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망자를 위로하는 해상위령제가 여객선에서 열리고 있다. 애기섬 인근 해상이다.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여수국민보도연맹사건에 연루돼 억울하게 희생된 망자의 원한을 풀어주는 지전춤을 추는 여성들
 여수국민보도연맹사건에 연루돼 억울하게 희생된 망자의 원한을 풀어주는 지전춤을 추는 여성들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국민보도연맹은 좌익성향의 민간인을 전향시켜 결성된 전국적인 관제단체이다. 정부는 1949년 4월 20일 여순항쟁 가담자 및 관련자 그리고 좌익성향의 민간인을 중심으로 국민보도연맹을 창립한 후 이듬해 3월까지 전국적으로 각 지역 지부를 조직했다. '국민보도연맹 여수지부'는 1950년 1월 28일 여순항쟁과 관련된 자들을 중심으로 시민극장에서 결성식을 열고 창립했다.

여수국민보도연맹사건은 여수시에 거주했던 국민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들을 정부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 검속해 여수경찰서 유치장과 각 지서 등에 구금했다. 그 후 1950년 7월 16일과 23일경, 여수경찰서 경찰과 여수지구 CIC(미군방첩대)대원 그리고 당시 여수 주둔 후 후퇴하던 제15연대 헌병대원들이 남해군 소재 무인도(속칭 애기섬)에서 총살 후 바다에 수장한 사건으로 민간인 희생자는 11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애기섬에서 죽은 아버지
  
애기섬을 가리키고 이는 김양기씨. 1950년 7월  여수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아버지 시신이 수장된 곳이다.
 애기섬을 가리키고 이는 김양기씨. 1950년 7월 여수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아버지 시신이 수장된 곳이다.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애기섬은 경남 남해에 있는 조그만 무인도로 여수에서 여객선을 타고 가면 1시간 15분 걸리는 조그만 섬이다. 오전 10시 돌산대교 유람선 선착장을 떠난 배에는 71명의 희생자 유족들이 침울한 모습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작은 체구에 깡마른 모습의 한 유족이 눈에 띄어 대화를 시작했다.

유람선이 애기섬을 향해 항해하는 동안 바다를 지그시 바라보며 눈만 껌벅이던 김양기(69)씨가 입을 열었다. 여수 시내 초등학교에 근무하던 김씨 아버지는 국민보도연맹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1950년 7월 애기섬에서 총살당했다.

순금분석업에 종사하던 김양기씨는 1986년 어느 날 광주 505보안대에 연행됐다. 끌려간 이유는 아버지 원수를 갚기 위해 간첩이 됐다는 것. 김씨 나이 36세 때 일이다. 505보안대에서 그를 연행한 까닭은 동경에 살고 계시는 3명의 숙부를 만나러 가 조총련에 포섭됐다는 것이었다.

김양기씨는 505보안대 지하실에 끌려가 옷을 발가벗긴 채 43일 동안 고문을 받았다. 고문이란 고문은 다 받았다. 코에 물 붓기, 물고문, 잠 안 재우기, 손가락꺾기, 무릎 관절에 몽둥이 넣고 밟기.

"징그럽네! 또 그 얘기를 하려니... 고문에도 순서가 있어요. 먼저 물고문 후 전기고문을 해요. 물에 젖으면 전기고문이 잘 되니까. 지금도 고문 후유증으로 약을 먹어요. 당뇨약, 심장약 등 고문 트라우마를 겪어요. 고문 받던 2월이 되면 그 때가 됐는지 몸이 반응을 합니다."

결국 고문을 감당할 수 없어 조총련에 포섭된 간첩혐의로 7년을 선고받고 5년 3개월 동안 복역했다. 1991년 5월에 석방됐지만 끝이 아니었다. 23년 동안 경찰에서 보안관찰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물에 젖으면 전기고문이 잘 되니까..."
  
애기섬을 바라보고 "아버지!" 를 부르며 우는 여성들
 애기섬을 바라보고 "아버지!" 를 부르며 우는 여성들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건설회사 일용직으로 노동일 해도 경찰이 찾아오고 나면 관리자들의 눈초리가 달라져요. 그러면 2~3개월 일하다 쫓겨나버려요."

김양기씨는 자신을 간첩으로 만든 대공과장과 505부대장이 서훈 취소명단에 들었다는 점에 위안을 삼고 있다. 아버지가 간첩혐의로 복역 중이었지만 억울함을 안 부인은 자식들에게 사실을 그대로 공개해 아이들과 함께 교도소 면회를 오기도 했다.

억울한 세상을 살았던 김양기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보라"고 하자 그는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해상위령제에서 술을 따르는 김양기씨
 해상위령제에서 술을 따르는 김양기씨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이런 세상이 안 오게 하려면 사법부가 제대로 작동해야 합니다. 대법원이 정권에 아부하고 시녀 노릇을 해왔습니다. 경찰이나 보안대가 조작해오더라도 대법원에서 제대로 판결을 내려줬더라면 제가 간첩이 되지 않았죠."

집으로 돌아간 김씨가 보내온 대법원 판결문을 비교해보면 동일한 사건을 두고 정반대 판결이 나온 걸 알 수 있다. 1987년 대법원 3부에서 작성된 판결문 중 일부의 내용이다.
 
원심이 유지한 제1심 판결거시의 증거 중 검사의 피고인에 대한 각 피의자 심문조서가 소론과 같이 검찰에서의 폭행 협박이나 사법경찰서에서의 고문과 신체 구속의 부당한 장기화 등으로 인한 임의성 없는 심리상태가 계속된 상황에서 작성되어 그 진술이 임의성이 없다거나 신빙성이 없는 진술이라고 의심할만한 사유가 있다고 인정할 자료는 기록상 보이지 아니함으로 이러한 취지에서 이를 증거로 채용한 원심의 조치는 정당하고 거기에 소론과 같은 위법이 있다고 할 수 없다.
  
기구한 부자의 사연 "이런 세상 안 오려면..."

다음은 2009년 7월 29일 광주고등법원 제1형사부 재심 판결문 중 일부이다.
 
이 사건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듯한 증거능력이 없거나 신빙성이 없고, 증거능력이 있고 신빙성 있는 증거들은 이 사건 공소사실과는 무관하며, 공소사실 자체도 납득할 수 없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원심은 피고인에 대하여 징역 7년 및 자격정지 7년이라는 중형을 선고하였고, 환송 전 당심, 환송 전 당심에 대한 대법원의 환송심, 재심대상판결, 재심대상판결에 대한 상고심에 이르기까지 5번에 걸친 재판과정에서 그 어떤 재판부도 이러한 사정들을 적절하게 헤아리지 아니하였다.

정연한 논리나 미사여구들을 모두 거두어 내고 이 사건을 돌이켜 보건대, 이 사건에 제출된 증거들은 공허하고 허무하다.

그런데 군 수사기관들은 이러한 증거들을 만들기 위해 국가의 존립근거인 국민에 대하여 그 신체의 자유를 아무런 근거없이 속박하였고, 공익의 대변자인 검찰도 그 직무를 다 하였다고 보기 어려우며, 무엇보다도 최후의 인권 수호기관인 법원은 최고법원에 이르기까지 5번에 걸친 재판을 거쳤음에도, 결과적으로 이러한 잘못을 지적하는 피고인과 그 변호인들의 주장에 관하여 눈과 귀를 막은 채 공허한 증거들이 그려낸 허상만을 바라보았다.
 
광주고등법원 제1형사부 재심을 맡은 판사들의 판결문은 추상같았다. 국가의 존립기반인 국민의 신체 자유를 속박한 경찰, 군 수사기관, 검찰, 판사들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김양기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애기섬이 가까워지자 김씨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아버지 이야기를 계속했다. 애기섬은 정규항로가 없어 여객선은 다니지 않는 곳이라 사선을 빌려서 진입이 가능한 섬이다.
  
애기섬을 바라보며 부인과 함께 헌화하는 김양기씨
 애기섬을 바라보며 부인과 함께 헌화하는 김양기씨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작년에 이곳에 올 때는 파도가 높아 섬 근방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어요. 그런데 제사를 지내고 나니까 파도가 잔잔해지더라고요. 술을 따르고 정종병마개를 씌워놨는데 갑자기 병마개가 뻥! 소리를 내며 날아가더라고요. 영령들이 술 한잔하고 싶었나 봐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한 김양기씨는 여순사건특별법이 제정되기를 바랬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태그:#김양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육과 인권, 여행에 관심이 많다. 가진자들의 횡포에 놀랐을까? 인권을 무시하는 자들을 보면 속이 뒤틀린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