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공작> 포스터.

영화 <공작> 포스터. ⓒ CJ엔터테인먼트


2005년 26세 나이에 <용서받지 못한 자>로 데뷔한 윤종빈. 2011년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로 세상에 널리 이름을 알린 윤종빈.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1980년대 한국사회의 민낯을 생짜로 보여줌으로써 욕망과 배신의 정수를 선보인 감독. <범죄와의 전쟁>은 472만 관객을 동원함으로써 상업영화의 가능성을 입증한다.

2014년에 윤종빈은 <군도: 민란의 시대>를 가지고 관객과 만난다. 무능하고 부패한 왕실과 탐관오리들의 학정에 신음하던 조선후기 민초들의 반란을 화면에 담은 영화 <군도>. 감독은 말한다. "<군도: 민란의 시대>에서 관객들이 심장 뛰는 액션활극의 쾌감과 재미를 전복의 카타르시스와 함께 시원하게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478만 관객이 윤종빈의 바람을 공유한다. 그는 한국의 역사적인 시공간을 깊이 사유하고 있는지 모른다. 왜냐면 그가 2018년에 들고 나온 영화가 <공작>이기 때문이다. <공작>은 분단 70년 세월 한반도의 정치-사회적인 상황을 반추하도록 인도한다. 윤종빈은 1980년대와 19세기 중반을 거쳐 20-21세기 우리의 자화상을 들여다본다.

영화의 시공간

1992년 '초원 복국집' 사건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이 대선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오늘날에도 회자되는 왕비서 김기춘의 "우리가 남이가?!" 하는 일갈은 지역감정 조장의 망언 제1호로 기록된다. 1989년 3당 합당으로 김종필과 함께 노태우 휘하로 들어가 1990년 민자당을 창당하고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이 된 김영삼.

1993년에 이른바 '북핵문제'가 불거지고 한반도에 위기의 징후가 감돈다. 정보사 출신 박석영(황정민 분)이 안기부 해외실장 최학성(조진웅 분)의 호출을 받는다. 북한이 개발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핵의 실체를 캐는 임무와 함께 암호명 '흑금성'이 그에게 부여된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과 완전히 절연하고 새로운 인간 흑금성으로 재탄생하는 박석영.

<공작>은 박석영이 흑금성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이런저런 각도로 보여준다. 그런데 영화는 목숨을 걸어야하는 대북 공작원이 되는 박석영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는데 매우 인색하다. 수많은 북파 공작원들이 살해당하거나 실종되었다는 정도의 정보만 스치듯 제공할 뿐이다. 그런 까닭에 공작원 흑금성이 평면적인 인물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우리는 영화에서 1993년을 기점으로 한 흑금성의 등장과 1997년 제15대 대선국면을 지나 2005년까지 서울과 평양, 북경 그리고 한반도 곳곳과 대면한다. 흑금성이 접촉하는 북한 대외경제위 차장 리명운(이성민 분), 북경주재 국가안전보위부 정무택(주지훈 분), 평양 주석궁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기주봉 분), 집권여당 국회의원 등이 영화의 사건과 관계를 추동한다.

안기부와 안전보위부

 영화 <공작>의 한 장면.

영화 <공작>의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윤종빈의 신작 <공작>이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안기부의 북한과 해외관련 업무가 국내 정치상황과 긴밀하게 연동돼 있다는 점이다. 아니, 국내의 정치적인 변동이 최우선이며, 나머지는 종속변수라는 사실이다. 북한의 핵개발이 얼마나 진척되었고,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흑금성에게 부과된 가장 중요한 과제다.

하지만 한반도 남단의 정치정세 변화로 인해 북핵문제는 핵심적인 문제에서 주변부 문제로 격하된다. 안기부라는 '조직'의 생사문제가 일차적인 과제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빨갱이' 김대중이 이회창을 앞서면서 대북공작의 전초기지이자 집권여당의 권력창출 하부기관 안기부의 존폐가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한다. <공작>은 이 지점을 파헤친다.

흥미로운 사실은 남한의 안기부처럼 북한의 안전보위부도 유사한 생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비호감'으로 그려지는 인물 정무택은 대외경제위 리명운과 사사건건 충돌한다. 최고 권력자 김정일과 맞닿아 있다는 자부심과 자신의 권력의지로 인해 정무택은 직급과 연공서열에서 상관인 리명운을 거스르며 충돌을 자초한다.

영화는 이것을 남북의 공통적인 문제로 제기한다. 국가와 민족의 이름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명징한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치적인 상황이 변하거나 (남한), 권력자의 의지가 작용한다면 (북한), 그 조직은 약화하거나 폐지될 수도 있음이 드러난다. 누구를 위한 권력이며, 무엇을 위한 조직인가, 그것이 문제다.

김정일과 북풍

<공작>에서 그려지는 북한의 모습은 너무도 극단적이다. 영변의 저잣거리와 꽃제비, 악취를 풍기며 산처럼 쌓여있는 시신들은 문자 그대로 끔찍하다. 주석궁에서 김정일이 보여주는 행태는 절대주의 시절의 제왕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흑금성을 주석궁으로 안내하면서 리명운이 전달하는 주의사항은 그 점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한민족의 입장에서 저쪽이 어렵다고 하니까 도와주는 것이지. 우리가 없으면 남쪽이 제대로 돌아가겠나, 그 말이야?!"

1996년 4월 국회의원 총선거를 목전에 둔 시점에 발생한 '판문점 북풍사건'을 염두에 두면서 김정일은 남북의 정치적 공생관계를 노골적으로 표출한다. 남한의 집권세력이 적절한 보상을 한다면, 북한이 적당한 선에서 호응함으로써 쌍방의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얘기다. 이것이 영화 <공작>이 객석에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메시지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199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벌어지는 일련의 숨 막히는 상황변화에 주목하는 것이다. 북핵의 실체에 가장 근접한 흑금성의 필사적인 노력과 집권당 앞잡이 노릇에 충실하려는 안기부 윗선의 조직 이기주의가 정면충돌한다. 흑금성의 목숨을 건 도박과 그를 저지하려는 안기부와 집권여당의 치열한 대결이 펼쳐진다.

공작원 흑금성

 영화 <공작>의 한 장면.

영화 <공작>의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대북 공작원이라면 우리는 냉철하고 잔인하며 물불 가리지 않는 인간형을 떠올린다. 그가 최종적으로 목적한 것이 돈이든 권력이든 국가든 민족이든 무관하게 그렇게 생각하기 십상이다. 대북 공작원 혹은 북파간첩이 활동하는 '북한'이라는 공간이 그런 인상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우리는 북한을 그렇게 배우고 알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공작>은 리명운의 따뜻하고 소박한 공간을 보여준다. 젊은 아내와 어린 아들과 살아가는 외화벌이 총책임자 리명운. 그가 보여주는 소탈함과 따사로운 인간성은 대북 공작원 흑금성의 인간성과 다르지 않다. 470만 넘는 관객이 <공작>을 찾은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남이든 북이든 어디나 살만한 곳이다, 하는 새삼스런 인식.

영화는 첫머리에 사실이 아니라, 허구적인 이야기에 근거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흑금성의 구속과 만기출소를 담담하게 설명한다. 허구와 사실관계의 괴리에서 발생하는 진실은 관객들이 알아서 판단하라는 투다. 그럼에도 우리는 흑금성의 실체와 본질에 대해서 너무나 정보가 없다. 영화도 끝내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는 말할 수 있다. 2005년 남북합작광고에 등장하는 남북의 배우들 배후에 등장하는 리명운과 흑금성의 눈길이 많은 것을 시사해주기 때문이다. 북한에도 사람이 살고 있으며, 남한도 마찬가지라는 사실. 북풍이든, 공작이든, 주석궁이든, 청와대든, 남과 북은 언젠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너무도 자명한 그 이치 말이다.

윤종빈 공작 흑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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