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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와 한국의 독립기념일은 8월 15일로 같다. 하지만 1945년 한국은 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으로부터, 1947년 인도는 연합군 일환이었던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8월 15일'이라는 인연으로 얽힌 인도와 한국, 한국과 일본, 일본과 인도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인도에는 다른 동남아 국가와 비슷하게 일본 기업이 많다. 2017년말 기준으로 4838개 기업이 진출했다. 500여 업체가 진출한 한국에 비해 10배나 많은 숫자다. 1952년 일본과 인도의 국교 수립과 동시에 일본 기업들은 일찌감치 인도에 진출했다. 인도 1위 자동차 기업으로 등극한 마루티-스즈키를 비롯해 인도 1위 TV 방송국 소니(Sony)TV 등 인도를 대표하는 기업들 중에는 일본 기업인 경우가 많다.

일본과 인도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장면은 2014년 모디 수상 취임 100일도 되지 않았을 때인 8월 28일부터 9월 3일까지의 일본 방문을 꼽을 수 있다. 모디는 취임 후 첫 번째 해외 방문국으로 일본을 꼽았다. 게다가 취임 100일을 해외에서 맞아 인도 내에서 화제가 됐다.

당시 모디가 이끌어낸 성과는 5년 동안 350억 달러의 투자와 원조 약속, 인도 환경개선, 인프라 건설, 보건 문제에 대한 일본의 협조였다. 또, 정치·경제·사회적 파급이 높은 인도 철도 현대화 사업에도 합의했다. 현재 2023년 개통 목표로 상업중심지 뭄바이와 모디의 정치적 근거지이자 일본 기업들이 많은 공업도시 아메다바드를 연결하는 고속철도 공사가 한창이다.

당시 한국 정부 일부 관계자들과 언론은 인도의 일본 방문을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포석으로 분석했다. 그러나 일본과 인도의 관계를 조금만 알면 다른 시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모디는 일본 방문 동안 한가로이 다도 강습도 받고, 교토에 있는 진각종 본사도 방문하는 등 5일을 여유롭게 머물렀다. 한국 방문은 없었다. 이 대목을 잘 들여다보면 인도인들이 일본에 대한 생각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바로, 일본을 제대로 느끼고 공부해 자신들의 희망으로 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인도와 일본, 일본과 인도

인도와 일본은 매년 공식적으로 정상 회담을 개최하고 있다
▲ 일-인도 포럼 인도와 일본은 매년 공식적으로 정상 회담을 개최하고 있다
ⓒ M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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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모디는 일본에 이런 행보를 보일까. 그것은 그를 배출한 극우 힌두민족주의 세력의 사상적 뿌리가 바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향수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인도와 일본은 공식적으로 적대국이었다. 인도를 향하려는 일본 버마원정군에 맞서 인도 부대가 영국군 지휘를 받아 전쟁을 벌인 적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인도와 일본의 문제가 아니라 영국과 일본의 문제였고, 영국 식민지 인도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42년 영국을 대상으로 독립운동을 벌이던 인도 독립군 일부가 일본의 지원을 받아 인도국민군을 결성해 투쟁하기도 했다.

두 나라의 정서적 유대감은 근대적 제도를 받아들였던 뿌리가 영국인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근대 제도가 크게 미국과 영국을 기준으로 발달해 왔다면 영국의 제도가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아시아 국가가 바로 인도와 일본이었다. 인도는 또 공식적으로 전세계에서 일본으로부터 가장 많은 공적 원조(ODA)를 받고 있다.

양국은 1952년 평화조약에 서명하고 외교 관계를 맺었다. 이 평화조약은 일본이 전후에 맺은 최초의 평화조약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때 인도가 일본에 수출한 철광석은 일본 경제 부흥에 크게 기여했다. 1991년 자유주의 경제 체제로 바뀐 인도와 일본의 관계는 2000년 모리 총리의 인도 방문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강화되기 시작했다. 그후 2006년 일본 고이즈미 총리와 인도 수상 만모한 싱(Manmohan Singh) 시절 '글로벌 및 전략적 동반자'로서 위상이 확립됐다. 2014년 중국의 확장정책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양국은 군사안보 측면을 강조한 '특별 전략적 글로벌 파트너쉽'을 통해 현재까지 돈독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끈끈한 관계로 인해, 인도는 인프라 건설에 일본 정부 차관을 제공받고 공동 군사 훈련 실시하는 등 경제 군사적 동맹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2013년 BBC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42%의 일본인이 인도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고 오직 4%만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로부터 불교로 맺은 인연으로 시작해 인도와 일본은 서로 많은 교류를 했던 기록이 나온다.

특히 16세기 인도 서부 항구도시 고아(Goa)에 있었던 포르투갈 동인도 회사를 통해 포르투갈인들이 인도인들과 함께 일본에 진출했고, 이 시기에 일본인들은 포르투갈 사람들을 인도에서 온 '인도 사람들'이라고 여겼다. 이 시기에 조총도 전해져 임진왜란 때 사용됐다.

일본을 희망이라 여겼던 인도

1942년 12월, 인도의 독립군인 국민군 모한 싱 대위와 일본군 장군 후지하라, 모한 싱은 인도 독립후 상원의원으로 활약했다
▲ 인도 독립군과 일본군 1942년 12월, 인도의 독립군인 국민군 모한 싱 대위와 일본군 장군 후지하라, 모한 싱은 인도 독립후 상원의원으로 활약했다
ⓒ 인도독립운동기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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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들어 인도인들이 일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세기 말 메이지유신 이후 개혁과 1905년 세계 열강이었던 러시아를 상대로 조그만 섬나라 일본이 전쟁에서 이긴 것을 목격한 이후로 보인다. 특히 서구인들에게 수백 년간 지배를 받아온 인도인들은 일본인을 통해 희망을 발견했던 것이다.

과거 일본 제국주의 희생양이었던 한국 국민으로서 같은 제국주의 희생양인 인도 오피니언 리더들과 만나서 일본에 대한 생각을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일본은 자기들에게 직접 피해를 입히지 않았고 자신들의 적인 영국과 적이 돼 싸운 아시아의 유일한 국가로 생각하고 있다. 즉 '영국의 적은 우리의 친구'라는 인식이 어느 정도 깔려 있고 그것이 일본을 좀 더 친근하게 받아들이는 인식의 기반 중 하나가 됐다.

일본인들은 중국과 한국을 통해 불교가 전해진 8세기 이후, 우리와 마찬가지로 인도를 '천축' 혹은 '서방정토(西方淨土)'로 동경해왔다. 1592년 정명가도(征明假道, 명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길을 내줄 것을 요청)를 기치로 조선과 전쟁을 벌였던 임진왜란 때, 집권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졌던 세계에 대한 인식은 인도·중국(한반도 포함)·일본, 이렇게 3개국으로 구성된 세계관이었다.

그의 야망은 삼국을 모두 정복하고 이를 통괄하는 황제가 되는 것이었다. 즉, 이 세상에 존재하는 3개 나라를 다 점령하면 일본의 형식적 지배자인 덴노(天皇)도 삼국 황제 중 하나로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아래 놓이게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고아(Goa)의 포르투갈 총독에게 편지를 보내 '조공을 바치지 않으면 정복하겠다'는 일종의 협박을 한 것을 보면 나름대로는 꽤 구체적으로 생각을 펼쳤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당시 포루투갈 총독을 인도의 지배자로 여겼다.

그후 세월이 흘러 일본이 인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메이지(明治)시대였다. 1899년 동경제국대학교에 산스크리트어과가, 1903년에는 일본-인도협회가 창설됐다. 또 1910년대 인도 독립운동이 한창일 때 영국 동인도 회사의 추적을 피해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으로 망명한 이후 관심은 더욱더 커졌다. 이들 망명객들이 현대 인도-일본 관계의 기초를 세운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한명인 수바스 찬드라 보스(Subhas Chandra Bose)는 현재에도 일본인들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이 무척 애호하는 '일본식 카레라이스'를 유행시킨 인물로 유명하다.

인도인 재판관 팔

야스쿠니 신사 안에 있는 인도 재판관 팔 기념비
▲ 야스쿠니 신사의 팔 기념비 야스쿠니 신사 안에 있는 인도 재판관 팔 기념비
ⓒ 권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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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말 일본 아베 총리가 모디 수상을 만났을 때 '우리 일본의 모든 사람들은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전범들을 재판했던 인도인 재판관 '팔(Pal)'에 대해 잘 알고 있다'라고 여러 차례 언급했다.

거슬러 올라 2007년, 아베가 첫 총리를 역임할 때 인도를 방문했는데, 그 당시 가장 우선 순위에 두고 한 일이 콜카타 방문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재판관 '라드하빈노드 팔(Radhabinod Pal)'의 아들과 만났다. 이때 아베는 '일본인은 재판관 팔(Pal)을 너무나도 존경하고 그리고 그는 일본과 인도를 연결하는 가교다'라고 말했다.

왜 아베는 외국 수반이 잘 가지 않는 콜카타까지 가서 이런 말을 했을까? 자의든 타의든 인도가 일본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동경전범재판' 때였다.

연합국 재판관이었던 인도인 판사 팔(Radhabinod Pal)은 11명의 재판관 중 유일하게 피고인 전원 무죄를 주장하는 소수의견을 제출했다. 팔은 '전쟁의 승패는 힘의 강약에 의한 것이지 정의와는 관계없다'는 전제 아래 '침략전쟁의 책임을 개인에게 묻는 일은 부당하다'는 내용의 판결 이유서를 제출했다.

팔(Pal)의 의견은 판결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지만, 난징 학살을 부정한 대표적인 우익의 책 'What Really Happened in Nanking (난징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나?)'의 저자로 알려진 다나카 마사아키(田中正明)의 1952년 '일본무죄론(日本無罪論)'의 논리적 근거로 작용했다. 이것은 현재까지도 일본 우익들에게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66년 팔은 일본에서 1급 국가훈장을 받았고 현재 그의 모습은 군국주의의 본산 야스쿠니 신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인도는 1951년 열강들이 참석한 샌프란시스코 평화 협약을 '열강들이 일본의 주권과 독립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참석을 하지 않았던 적도 있다.

한국이 아직도 사실 여부에 논란이 있는 고대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과 결혼한 것으로 전해지는 인도 아유타국(현 아요디아) 공주인 '허황후와의 혼인'을 예를 들며 한-인도간의 연결을 끈으로 삼고 있는 것에 비해 좀더 정치적으로 상징적 인물을 인연의 끈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1949년 네루(Jawharlal Nehru) 수상은 전쟁의 상처로 고통받고 있는 일본 어린이들에게 친선 선물로 자기 외동딸 이름과 같은 '인디라(Indira)'라는 코끼리를 도쿄의 우에노 동물원에 보내줬다.

이 코끼리는 1983년 고령(高齡)으로 죽을 때까지 많은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인도는 1980년대부터 '동방정책(Look East)'의 중요한 국가로 일본을 지목했고, 일본도 이에 부응해 1986년에는 최대 경제 원조국이 된 이래 아직까지도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팔 판사의 이야기는 2017년 Tokyo Trial이라는 넷플릭스 영화로 제작되어 상영되었다
▲ 팔 판사 이야기를 다룬 도쿄 트라이얼 팔 판사의 이야기는 2017년 Tokyo Trial이라는 넷플릭스 영화로 제작되어 상영되었다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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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70대 초반의 은퇴한 유명 인도 언론인 밥 루파니(Bob Rupani)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는 인도인들의 일본에 대한 인식을 잘 알 수 있는 영화를 하나 소개했다.

그는 1955년 나온 영화 '메라 주따 헤 자빠니(Mera Joota Hai Japani: 내 신발은 일본제)'를 소개했다. 이 영화 주제가는 인도 영화 역사상 가장 유행한 노래 중 하나다. 또한 2013년 영화 할리우드 영화 그래버티(Gravity)에서 인도 배우 팔두트 샤르마(Phaldut Sharma)가 노래를 불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가사 내용은 모든 것은 다 외세로부터 받아들여도 근본은 유지하자는 내용이다. 이 내용의 철학적 배경이 된 것은 1880년 대 일본 근대화의 핵심정신 '동도서기(東道西器)'로 부터다. 동도서기는 동양의 도덕, 윤리, 지배질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서양의 발달한 기술, 기계를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룩한다는 사상이다.

인도 모디 총리가 구자라투주 장관이었을 때 인도 힌두교 극우단체 RSS 행사에 참석한 장면
▲ RSS와 모디 총리 인도 모디 총리가 구자라투주 장관이었을 때 인도 힌두교 극우단체 RSS 행사에 참석한 장면
ⓒ B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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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SS 단원들이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 인도 RSS 단원 RSS 단원들이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 R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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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그 당시 인도 최고의 힌두주의자 나렌드란드 다타(Narendranath Datta)가 받아들였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모디 총리는 그의 열렬한 추종자이며 10대 후반이래 극우 힌두민족주의 단체인 RSS(민족의용군)의 단원으로 활동해왔다.

따라서 모디와 지배층들은 일본의 잔학성이나 공격성에 대한 비판보다 일본인들이 가진 불굴의 정신과 집단적 충성심에 특별히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모디의 주지사 시절부터 중점적으로 추진 했었던 '바이브란트 구자라트(Vibrant Gujarat, 구자라트 경제 활성화) 투자설명회'에 해마다 주인도 일본 대사를 비롯해 수많은 일본기업인들이 참석해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투자계약을 맺고 있다. 또 구자라트주에 스즈키 자동차를 비롯해 수많은 일본이 들어선 것도, 구자라트와 뭄바이를 잇는 고속철 신간센 건설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나라와 같이 8월 15일을 독립기념일로 기억하는 한국과 인도, 인도 현지에서는 한-인도 국민들이 한 자리에 모여 독립을 축하하는 기념식을 매년 공동으로 개최한다. 하지만 인도의 독립이 오히려 일본의 군국주의 망령을 되살린 계기가 된 역사적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태그:#인도, #일본,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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